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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저 드래곤 1권(13화)
4장 작열하는 불길 속에서(4)
인근 레티아 영지, 영주 관저의 정원.
푸른 하늘에 화사한 태양 아래 정원의 녹색 잔디가 싱그러운 향취를 발하고 있다.
그 아름다운 정원 한가운데에는 순백의 새하얀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였는데, 그곳에는 두 사람의 귀족이 서로를 마주한 채 오찬을 즐기고 있다.
바로 레티아 남작과 트리스탄 자작이었다.
트리스탄 자작이 미소를 지으며 와인 잔을 기울였다. 햇살은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을 막아 주는 깔끔한 차양 아래에 부는 바람은 시원했다. 실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하루, 천국이 따로 없다.
두 귀족은 담화를 나누었다.
부드러운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곧 그 분위기는 깨어졌다.
“헉! 허억! 큰일이 났습니다!”
기사 하나가 나는 듯 정원으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그 서슬에 레티아 남작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하지만 기사는 너무나 다급하여 일단 보고를 우선시했다. 기사가 바삐 입을 열었다.
“급보입니다. 트리스탄 자작령의 제4메탈슈트 생산기지에서 대규모의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또한 현재까지도 화재는 진화되지 않고 있으며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뭐?”
챙그랑.
트리스탄 자작의 손에서 떨어진 와인 잔이 박살났다. 자작은 더없이 창백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슈너드 남작과 부관 레이하트도 경악한 얼굴로 자작을 마주 봤다.
5분 후, 한 대의 호화로운 마차가 더없이 빠른 속도로 레티아 남작 영주 관저를 떠나갔다. 그 마차는 트리스탄 자작과 두 무인을 싣고서 메탈슈트 생산기지를 향해 질주했다.
* * *
화르륵!
불길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세는 예전만 못했다. 꼬박 반나절을 이어진 노예들의 분투 앞에 드디어 화재가 수그러들고 있었다.
카라스는 계속해서 노예들을 독려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안전한 곳에 있지 않았다. 스스로 직접 나서서 작업 중에 위험에 처한 노예들을 다수 구해 내었다. 그런 카라스의 용기에 고무된 노예들은 더욱더 적극적으로 진화 작업에 나섰다.
“쿨룩! 크으, 이런 니미럴! 물 더 가져와!”
제노 영감은 기침을 하고 욕을 우물거리면서도 양동이를 들어 올렸다. 그가 쏟아 낸 물이 아주 약간의 불길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다른 젊은 노예들이 영감을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호통을 치고 노익장을 과시하며 가장 앞 열에서 불을 끄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가 수십 년을 바쳐 온 공간이었다. 피와 땀과 눈물과 모든 고난이 생생하게 배어든 장소였다. 한편으로는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런 화마 속에서 허무하게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장소였다. 이 장소는 그가 한평생을 살아온 증거, 그 자체였기에.
때문인지 영감은 공장 내의 그 누구보다도 더욱 필사적으로 불을 끄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검댕이 가득 묻어 있었다. 주변에는 매연이 자욱했다. 순간적으로 매연에 둘러싸인 영감은 다른 노예들과 동떨어져 시야가 차단되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제노 영감은 바로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섰음을 한발 뒤늦게 알아챘다. 매연 속에서 차가운 빛이 번득였다.
“으음?”
깜짝 놀란 영감이 고개를 돌렸다.
영감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가드 페르히는 귀족가의 자제였다. 또한 전형적인 소인배이기도 했다. 자기 자신이 모든 일의 중심이 되어야 했으며, 매사에 다른 이들의 칭찬을 들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런 그가 누군가로부터 받는 모욕을 제대로 참을 리가 없다. 특히, 모욕을 준 당사자가 노예의 신분이라면 더더욱.
‘개자식!’
페르히는 눈을 희번득거리며 카라스를 떠올렸다.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방금 카라스에게 손목을 잡혀 검을 뽑지도 못했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검을 뽑지도 못했다는 것은 싸우기도 전에 제압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욕적이었다.
게다가 그 순간 저 비천한 노예 놈은 어떤 표정을 지었었나. 한쪽 입술을 말아 올리며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을 짓지 않았나.
그 일이 있은 직후 동료 가드들은 괜찮다고 위로를 건네어 왔었다. 하지만 속 좁은 페르히에게는 그 위로조차도 조롱으로 보였다.
그는 결심했다.
‘더는 이 치욕을 참을 수가 없다. 내 빛나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 비천한 놈을 갈가리 찢어야 해.’
그는 카라스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때 곁에 선 동료들이 수군수군 사담을 나누었다.
“일직 사관님이 몸을 사리려 나보네.”
“음? 왜 그러나?”
“글쎄, 슈너드 사령관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일체 진화 작업에 나서지 말라고 대기 명령을 내렸다네.”
“허어, 그래?”
“그렇다네. 독단으로 병력을 움직였다가 자칫 사상자가 발생하거나 메탈슈트를 잃어 보게나. 후일 사령관께 책임 추궁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겠지, 뭐.”
“허허, 덕분에 우리는 안전한 곳에서 불구경을 하고 말이지?”
“그게 정답이지. 흐흐. 저기, 저기 좀 보게.”
가드 하나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가장 앞 열에서 용감하게 불을 끄고 있는 초로의 노인이 있었다. 다른 가드가 영감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늙은이 주제에 애쓰네.”
“그러게 말이야.”
이후로도 그 두 가드는 끝없는 잡담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더 이상 페르히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금 가드가 가리킨 노인.
어느새 페르히는 그 노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 늙다리…….’
가만히 살피고 있자니 기억이 났다.
이름은 제노. 이곳 노예들 중의 최고 연장자. 또한, 씹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카라스라는 놈의 심복.
씨이익.
페르히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기어갔다.
뱀이 그린 듯한 웃음이었다.
그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연기를 헤치고, 뜨거운 열기를 헤치고 걸어 나갔다.
제노 영감이 가까워졌다.
영감은 아직도 페르히의 접근을 모르고 있었다.
페르히의 손이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스르릉.
검을 뽑는 소리는 주변의 소음에 묻혔다.
차가운 빛이 번득였다.
“으음?”
제노 영감이 고개를 돌렸다.
바로 다음 순간, 페르히의 검이 영감의 복부를 깊숙이 관통하였다. 뜨거운 선혈이 더욱 뜨거운 불길 사이로 후두둑 떨어졌다.
어느새 불길이 대부분 잡혔다. 이제부터는 혹시 남았을지도 모를 불씨를 살펴 가며 남은 불을 끄면 큰 탈이 없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카라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철 같은 체력을 자랑하는 그도 지금은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끔찍한 재난에 맞서 수백에 달하는 노예들을 혼자서 통솔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손을 떼어도 괜찮겠지.
카라스는 다른 믿을 만한 노예들 몇몇을 불러 남은 처리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일선에서 빠져 다른 곳으로 갔다. 바로 제노 영감이 진두지휘를 하던 곳을 향해.
카라스가 한사코 만류했음에도 제노 영감은 고집을 부리며 진두지휘에 나섰었다. 평소 같았으면 카라스가 두 번 세 번 권하면 순순히 따르던 영감이었지만 오늘만은 달랐던 것이다.
‘하여간 무서운 것도 없어. 고집만 가득한 주제에 노망까지 든 미친 영감쟁이.’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나 퍼부으면서도 영감을 생각하는 카라스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카라스의 걸음이 멈추었다.
“영감…….”
그가 바라보는 곳.
그곳엔 제노 영감이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마치 잠든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제노 영감?”
카라스가 발을 내디뎠다.
그러다가 흠칫 놀랐다.
바닥이 축축했다.
아래를 보았다.
붉다.
제노 영감이 앉아 있는 곳에서부터 그가 선 곳까지, 바닥에는 온통 피가 흥건하였다.
그 피는 제노 영감의 배에 뚫린 커다란 구멍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마치, 온몸의 피가 그 구멍으로 죄다 빠져나온 것처럼 보였다.
카라스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제노 영감의 상세를 살폈다.
영감의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언젠가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아니, 누구라도 좋으니 이곳을 나가서 가족에게 소식 한 자락이나마 전해 주었으면 한다고 되뇌던 영감.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그 모습이 더없이 서럽게 느껴졌다.
카라스는 눈썹을 움찔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영감이 걸고 있던 투박한 나무 목걸이를 벗겨 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놀랍게도, 흔들리는가 싶었던 그의 감정은 그 짧은 사이에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대체 어떻게…….’
영감의 복부에 난 상처를 냉정하게 분석했다.
검상이었다.
모양과 흔적으로 보건대 영감은 뒤돌아서다가 정면에서부터 검을 받았다. 상처의 위치나 길이와 각도, 상처 부위 피부 및 근육의 손상 상태, 검을 다시 뽑을 때 남은 흔적 등으로 보아 흉수는 검을 매우 능숙하게 다루는 자였다.
검.
이곳에서 복부를 관통할 길이의 잘 제련된 검을 지니며, 그것을 능숙하게 다루는 자는 오직 한 종류의 인간밖에 없다.
“가드…….”
카라스는 영감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편 어둡게 그늘진 구석에서 장검 한 자루가 세찬 기세로 찔러져 들어왔다. 함정을 파고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가드 페르히의 검이었다.
와드득.
돌발적으로 일어난 힘줄이 카라스의 팔뚝을 거세게 휘감았다. 다음 순간, 뒤로 돌아서는 그의 눈에서 막대한 살기가 폭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