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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저 드래곤 1권(9화)
3장 메탈슈트 제작(3)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카라스는 폐기물 처리장의 자재 대부분을 분류했다. 대신 다른 이들이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없게끔, 자신만이 아는 패턴과 방식으로 재료들을 이리저리 중구난방 섞어 놓긴 했지만.
‘이제는 됐다.’
마지막 재료를 분류하며 카라스는 속으로 희열의 미소를 그렸다.
폐기물의 양은 실로 막대했다. 그 덕에 비교적 가치가 있는 재료들의 양도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그가 대충 짐작으로만 계산해 보아도 앞으로 몇 년은 슈너드 남작에게 상납할 분량이 충분히 되었다. 이제는 상납을 따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진짜 수확은 따로 있었다.
“후후후훗.”
그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한쪽에 쌓인 재료들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특별히 따로 빼놓은 상태가 양호한 부품들, 바로 그의 메탈슈트 제작에 쓰일 재료들이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조금 뜸해졌나 싶었더니, 카라스가 제노 영감을 찾는 횟수가 갑자기 부쩍 늘어났다. 하지만 이유는 예전과 달랐다. 예전처럼 재료의 가치를 묻기 위해 부르는 게 아니었다.
“그럼 이건?”
카라스가 손바닥 정도 크기의 부품을 보여 주며 물었다. 제노 영감이 눈을 찡그리며 그것을 살폈다.
“이건…… 어디 보자. 마나 전달 장치의 고정축 같은데?”
“장착 위치는?”
“위치?”
“그래.”
영감은 자신의 명치를 가리켰다.
“대충 여기쯤? 외부 흉갑판과 좌우로 열리는 복부 장갑이 맞물리는 자리 있지 않나. 그 틈새를 열면 리벳으로 고정이 되어 있는 쇳덩이가 보일 거다. 그게 바로 이 장치의 머리 부분이 외부로 드러난 거야. 여기, 이쪽 면이지. 그리고 반대편인 여기는 코어 외부 전달판의 하부와 맞닿는 곳이고.”
“흐음, 그렇군.”
카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흙바닥에 뭔가를 열심히 써 내려갔다.
제노 영감이 물었다.
“그런데 이놈아, 요즘 들어 왜 자꾸 이런 걸 묻는 게냐? 혹시 팬저드래곤 등급의 메탈슈트라도 만들어 보려고?”
“하핫, 팬저드래곤?”
영감의 말에 카라스가 실소했다.
팬저드래곤 급의 메탈슈트는 고대 마도 왕국의 유산이다. 황송하게도 무려 드래곤하트를 코어로 사용하며 지금까지 단 4기가 현존하고 있는, 단연코 최강의 기체이기도 하다.
또한 팬저드래곤의 메탈슈터들도 죄다 그에 걸맞는 거물들이다.
우선 이곳 파티엔 공국의 공왕 베론을 비롯하여 공국의 상국인 크로이츠 제국의 철혈황제 라키누사, 황제의 심복인 냉혈공작 프리하르츠, 서부국가연합의 기사인 레이디 카에데 등등 모두가 소드 마스터 등급의 인물들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게다가 한 가지 첨언하자면 현재 만들어지는 대륙의 모든 메탈슈트들은 그 팬저드래곤의 고대 기술을 모방하여 만든 것에 불과했다.
카라스가 반문했다.
“영감 드디어 진짜로 미쳤군?”
“농담이다. 그걸 심각하게 듣냐, 이놈아. 어쨌거나, 왜 자꾸 부품에 대한 걸 꼬치꼬치 묻는 게냐?”
“메탈슈트에 관한 것은 영감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 묻는 것이지.”
“원 이놈, 딴청 피우기는. 내 말은 왜 자꾸 메탈슈트의 내장 부품들에 관심을 가지느냔 말이다. 3구역의 작업을 할 때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인데.”
“그래도 연관은 있지 않나. 단순한 외부 장갑을 만들 때도 내부 구성품과 역할을 알면 제작 목적을 이해할 수가 있지. 그러면 그 목적에 맞도록 장갑의 주된 방어 부위를 더 강화시킬 수가 있고. 나는 내부 부품과 외부 장갑을 따로 보지 않아. 그 모두가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유기체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카라스의 논리 정연한 말에 제노 영감의 입이 쑥 들어갔다.
“끄응, 그건 맞긴 하다만.”
카라스가 씨익 웃었다.
“사실 그건 핑계일 뿐이고, 명색이 작업조장이나 되어서 누군가가 메탈슈트에 대해 물어봤을 때 대답 정도는 할 수 있어야지 체면이 서지 않겠어?”
“허허, 그것도 그렇군.”
그제야 제노 영감은 수상하다는 눈초리를 풀었다. 카라스는 그런 그에게 쉴 틈도 주지 않고 다른 내부 부품을 내밀었다. 제노 영감의 설명이 이어졌다.

어느덧 카라스가 작업조장이 된 지도 1년 하고도 반이 훌쩍 지나 버렸다. 이제 그는 20살을 눈앞에 둔 완숙한 청년이 되었다.
그동안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메탈슈트에 대해 공부했다. 바로 앞의 전생에서 기계 공학도로 살았던 삶이 그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남이 몇 년이나 걸려 이해할 내용을 카라스는 지닌바 지식을 바탕으로 단번에 이해하여 그 자리에서 응용하기까지 했다.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와도 같다.’
그것이 카라스가 메탈슈트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었다. 메탈슈트는 이곳 세계의 마법적 지식과 야금술이 빚어 낸 기술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촤라락.
카라스는 폐기물 처리장 구석에서 양피지를 꺼내어 펼쳤다.
그 커다란 양피지에는 빼곡한 선과 도형으로 조밀한 그림과 함께 여러 수치가 적혀 있었다. 바로 그동안 그가 스스로 연구하며 작성한 메탈슈트의 설계도였다.
그는 이 설계도가 누군가의 눈에 띄는 것을 염려했다. 때문에 모든 문자를 이 세계의 사람들은 결코 읽을 수 없는 중원의 한문으로 써 버렸다. 최소한의 보안을 위해서였다.
카라스는 폐기물 처리장 한쪽으로 걸어가 고철 더미를 뒤졌다. 그러자 그 아래에 있던, 고철들로 얼기설기 조합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약 30% 정도 완성된 메탈슈트였다. 기본적인 골격이 드디어 만들어진 것이었다.
뼈대로만 추정컨대 그 신장은 약 2미터가량. 다른 여타 메탈슈트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크기였다. 애초부터 코어의 증폭률이 낮아 무게를 줄여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그 초라한 메탈슈트를 보는 카라스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다시 1년의 시간이 더 흘렀다.
메탈슈트는 조금씩 완성품의 모습을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이때쯤 카라스는 메탈슈트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코어가 내뱉는 유일한 한마디, ‘카밀카사(CamilleCasa)’라는 말이 그대로 메탈슈트의 이름이 되었다.
그런 메탈슈트의 비밀 제작과는 별개로, 지난 시간 동안 카라스는 공장 내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카라스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고 보았다. 카라스는 리퍼를 처단할 때만 무력을 동원했지, 그 이후부터는 노예들에게 단 한 번도 폭력을 쓴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무뚝뚝하지만 사려 깊은 태도로 노예들을 대했다. 덕분에 처음에는 카라스를 두려워하던 여러 노예들도 곧 그의 진심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
또한 어느새 공장의 가드들도 작업조장 카라스를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그가 조장이 되고부터는 노예들 사이에 폭력 사태가 완전히 근절되었다. 덕분에 가드들도 신경을 곤두세울 일이 거의 사라졌다. 카라스 덕에 일이 편해지니 자연 평가가 후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카라스는 슈너드 남작과 약속한 정기 상납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오히려 신년제나 추수제 같은 명절이 오면 알아서 추가 상납을 하기까지 했다. 그에 크게 기뻐한 슈너드 남작은 가끔 3구역의 노예들에게 약간의 고기와 술을 내려 주곤 했다.
그런 처사는 노예들의 의욕을 증진시켜 주었고, 이는 곧 작업 능률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그런 때에는 어김없이 할당된 작업량에 대해 초과 달성이라는 좋은 성과가 나오곤 했다.
그러자 3구역과 연계되어 작업을 진행하는 2구역의 기술자와 장인들도 종종 3구역 작업조장 카라스의 성과를 입에 올리게 되었다.
3구역이 쌩쌩 돌아가며 외장 부품이 쏟아져 나오고, 그 질이 날로 우수해지다 보니 2구역의 작업에도 탄력이 붙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종국에는 1구역의 마법사들도 덩달아 신이 났다. 최근 들어 2구역에서 나오는 마나 전달 장치의 효율이 좋아지니, 같은 코어를 제작해도 효율이 올라가 보람을 느끼곤 했다.
곧 그 원인을 알게 된 마법사들도 일개 노예인 카라스에 대한 칭찬을 간간이 입에 올리게 되었다.

그렇게 반년이 더 흘렀다.
연말이 되어 파티엔 공국에 있는 모든 공장의 실적이 종합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이변이 일어났다.
카라스가 수용되어 있는 트리스탄 자작령 제4생산기지가 목표량 달성과 제품 우수성의 양쪽 부문에서 1등을 휩쓴 것이었다.
사실 제4생산기지는 지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실적에서 꼴찌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규모도 공국의 다른 생산기지보다 작았고, 시설도 비교적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의 실적 발표는 공국 내부에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또한 그 공로로 공장의 책임자인 트리스탄 자작은 직접 공왕 베론에게 두둑한 포상을 받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모든 성과의 첫 시발점은 카라스였다.
공왕 베론을 만나고 돌아온 트리스탄 자작도 그것을 잘 알았다.
자작은 카라스를 호출했다.

* * *

“이쪽으로.”
카라스는 사집관 하렌의 안내에 따라 트리스탄 자작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자작은 그의 인사를 무덤덤하게 받은 뒤 서류에만 눈길을 주었다.
카라스는 서서 기다렸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자작이 눈을 들었다.
“일단 앉지.”
“예.”
다시 서류 넘어가는 소리,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만이 흘렀다. 자작이 그 모든 일을 끝내고 일어선 것은 한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자작은 카라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많이 기다리게 했군.”
“아닙니다.”
아들을 수용소에 집어넣은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신경도 쓰지 않는 아들.
4년 만에 이루어진 아버지와 아들의 상봉이다. 짧은 순간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하지만 그 사이에 부자의 정이라거나 하는 통속적인 감정의 흔적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트리스탄 자작은 노예인 카라스를 아들로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카라스 또한 애초부터 유전자상의 혈연 따위에는 정을 느끼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덕분에 둘의 만남은 삭막하기만 하였다.
자작이 말했다.
“요즘 네놈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더군.”
“…….”
“공장에 밀어 넣고 난 뒤로는 네놈의 존재 자체를 잊으려 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지내 왔는데 말이지. 그런데도 네놈은 어느덧 스스로의 능력으로 다시 내 앞에 서기에 이르렀군. 그래, 원하는 것이 있나?”
“……예?”
“원하는 것이 있으니 그토록 열심히 일했겠지. 어디 한번 말해 봐라. 네놈이 원하는 게 무엇이냐. 3구역을 벗어나는 것만 빼고는 조건을 봐서 들어주겠다.”
“…….”
끝내 3구역에서 벗어나게는 못해 주겠다는 말이다.
카라스는 침묵했다.
자작도 입을 다물고 카라스를 쳐다봤다.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생각을 정리한 카라스가 입을 열었다.
“구급약과 붕대가 필요합니다.”
“……음?”
“그리고 3구역 전용의 의료 시설과 의무관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몸이 불편하거나 아픈 자가 생겨도 그곳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작업에 복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배식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지금 먹는 멀건 죽과 딱딱한 빵으로는 노예들이 노동을 하면서 체력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두 가지만 조치해 주신다면 3구역의 노예들은…….”
듣고 있던 자작이 중얼거렸다.
“미쳤군.”
“…….”
자작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못 들었나? 미쳤다고 했다. 네놈을 포함한 3구역의 모든 놈들은 노예다. 노예가 뭔가? 인간이 있고, 그 아래에 가축이 있고, 그보다 아래 가장 밑에 노예가 있다. 가축보다도 못하다는 뜻이다. 어질고 덕 많은 이 몸은 그런 놈들에게도 하룻밤 정도의 휴식이나 술과 고기 정도는 대어 줄 수 있다. 하지만 인간도 아닌, 아니, 개나 돼지 등의 가축보다도 못한 것들에게 인간을 위한 시설을 마련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내 말이 틀렸나?”
“하지만…….”
“그만. 거기까지. 더 듣다가는 내 귀가 소란스러워질 것 같군. 이보게, 사집관.”
밖에서 대기하던 하렌이 냉큼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여기 작업조장 카라스의 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술과 고기, 그리고 하룻밤의 휴식을 내리는 바이다. 3구역의 노예들에게 베풀도록.”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하렌이 물러나고 난 뒤, 자작이 카라스를 돌아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이러면 되었겠지?”
“…….”
“한 가지 일러 줄까?”
자작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가 카라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꿈은 위험한 것이야. 특히 이곳에서는 더더욱. 인간도 아닌 것들이 함부로 꿈을 꾸면 크게 다치는 법이거든. 알았으면 냉큼 꺼지도록. 다시는 내 앞에 더러운 면상을 내미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불끈.
카라스의 주먹에 힘줄이 와락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스스로를 억눌렀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
그런 생각이 카라스의 이성을 유지시켜 주었다.
카라스는 그대로 자작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가 올려 본 하늘은 진한 핏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