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팬저 드래곤 1권(19화)
6장 심판의 날(2)
알람 마법 등으로 주변이 온통 소란함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발소리는 자작의 귀에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마치,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그 발소리가 점점 집무실을 향해 가까워졌다.
검을 쥔 자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자작의 팔뚝이 움찔 떨렸다.
카라스가 부서진 문의 잔해를 밟으며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네, 네놈은?”
눈앞에 나타난 전혀 의외의 인물에 자작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하지만 카라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을 한일자로 굳힌 채 성큼성큼 걸어 자작에게 다가왔다.
“이익!”
압박감에 짓눌린 자작이 검을 찔렀다.
카라스가 코웃음을 치며 식지를 튕겼다.
놀랍게도 검이 중간에서 뚝 부러졌다.
부러진 검이 하필이면 옆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주저앉아 있던 알프레드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크허……!”
단번에 심장을 관통당한 알프레드가 처량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사실은 검이 튕겨 날아가는 방향까지 계산한 카라스의 의도대로 일어난 일이었다.
때문에 카라스는 누군지도 모를 사내의 죽음에 별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공포에 질린 트리스탄 자작도 신경 쓸 여력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알프레드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대 은행가의 후계자 치고는 허무한 죽음이었다.
저벅저벅.
카라스는 계속 자작을 향해 걸었다.
트리스탄 자작은 연거푸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작의 등에 벽이 닿았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꿀꺽.
자작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목에서 피리 떨리듯 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와, 왔느냐, 아들?”
카라스는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정작 이런 상황이 오자 친근한 어조로 아들이라고 부른다. 어찌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말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묻고 싶은 것? 오, 오냐, 어서 말해 보려무나.”
“왜 내 제안을 거부했었지?”
“제, 제안?”
“그래.”
“어떤…….”
자작의 표정이 흐려졌다. 기억을 더듬어는 보는데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카라스가 말했다.
“기억조차 못하는군.”
“…….”
그는 벙어리가 된 자작을 향해 냉엄하게 말했다.
“3구역의 노예들에게 의료 시설을 만들어 줄 것. 기본적인 식사의 질을 높일 것. 병이나 부상으로 쇠약해진 자들에게 적절한 휴식을 주어 노동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부양해 줄 것. 이 세 가지였다.”
“아아, 그건…….”
변명하려는 자작.
카라스가 짓씹듯 내뱉었다.
“네놈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만 했었어도 지난번의 참사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을 테지.”
“…….”
사실 사고가 일어났던 당시, 노예들을 지휘하여 사고를 수습하던 도중이었다. 한 노예가 흙빛이 된 얼굴로 카라스를 찾아왔었다. 그가 바로 용광로를 잘못 조작하여 사고를 일으킨 원인 제공자였다.
카라스는 그의 입을 통해 사고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됐는지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그 노예는 아픈 몸을 이끌고 억지로 작업을 위해 끌려 나왔었다. 온전히 서 있는 것도 힘들 정도였으니 어려운 기기 조작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만약 그에게 하루의 휴식이라도 주어졌다면, 그래서 사고가 났던 그날 그 사내 대신에 다른 노예가 일을 맡아 빈자리를 메워 주었더라면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카라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덥석.
카라스의 강건한 손아귀가 자작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만일 손가락에 힘을 조금만 더 준다면 자작의 목은 단숨에 부러지리라.
자작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하였다. 그러면서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찾았다.
“그, 그건…… 그건 허가가 제대로…….”
“허가?”
“그, 그렇다. 노예가 뭔가. 사람이 아니지 않나. 사람이 있고 그 아래에 가축이 있고 그 맨 밑에 있는 것이 노예다. 그런데 왜 가축만도 못한 자들을 위해 그런 것을 만들어야 하나. 위에 청원해도 허가가 떨어질 리가 없잖은가.”
“…….”
카라스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골수까지 이런 생각이 배어든 인간이다. 혹시 이 세계의 귀족들은 전부 이 모양일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일었다.
그때 자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 아들. 우리 이건 놓고 이야기를 하면 안…… 될까?”
“허헛.”
끝까지 이 모양이다.
내친김에 카라스가 물었다.
“어머니에겐 왜 그랬지?”
사실 카라스에게 있어 모친이라는 존재는 태어날 계기를 준 사람에 불과했다. 태어나자마자 그녀가 죽는 바람에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으며, 혈육의 정을 느낄 틈도 없었다. 때문에 어머니가 없다고 하여 아쉬움을 느낀 적도 달리 없었다.
하지만 카라스는 이것만은 알고 있었다.
출산의 그 순간에 자신의 어머니, 로제트가 내린 결단으로 인해 자신이 생존하였음을.
만약 그녀가 스스로의 배를 가르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면 무력한 갓난아기였던 자신은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카라스는 그녀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만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자작에게 어머니의 일을 물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물을 기회가 없을 것임을 잘 알았기에.
“네, 네 어미 말이냐?”
트리스탄 자작이 떠듬떠듬 반문했다.
카라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으로.
자작은 한참 동안이나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궁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네 어머니 아르미나는 참으로 어여쁘고도 성정이 어진 여인이었다. 나도 네 어미가 이 영지를 훌쩍 떠난 것이 참으로 아쉽고도 슬프구나. 그동안 내색을 않고 있어서 그랬지, 이 아비도 항상 그녀의 일이 마음에 걸려 잠을 설치고 음식을 못 넘긴 적이 많았단다. 하지만 내 꼭 약속하마. 내 언젠가 이 목숨이 다하기 전에 아르미나를 반드시 찾아내마. 그래서 그녀가 돌아오게 되면 너와 그녀에게 자유민, 아니, 준남작의 지위를 내리겠노라. 어떠니?”
“…….”
카라스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르미나라니. 듣도 보도 못한 여자다. 트리스탄 자작은 대체 얼마나 많은 시녀들과 노예들에게 씨를 뿌렸던 것일까.
그의 어머니 로제트도 분명 그 수많은 여인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카라스 또한 그렇게 태어난 수십 명의 버려진 아이들 중의 하나였을 터.
카라스가 그렇게 가만히 있자 그걸 감동받은 줄로 알았는지 자작이 또 떠들었다.
“내 꼭 약속하마. 곧 인근의 모든 영지에 그녀를 찾을 공문을 보내도록 말이다. 그러면 조만간 네 어미의 행적을 찾을 수도 있을 테니 넌 이 아비만 믿거라. 어쨌건, 내 늘그막에 너같이 든든한 아들을 두어 행복한 여생을 보낼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흐뭇하기만 하구나. 그렇지 않니?”
카라스가 대답했다.
“내 어머니의 성함은 노예 로제트다. 다른 영지로 팔려간 시녀 아르미나가 아니라.”
그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얼음이 뚝뚝 떨어질 듯 냉랭하기만 하였다. 자작의 어색한 미소가 완전히 굳어 버렸다.
“그, 그건…….”
와지직!
자작의 양쪽 허벅다리가 단박에 부러졌다.
“으…… 끄아아악!”
“시끄러워.”
피피핏.
카라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작의 혈도를 제압해 버렸다. 덕분에 자작은 두 다리가 부러진 고통에도 불구하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그런 자작을 어깨에 둘러메었다.
아직 이 공장에 대한 용무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받아야 할 빚이 산더미같이 남아 있다.
카라스의 입가에 난폭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제노 영감의 목숨 값도 포함되어 있고 말이지.”
곧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알프레드와 사집관 하렌의 시체만 남은 집무실은 괴괴한 정적에 휩싸였다.
* * *
와아아아!
소란이 일었다.
작업 시간이 아님에도 메탈슈트 공장에는 때아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흥분한 노예들이 곳곳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
오랫동안 억눌러진 생활, 그로 인해 마음속에 내려앉은 두터운 앙금은 노예들로 하여금 폭도로 돌변하도록 만들었다.
공장 전체에 울리는 시끄러운 경보 소리를 배경으로 1구역의 마법사들이 몸을 피신했다. 그들은 코어 제작을 위한 마법만을 집중적으로 익히고 단련한 특수 마법사들이었기에 전투 상황에서는 무력하기만 했다. 2구역의 기술자들도 그런 마법사들을 따라 안전구역으로 바삐 이동했다.
곧 모든 가드들이 총출동하였다.
“막아! 우선 주동자를 위주로 처리해!”
하지만 예상과 달리 폭동은 쉽게 진압되지 않았다.
3구역에서 관리하는 노예들의 머릿수만 1,500명에 이른다. 성난 천오백의 폭도들에 수백의 죄수들을 이백 명도 되지 않는 가드들이 메탈슈트 없이 완전히 통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검으로 베고 윽박질러도 노예들은 겁먹기는커녕 더욱 발광하기만 하였다. 배수의 진이라고 하였던가. 물러설 곳이 없어진 자는 죽을힘을 다해 저항하는 법이 아닌가.
“쯧쯧!”
허둥거리는 수하들을 바라보던 슈너드 남작이 혀를 찼다.
곁에 있던 부관 레이하트는 상관의 심기가 불편함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그가 하급 지휘자들을 모아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새로운 지시가 하달되자마자 가드들의 행동 방침이 바뀌었다.
키이이잉!
메탈슈트를 지닌 가드들이 재빨리 슈트를 소환하여 착용했다. 완전한 강경진압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었다.
그러자 전세가 확 바뀌었다.
겁도 없이 사방에서 날뛰던 폭도들은 순식간에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곳곳에서 노예들의 구슬픈 비명과 휘날리는 핏방울이 불길한 변주곡의 악보를 그려 갔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가드의 메탈슈트 하나가 호쾌하게 박살 나 버렸다. 허리 위쪽이 완전히 날아갔고, 그 와중에 코어가 폭발하여 가루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모두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폭발로 인한 매연이 자욱하게 깔렸다.
그 속에서 불길한 그림자가 언뜻 비쳤다.
주변에 섰던 가드의 메탈슈트, 안타레스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자세를 낮추었다.
철커덩, 철컥.
“요즘은 가드들이 맨몸의 노예들을 데리고 전투 훈련을 하나? 메탈슈트는 메탈슈트와 놀아야 격이 맞겠지. 그렇지 않은가?”
매연이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작고 왜소한 메탈슈트, 바로 카라스의 카밀카사였다. 그런 카밀카사의 한쪽 손에는 사람 하나가 잡혀 덜렁거리고 있었다.
카밀카사에게 덤벼들려다 그 사람을 알아본 가드 하나가 중얼거렸다.
“자작님…….”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적에게 영주가 사로잡혀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가드들은 감히 카밀카사를 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기만 하였다. 같은 이유로 그들의 지휘관인 슈너드 남작도 이만 갈았다.
카라스가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오해는 말도록. 허접한 인질극이나 벌이려고 이놈을 데려온 것이 아니니까.”
카밀카사가 트리스탄 자작을 높이 들어 올렸다.
카라스의 냉엄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오늘이 아마 공개 처형이 있는 날이었겠지? 그래, 많이들 기다렸다. 그토록 고대하던 심판의 날이다.”
꽈지직―!
치켜 들렸던 자작의 몸이 맨바닥으로 거세게 내리꽂혔다. 마치 으깨진 토마토처럼, 자작은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피떡이 되어 죽었다.
카라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상관의 죽음에 가드들이 멍한 사이, 그의 카밀카사가 빛살처럼 돌격하여 몸을 날렸다.
콰차창!
카밀카사가 안타레스의 몸에 거칠게 부딪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전투중량 200킬로그램의 카밀카사와 부딪힌 2.5톤의 안타레스가 뒤로 다섯 걸음이나 비척비척 물러섰다. 게다가 외부 흉갑이 갈가리 찢겨 당장이라도 쪼개질 듯하였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제야 놀란 다른 안타레스들이 집단으로 대응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카라스는 포위망을 벗어난 뒤였다.
콰자자작!
포위망 밖에서 서 있던 안타레스의 머리가 날아갔다. 카밀카사가 놈의 머리를 밟고 도약한 것이었다.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4성으로 운용되는 천마신공을 업은 카밀카사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때문에 가드들의 안타레스는 허둥지둥하기만 하였다.
그러는 사이 카밀카사가 공장의 쇠사슬을 건너타고 위로 몸을 솟구쳤다.
25톤급 용광로가 있는 곳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부관 레이하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설마?”
그 설마가 맞았다.
콰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