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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저 드래곤 1권(12화)
4장 작열하는 불길 속에서(3)
“으으…….”
제2용광로의 조작을 맡은 노예 막스는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며칠 전부터 피로가 도통 풀리지 않더니, 오늘 아침부터는 온몸에 한기가 돌면서 고열이 끓었다. 덕분에 그는 아침을 전혀 먹지 못했다. 먹는 족족 게워 낸 것이다.
고열에 시달리는 데다 아침도 못 먹어 허약해진 그는 쉬고 싶었다. 하지만 이 공장이 어떤 곳인가. 이곳에서 일하는 노예들에게는 기본적인 인권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설령 한쪽 팔이 부러져도 성한 팔로 작업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어쨌건 막스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아프다는 표시 한 번 내지 못하고 일터로 떠밀려 나왔다. 그리고 지금, 용광로 조작을 하면서도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다.
막스는 생각했다.
‘아아, 며칠 전에 카라스 조장이 의무실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했다던데. 혹시 그 제안이 먹혔다면 오늘 난 편하게 쉴 수 있었을까.’
그때였다.
“이봐! 막스! 뭐 하나!”
“으으…… 어?”
아래쪽에 모인 노예들이 소리를 지르자 잠시 혼절할 뻔했던 막스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가 아래쪽을 살폈다. 주물 작업을 맡고 있는 노예들이 성난 기색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용광로를 조작하여 때에 맞춰 쇳물을 부어 줘야 하는데, 그 일을 맡은 막스가 늦장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막스는 서둘러 기기를 조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원래 지켜야 할 조작 절차를 무시하고 말았다.
사실 막스는 이 용광로 조작만 몇 년을 해 온 베테랑이었다. 평소에도 조작 절차는 자주 무시해 왔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끼이이이…….
용광로가 규정 속도를 무시하고 훨씬 빠른 속도로 기울어졌다. 그 서슬에 용광로 안에 담긴 섭씨 수천 도의, 총 25톤의 걸쭉한 쇳물이 크게 출렁였다. 규정속도 위반이 주된 원인이었다.
그 출렁임을 받은 용광로의 지지대에 부하가 걸렸다. 용광로 자체의 무게에 더해, 쇳물의 출렁임이 25톤의 중량을 한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그 무게의 순간적인 집중은 용광로를 떠받치는 지지대에 부담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기기를 조작하면서도 이미 막스는 반쯤 정신을 잃고 있었다.
용광로 기울어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끼이이이…… 콰드득!
섬뜩한 소리가 났다.
“빌어먹을! 멈춰!”
카라스가 외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콰아아아앙!
지지대 축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터졌다.
카라스가 바라보는 가운데, 제3구역 공장에 단 네 개밖에 없는 가장 큰 용량의 용광로가 통째로 쓰러졌다.
25톤 분량의 끓는 쇳물이 아래쪽의 주물 라인으로 쏟아졌다. 제3구역의 공장 안에 때아닌 지옥도가 펼쳐졌다.
촤아아악!
“끄, 끄아아아아아아―!”
“끼에으아아악!”
“사, 사람 살……!”
용광로 아래쪽의 주물 라인에는 약 150명의 노예들이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섭씨 수천 도의 끓는 쇳물이 쏟아져 내렸다.
절반 이상의 주물 라인 노예들이 그 쇳물을 정통으로 뒤집어썼다. 그들은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몇 초도 가지 않아 절명했다. 말 그대로 쇳물에 튀겨지고 녹아내려 죽어 버린 것이었다.
운이 좋아서 쇳물을 덮어쓰지 않은 노예들도 있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들에게 끝까지 미소를 지어 주지는 않았다.
간신히 쇳물을 피했는가 싶었더니, 거대한 쇳덩이인 용광로 자체가 넘어진 채로 바닥을 크게 굴렀다. 흘러오는 쇳물을 피해 도망치려던 노예 수십 명이 그 아래에 깔렸다.
“끄르락!”
“끼아아아악!”
수십 명의 비명이 한데 섞여 기묘한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넘어진 용광로는 아래쪽의 인간들에게는 무관심한 듯, 마치 거대한 롤러처럼 나약한 모든 것을 짓누르고 부수며 그 위를 굴러갔다.
이 모든 일들이 불과 30초 이내에 벌어졌다. 너무나 큰 재난이었지만, 항상 그렇듯이 재난은 인간이 대비할 수 없는 순간에 가장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법이다.
가드들이 외쳤다.
“저, 저런!”
“이봐! 대장님을 불러!”
“아니면 레이하트 부관님이라도! 어서!”
“아, 안 됩니다! 두 분 모두 현재 부재중이십니다! 오늘 오찬 모임을 위해 트리스탄 자작님을 수행하여 인근 레티아 영지로……!”
“그럼 다른 대리 책임자라도 불러와! 일직 사관님을 찾아와! 빨리!”
평상시에는 공장의 노예들을 감시하고, 유사시에는 노예들을 보호해야 할 가드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도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상상을 초월한 재난 앞에서는 그들도 별수 없었다. 급하고 두렵다 보니 우선 마음을 의지할 상급자부터 찾는 것이다.
카라스는 할 말을 잃은 채 그 모든 장면을 목도했다. 끔찍한 재난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각과 계산은 끔찍한 재난을 겪는 보통의 인간들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 틈을 이용할까?’
제일 먼저 카라스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큰 사고로 인해 공장과 가드들이 혼란에 빠졌다. 놓치기에 아까운, 절호의 기회다. 지금이라면 훨씬 수월하게 탈출할 수 있을지도.
그러나 카라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계획대로만 실행하면 충분히 탈출할 자신이 있는 그였다. 그런 그가 굳이 이런 혼란을 이용할 필요가 없다.
혼란이 인다는 것은, 그만큼 의외의 변수가 많이 발생한다는 뜻이다. 평소에도 잘 할 수 있는 것을, 의외의 불운한 변수 때문에 그르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렇게 판단을 내린 그는 사고 현장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남는 쪽으로 결정의 가닥을 잡은 이상, 이제부터 자신이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명확하다.
“살려…… 누가 좀! 아아악!”
노예 하나가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달려오다가 바닥을 굴렀다.
카라스는 근처에서 천을 가져와 그 노예의 몸을 내리치고 덮었다. 노예의 몸에 붙은 불이 꺼졌다. 하지만 이미 노예는 크나큰 고통으로 혀를 빼물고 죽은 뒤였다.
카라스의 입에서 절로 욕설이 나왔다.
“치잇! 젠장!”
불이 번지고 있었다.
끓는 쇳물들이 이리저리 중구난방으로 흐르며 곳곳에서 화재를 일으키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철을 제련하고 두드리는 곳. 노예들이 개인 화로에서 순간적으로 화력을 올리기 위해 불에 집어넣는 연소 첨가물이 곳곳에 즐비했다.
그 첨가물이 가열되며 곳곳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화재가 더욱더 크게 부추겨졌다.
그렇게 일어난 불길 사이를, 공포에 질린 노예들이 패닉 상태에 빠져 두서없이 이리 뛰고 저리 날뛰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공장 전체로 불길이 번질 판이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다른 인간들은 몰라도 노예들은 다 죽는다. 그건 너무나 명확한 현실이다.
“흐으읍.”
카라스는 숨을 최대한 들이켰다. 그리고 목청을 키워 거세게 포효했다.
“나다! 작업조장 카라스다! 내가 너희들에게 살길을 열어 주겠다! 내 말을 들어라! 그러면 반드시 살 수 있다!”
그의 세찬 목소리가 혼란에 빠진 노예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순간적으로 거의 모든 노예들이 카라스를 돌아봤다.
카라스가 다시 외쳤다.
“이쪽으로 와라! 다들 안에서 날뛰지 말고 우선 밖으로 나가! 근처의 부상자들을 밖으로 옮겨! 그리고 수용소의 우물과 공장 사이에 일렬로 줄을 서서 띠를 만들어! 바가지든 두레박이든 쓸 수 있는 것은 다 써서 물을 전달해! 그리고 펌프식 소화전에 호스를 연결해! 어서!”
사실 이 정도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불이 나면 우선 몸을 피하는 것. 그리고 불을 끌 수 있도록 물 등의 소화 물질을 가지고 오는 것.
하지만 극한의 상황, 공포가 전염된 상황에서 그걸 곧바로 떠올리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걸 냉정하게 실행에 옮기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카라스의 외침은 노예들의 머릿속을 덮고 있던 공포라는 천을 한 번에 걷어 내었다.
그는 계속 외쳐서 노예들에게 지금의 상황을 주지시켰다. 마치 답답한 방 안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처럼, 혼란에 빠져 있던 노예들이 차츰 이성을 되찾아 갔다.
노예들이 카라스의 지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상자를 옮기고, 우물에서 물을 떠오고, 공장 내에 비치된 펌프식 소화전에 호스를 연결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쇳물이 더 이상 흘러서 퍼지지 못하도록 모래 자루를 쌓아 방벽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화재는 너무나 막강한 기세로 맹위를 떨쳤다. 그 앞에서 대항하는 카라스와 노예들의 분투가 초라해 보일 정도로.
진화 작업이 곳곳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다. 가장 앞쪽 열에서 용감하게 물을 뿌리던 노예들 사이에 사망자가 속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물러설 수도 없었다. 어느새 공장 내부는 전쟁터와 비슷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아아악!”
쇳물에 물을 뿌리다가 솟아난 증기를 노예 하나가 고스란히 덮어썼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다가 숨이 끊어졌다.
“크윽!”
카라스가 그 모습을 보고 치를 떨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불길은 잡히기는커녕, 더욱 커지기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정말로 카라스의 분노를 긁고 있는 것은 불길도, 죽어 가는 노예들도 아닌 공장의 가드들이었다.
그의 시선이 다른 한쪽을 향했다.
동시에 그의 눈빛이 더할 수 없을 살기를 뿜었다.
‘저 개자식들!’
그가 바라보는 곳에 가드들이 있었다. 그들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화재와 노예들의 분투를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는 노예들의 위에 군림해서 온갖 특혜란 특혜는 다 받아 왔으면서, 그렇게 노예들을 감시한답시고 으스대고 다녔으면서, 정작 이런 재난이 닥치자 겁을 먹은 나머지 한발 물러서서 희생자들의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저 가드들에게는 고성능의 메탈슈트도 있었다. 비록 모든 가드가 다 메탈슈트를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카라스가 알기로는 약 50대 정도가 있었다.
만약 50대의 고성능 메탈슈트가 적극적으로 나서 준다면 상황은 180도 달라지리라. 어쩌면 별 희생자 없이 화재를 진압할 수 있을지도.
즉, 쏟아져 내리는 불붙은 자재 더미에 파묻혀 불타 죽는 일을, 방벽을 넘어 들어온 쇳물에 다리가 녹아 경련하다 숨이 끊어지는 일을, 증기에 갇혀 온몸이 부풀고 녹아내리며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일을 애먼 노예들이 겪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후욱! 후우!”
분노를 삭이고자 숨을 거칠게 쉬었다. 카라스는 잠시 지휘를 멈추고 가드들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심상찮은 낌새를 보고서 가드 하나가 경계하며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무슨 일이냐?”
“모르고 묻는 겁니까?”
“…….”
“저들을 도우십시오.”
하지만 가드들은 하나같이 침묵하며 그를 외면하였다. 카라스의 형형한 기세 앞에서 눈길을 피하며.
문득, 카라스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 비웃음은 정면으로 가드들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 겁먹은 건가, 나으리들?”
“……뭐?”
“아닌 척하지 마. 겁먹었잖아. 그러니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겠지. 빌어먹을 똥개들처럼.”
“뭐라고, 이놈이!”
발끈한 가드 중의 한 사람, 페르히라는 자가 오른손을 허리의 검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카라스의 동작이 반 템포 더 빨랐다.
덥석!
카라스의 강건한 손아귀가 페르히의 오른 손목을 쥐었다. 페르히는 검 손잡이까지는 쥐었지만 검을 뽑지는 못했다. 카라스의 막강한 완력에 짓눌린 것이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뭐 하는 짓이냐!”
채채챙! 스릉!
주위에 있던 다른 가드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카라스의 목을 겨누었다. 하지만 카라스는 여전히 비웃음으로 그들을 대했다.
“하. 내가 죽으면, 이제 네놈들이 노예들을 지휘해서 진화 작업을 해야 할걸?”
그 한마디에 살벌해졌던 가드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카라스는 잡고 있던 페르히의 손목을 놓아 주며 뒤로 물러섰다.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지만 기묘하게 빠른 발놀림, 마룡신형보였다. 덕분에 그의 목을 겨누고 있던 가드들의 검이 모두 표적을 놓쳐 버렸다.
“그럼 계속 여기에 서서 구경이나 하라고. 비루하게 겁먹은 개새끼들.”
“……!”
카라스는 그 말을 남기고 그대로 돌아섰다. 가드들은 울컥하여 움찔하면서도 차마 카라스의 뒤를 치지는 못했다.
노예들과 가드들, 두 그룹의 묘한 분위기 속에서 진화 작업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