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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저 드래곤 1권(17화)
5장 역천의 연공법(4)
신체에 일어난 이 난리의 와중에도 그 두 가지의 봉인은 여전히 꼿꼿하게 자리를 지키며 기세를 죽이지 않고 있었다.
불현 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카라스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동시에 그는 주화입마의 기운들을 몽땅 그 두 곳의 봉인이 있는 곳에 몰리게 하였다.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꽈과광―!
봉인 자체가 지니는 기운과 주화입마의 기운이 한꺼번에 충돌했다.
하지만 의외로 몸에 전해져 오는 충격은 생각보다 적었다. 금제의 낙인과 메탈슈트 봉인이 대부분의 데미지를 흡수하였기 때문이었다.
카라스의 눈빛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이거다.’
그는 아예 작심을 하였다.
날뛰는 주화입마의 기운을 모조리 두 봉인이 있는 곳으로 몰리게 유도했다. 그 결과 주화입마의 붕괴가 봉인이 있는 곳에서만 일어났다. 물론 그 충격도 대부분 봉인에만 타격을 입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키이이잉―!
팔뚝에 찍힌 금제의 낙인과 등에 있는 봉인이 환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주화입마의 기운에 의해 압박을 받게 되자 저절로 반발이 일어난 것이었다.
‘크……윽……!’
갑작스레 두통이 일었다.
관조가 깨어졌다.
그러자 삽시간에 지옥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이를 깨물었다.
빠드득.
카라스의 어금니 하나가 깨어졌다.
왜 갑자기 두통이 일어난 것일까.
곧 그는 깨달았다.
‘상단전이…….’
급속한 기운의 유입으로 인해 부서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단전과 하단전도 마침내 함께 붕괴하고 있었다.
주화입마가 더욱 가속되었다.
그와 함께 두 개의 봉인으로 치닫는 주화입마의 기운도 더욱 증대되었다.
충돌로 일어나는 단전의 붕괴가 더욱 커졌다.
주화입마가 더더욱 가속되었다.
봉인과 주화입마의 기운이 더더욱 거칠게 충돌했다.
이것은 일종의 치킨레이스와 마찬가지의 대결이었다.
어느새 카라스의 삼단전과 두 개의 봉인, 그중에 어느 쪽이 먼저 무너지느냐의 싸움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피핏!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피가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는 버텼다.
달리 다른 수가 없었다.
그저 버티고 또 버텼다.
빠드득, 빠직!
이빨이 차례차례 부서졌다. 너무나 세게 다물어 턱뼈에조차 금이 갔다.
그래도 그는 버텼다.
키이이…….
언제까지나 굳건히 대항할 것만 같던 두 봉인,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던 하얀 광채가 순간적으로 희미해졌다.
카라스는 억지로 어깨를 폈다.
주먹을 쥐었다.
허리를 세웠다.
진기를 유도했다.
이미 격렬한 전투를 치른 그의 세 단전은 이제 미약한 진기만을 보내오고 있었다. 실낱같은 기운 때문인지 일어나는 충돌도 이전보다 미미하였다.
하지만 그 실낱같은 진기는 이전보다 훨씬 정제된, 선천지기에 가까운 순수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순수한 성질 앞에 두 봉인의 저항이 무너져 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카라스의 떨리던 몸이 차츰 진정되기 시작했다. 대신 그의 전신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온몸의 관절 중에 부러지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었고, 근육은 모조리 파열되어 내출혈이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내부 장기도 대부분 심대한 타격을 입은 상태. 곧바로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카라스의 몸만 만신창이가 된 것은 아니었다.
키이이……!
화르륵!
별안간 카라스의 팔뚝과 등에서 맹렬한 불꽃이 일었다. 새파란 귀화(鬼火)였다. 그 불꽃 속에서 지금껏 카라스를 얽매어 오던 봉인이 불타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사라졌다.
씻은 듯이 말끔히.
“크윽……!”
동시에 카라스가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앞으로 쓰러졌다. 가속되었던 그의 시간이 다시금 주위 환경과 똑같이 느려졌다.
고개가 푹 숙여졌다.
눈이 감겼다.
의식이 흐려졌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더럽고 차가운 물방울이 천장에서 떨어져 카라스의 목덜미를 적셨다.
움찔!
선득한 느낌에 그의 몸이 반사적으로 떨었다.
그 미약한 움직임이 그의 심장, 중단전을 다시금 뛰게 만들었다. 하단전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상단전을 일깨우도록 자극했다.
그의 상중하 삼단전은 손상은 입었으되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다.
원래 주화입마를 거치며 박살이 났어야 정상이건만, 카라스가 의식적으로 주화입마의 기운을 몽땅 금제의 낙인과 봉인으로 몰아넣는 바람에 신체가 받은 타격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카라스에게 행운으로 작용했다.
이내 세 단전 사이에 미약한 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 상단전과 나머지 두 단전의 기운은 충돌을 일으키지 않게 되었다.
원래 카라스가 지니고 있던 천마신공의 내공.
그리고 상단전을 통해 유입된 순수한 성질의 기운.
두 기운이 마침내 반발 없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면서 미묘한 화학 반응처럼 서로가 서로를 독려하며 새로운 성질의 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새로운 기운이 카라스가 어린 시절부터 부지런히 닦아 두었던 전신의 경락으로 자연스럽게 흘렀다.
기운은 처음에는 너무나도 미약하여 작고 초라한 시냇물과도 같았다.
그러나 곧 사방에서 물줄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바로 지난 4년간 카라스가 미친 듯이 외공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전신 세포 속에 축적되었던, 작디작은 내공의 덩어리들이었다.
세포 하나하나에 고여 있던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들었다. 시냇물은 어느새 개천이 되고, 굽이굽이 흘러 커다란 물결이 되는가 싶더니 도도한 강물이 되었다. 이내 강물은 제방을 허물고 대지를 휩쓸 듯 내달려 바다로 섞여들었다.
장자의 소요유를 살피면, 북쪽에는 명해(溟海)라는 큰 바다가 있는데, 이곳을 천지(天地)라 하였다. 천지에는 곤(鯤)이라는 커다란 고기가 산다. 곤의 크기는 수천 리를 넘어 헤아릴 길이 없다.
한 잔의 물을 마루에 엎지르면 그 위에 지푸라기는 뜨지만 잔을 놓으면 뜨지 않는다. 잔을 떠받칠 물이 깊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거대한 곤을 띄울 바다는 깊어야 한다. 그 바다, 내 몸속에 깊고도 깊은 북쪽의 명해를 키우는 절세의 심법이 바로 마교에서 실전되었던 북명신공의 정체이다.
후우…….
후우욱…….
의식을 잃은 카라스가 깊은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몸속을 휘몰아치는 도도한 진기의 흐름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공을 운기하였다.
신공이 운기되자 머리 꼭대기의 백회혈과 아울러 발바닥 가장 아래쪽의 용천혈(湧泉穴)이 개방되었다. 백회를 통해서는 하늘의 기운이, 용천을 통해서는 땅의 기운이 유입되었다. 그 두 가지 기운이 단전에 담기고, 그 단전에 카라스의 선천지기가 깃들었다.
천(天), 지(地), 인(人).
하늘과 땅과 사람이 만났다.
그것은 소우주의 또 다른 각성, 개벽이었다.
곧, 천하 사방에서 모든 강물이 흘러들어 북명의 바다를 이루었다. 그처럼, 주변에 있던 자연의 기운들이 카라스를 향해 급속도로 흘러들기 시작하였다. 이내 그의 몸속에선 깊고도 거대한 바다가 격랑과 함께 용틀임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무심한 간수는 카라스가 안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지 전혀 눈치채질 못했다. 그저 귀찮음을 무릅쓰고 하루에 두 번, 철문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죽 그릇을 밀어 넣는 데에만 전념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카라스의 몸은 변해 갔다.
부러졌던 뼈가 제자리를 찾아 맞춰졌고, 끊어졌던 근섬유가 이어졌다. 막대한 출혈로 손실되었던 혈액이 재생된 골수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그러는 사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 밤이 찾아왔다. 이 밤은 카라스에 대한 공개 처형을 몇 시간 앞둔 밤이기도 했다.
바로 그 순간 카라스가 눈을 떴다.
투두둑.
그가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양팔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끊어졌다.
“…….”
그는 잠시 멍한 기색으로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힘이 넘치고 있었다.
이내 그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를 깨달았다.
원래는 2,000분의 1의 도박에서 패배하여 죽었어야 했던 그였다.
하지만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주화입마의 기운을 모조리 봉인으로 쏟아 부었고, 그 덕에 그 자신의 몸 대신 봉인이 박살 났다.
그렇게 정신을 잃은 틈에 삼단전이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그로선 상상도 해 보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꽈드드득.
주먹을 쥐었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감각일까.
당장이라도 쏟아져 나올 듯한 내공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 힘은 깊고도 정심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 자신의 단전에서 일고 있는 격랑은 단순한 천마신공의 것이 아니었다. 그 옛날 문헌에서만 보았던, 역천의 연공법과 함께 실전되었다던 북명신공이 자신의 몸에서 부활하였음을 그는 직감했다. 그의 입술이 휘우듬하게 휘어지며 한 줄기 미소를 그렸다.
카라스는 철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철문을 두드렸다.
캉캉. 캉캉.
“아, 쓰벌, 언놈의 새끼여?”
막 달콤한 졸음에 빠져들던 간수장 한스는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그러자니 자연히 입에서 걸쭉한 욕이 튀어나왔다.
“이런 시펄 놈의 죄수가 감히 이 어르신을 깨워? 개새끼, 영원히 잠들게 만들어 주마, 퉤엣!”
그는 단단히 벼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곤봉을 꼬나 쥐었다. 이걸로 소란을 피운 놈의 대갈통을 박살 내리라 다짐하며.
캉캉. 캉캉.
그러는 동안에도 예의 그 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게 간수장 한스의 성질을 더욱 긁었다. 한스는 씩씩거리며 성큼성큼 걸어 소리가 나는 철문 앞에 다가섰다.
한스는 이미 너무나 흥분하여 죄수가 안쪽에서 문을 두드리려면 쇠사슬을 풀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그는 철문에 난 작은 창을 와락 열어젖히며 안쪽을 향해 분노에 가득 찬 고함을 질렀다.
“야! 이 개새……!”
별안간, 그의 입이 절로 덜컥 닫혔다.
어깨가 굳고 식은땀이 와락 흘렀다.
그가 감옥 속 어둠을 통해 본 것은 소름 끼치도록 시퍼렇게 빛나는 한 쌍의 안광이었다.
마치, 고대의 마왕이 현세에 강림하기라도 한 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