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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저 드래곤 1권(21화)
6장 심판의 날(4)


메탈슈트의 코어와 착용자의 단전은 링크를 통해 강력한 연결을 유지한다. 그 연결은 단순한 상호 작용을 넘어서서 서로의 고유한 성질에까지 영향을 미치곤 한다.
때문에 착용자의 진기가 사악한 성질을 지니면 메탈슈트의 코어도 서서히 같은 성질로 변화한다. 카밀카사의 코어도 카라스의 북명신공에 영향을 받아 외부의 기운을 흡수하고자 하는 성질을 띠게 된 것이었다.
잠시 숙고한 카라스는 허락의 뜻을 표했다.
그 허락의 이면에는 과연 이 메탈슈트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도 배어 있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카밀카사가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콰지직!
엑자일의 흉부 장갑판이 박살 났다.
여린 속살을 헤치듯, 카밀카사의 손이 장갑판 안쪽의 금속 합금 주물을 파헤쳤다. 그러자 코어를 감싼 프로텍터가 드러났다.
카밀카사의 손이 코어 프로텍터를 찢어발겼다. 코어의 표면이 공기 중에 노출되었다. 그 표면에 가공 처리된 아이드테리움이 공기와 급속도로 산화 반응을 일으켜 폭발의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카밀카사의 손이 코어를 관통하였다.
“…….”
카라스는 숨을 죽이고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엑자일의 거체를 움직이던 코어에는 마법적인 처리를 거친 극도의 진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진기는 곧 카밀카사의 손을 통하여 이쪽의 코어로 전이되어 왔다. 그 힘의 파동이 링크를 통해 카라스의 단전을 욱신거리게 할 정도였다.
곧 엑자일의 코어는 단순한 돌멩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대로 카밀카사의 코어는 넘치는 힘을 원동력으로 자신을 스스로 개조하여 증폭률이 0.1카펠이나 상승하였다.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 크크크큭.
카라스의 머릿속으로 환희에 찬 카밀카사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카라스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무언의 동의로 해석한 카밀카사는 바삐 몸을 움직여 주변에 쓰러져 있던 다른 안타레스들을 해체하여 코어를 게걸스레 흡수했다. 그 덕에 카밀카사는 총 0.3의 증폭률 상승을 이루어 코어의 증폭률이 0.5카펠이 되었다.
하지만 카밀카사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이내 번득이는 눈으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다음 먹잇감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라스는 그것까지 허락할 만큼 여유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여기서 그만.”
― …….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카라스의 목소리에 진한 살기가 배어 나왔다. 메탈슈트이건 뭐건 거슬리면 말살하겠다는 의지가 깃들어 있는 한마디였다. 그 기세에 눌린 카밀카사가 가까스로 욕망을 억제하였다.
카라스는 카밀카사의 착용을 해제하였다.
문득, 그의 시선이 불타는 공장 곳곳에서 쫓고 쫓기는 가드와 노예들을 향해 던져졌다.
……노예들을 도울까?
피식.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머물렀다.
“죽고 사는 것이야 본인들의 문제지.”
그렇다.
카라스는 박애주의자가 아니었다. 잠시 마음이 흔들린 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오히려 철저한 개인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는 노예들을 도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만큼 해 주었으면 됐다.
그것이 카라스의 생각이었다.
이후에 살아남는 문제는 모두가 각자의 몫. 운이 없는 자는 가드의 손이나 화재에 의해 죽을 것이요, 요행이 따르는 자는 공장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며, 거기서 능력이 있는 자는 용병질을 하건 무엇을 하건 스스로 살아남을 것이다.
그는 노예들에게서 관심을 접었다.
다음 순간 그는 백귀야행의 경신법을 일으켜 땅을 박찼다. 그가 향하는 곳에는 공장을 빠져나가는 최단거리의 루트가 있었다.

* * *

“끄흐…… 으…….”
슈너드 남작은 입으로 연신 피를 울컥 울컥 뱉으며 몸을 뒤채었다.
패배다.
그것도 완벽한 패배다.
메탈슈트의 성능은 이쪽이 압도적으로 좋았다. 그럼에도 일방적이라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완벽하게 당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참패였다.
육신의 고통보다도 굴욕적인 패배감이 그의 가슴을 더욱 세게 짓눌렀다.
“크흐흐흐…… 건방진 노예 놈.”
남작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엑자일의 후면 사출구를 열었다. 착용 상태가 강제적으로 풀렸다. 그는 거의 기다시피 해서 슈트 밖을 향해 몸을 빼냈다.
그런 그의 몸은 근육이라곤 한 점도 없이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게다가 마치 70대 노인의 것처럼 급속한 노화를 겪기까지 하였다. 카밀카사가 엑자일의 코어를 흡수할 때, 그 코어와의 링크를 통해 몸의 진원지기를 크게 손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밖에서는 한가한 표정의 청년 하나가 남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하니 정말로 패배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반쯤 기어 나왔던 남작이 고개를 들었다.
공장에 일렁이는 광기의 불꽃 속에 한 사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그의 부관인 레이하트였다.
“오오, 레이하트. 마침 잘 왔네. 나 좀 꺼내어 주게나.”
“좋지요.”
레이하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남작의 팔을 잡아당겼다. 격통을 느낀 남작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남작의 몸이 기체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음에도 레이하트는 힘을 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남작은 레이하트에 의해 땅에 질질 끌려가게 되었다.
“대, 대체 왜 이러는가! 부, 부관?”
대경실색한 남작이 외쳤다.
그 외침에 레이하트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출렁이는 곱슬머리 기다란 금발 사이로 레이하트의 낭랑한 음성이 흘렀다.
“부관? 누가? 누구의?”
“…….”
레이하트의 입가가 휘우듬 휘어졌다.
“설마하니 이 몸을 당신의 부관이라고만 여겼던 것이오? 힘을 쓸 줄은 알았지만 머리를 쓸 줄은 몰랐군. 의심이라는 것을 할 줄 몰랐다니 말이야.”
“네, 네놈, 그게 무슨 말이냐.”
“무슨 말이냐고?”
레이하트가 돌아섰다. 어느 순간, 그의 파란 눈동자에 기묘한 광채가 스쳤다.
키이이이잉―!
레이하트의 뒤에서 생소한 자줏빛 메탈슈트 한 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슈너드 남작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그가 알기로 레이하트는 메탈슈트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가드들에 대한 행정 처리나 보급 같은 잡다한 업무를 맡기기 위해 데리고 있는 수하였으니까. 그러니까 무력보다는 행정 능력을 중시하여 두고 있던 수하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메탈슈트를 소환하다니?
남작은 경악한 가운데에도 레이하트가 불러낸 메탈슈트를 관찰했다. 그로선 직접 본 적이 없는 생소한 메탈슈트.
결코 공국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접 국가들의 전력을 분석한 책자에서 그림으로는 본 기억이 있다.
파티엔 공국과 적대하는 서부국가연합, 그중에서도 연합의 맹주국인 라바트. 그 라바트 근위 기사단의 제식 메탈슈트인…….
남작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이네리아.”
“용케도 알아보았군.”
“그럼…… 네놈은…….”
레이하트가 빙긋 웃었다.
“정식으로 인사하지. 라바트 근위기사단의 비공개 부단장, 레이하트 폰켈이라고 하오. 소관은 멍청한 당신이 착복에만 눈이 팔린 사이에 이 적국의 한가운데에서 당신네들의 메탈슈트에 대한 수많은 고급 정보를 빼낼 수가 있었지. 그 덕에 맡은 바 비밀 임무를 훌륭히 수행할 수 있었소. 비록 적이라고는 하나 그대에게 감사드리는 바요.”
“네놈이 처, 첩자……!”
“이건 그 감사의 표시외다.”
푸욱.
레이하트가 빼어 든 검이 남작의 심장을 관통했다. 남작이 발작적으로 검날을 움켜잡았다.
“끄르륵…….”
유언이나 단발마의 비명 대신 뒤끓는 피거품이 남작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왔다. 곧 남작은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끊어졌다.
레이하트는 검에 묻은 피를 여유 있게 닦으며 공장을 돌아보았다.
자줏빛 메탈슈트가 그의 몸을 감쌌다. 자신의 하이네리아급 메탈슈트인 리온켈을 착용한 그는 공장 곳곳에서 얼쩡거리던 가드의 나머지 안타레스들을 차례차례 차분하게 처리했다. 카라스에 결코 뒤지지 않는 귀신같은 칼솜씨였다.
결국 지휘관에다 메탈슈트까지 모조리 잃은 나머지 가드들은 대화재와 폭동 앞에서 서서히 무너졌다.
레이하트가 차갑게 웃었다.
“카라스라……. 흥미롭군.”
호승심이 잔뜩 배어든 중얼거림.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곧 레이하트의 모습도 공장에서 사라졌다.
그리하여 파티엔 공국의 제4메탈슈트 생산기지는 화재와 폭동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급보를 지닌 전령이 공국의 수도를 향해 내달렸다.
곧 공국 전체에 대규모의 수배령이 내려졌다.



7장 새로운 호적수(1)


바닥 전체가 대리석으로 마감이 되어 있다. 귀중품의 가치를 아는 자라면 눈이 돌아갈 만큼의 보물들이 한낱 장식물로 사용되는 곳.
그 호화로운 방의 중앙에 놓인 의자에는 노인 하나가 앉아 있었다.
이미 80대 후반의 구부정한 육체는 화려한 실내의 정경과 그리 어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인의 눈빛만은 형형하기 그지없어서 그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대번에 드러내 주었다.
칼레도 베크룩스.
그것이 노인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지니는 무게는 범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대륙의 상권과 경제를 주무르는 거대 기업 베크룩스 은행. 그 은행 기업의 총수이자 가문의 당주. 그것이 칼레도 베크룩스란 이름이 지니는 거대한 의미였다.
또한 소년 시절 무일푼의 노점상으로 시작하여 일세에 거대 기업을 일구어 낸 그는 상계에서 신화적인 존재로 대접받고 있기도 하였다.
그런 칼레도 앞에는 정복 차림에 외알 안경을 걸친 미모의 금발 여인이 서 있었다.
“보고 드립니다, 당주시여.”
“말하라.”
노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여인의 분홍빛 입술이 열렸다.
“둘째 공자의 사망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알프레드가?”
“예.”
칼레도의 주름진 입술이 실룩였다. 자식을 잃은 비통함을 느꼈음일까?
아니었다.
그가 지은 것은 웃음이었다.
자식을 잃은 아비로서는 비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 늙은 사내는 달랐다.
칼레도는 젊은 시절에는 누구보다 영민하였으나, 점점 늙어감에 따라서 성격이 괴팍하게 변하였다. 유능한 네 명의 아들들을 전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경쟁자로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점점 더 아들들을 경계하였다. 때로는 그 경계심이 지나쳐 아들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가장 영악하기로 소문난 둘째가 죽었다. 칼레도로서는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픈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경거망동을 억누르고는 앞에 선 여인, 자신의 전속 비서인 벨로나에게 물었다.
“어쩌다 그리 되었다던가?”
“당주께서도 일찍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바로 이틀 전에 파티엔 공국 메탈슈트 생산기지에서 사고가 일어났던 바, 그 현장에 둘째 공자께서 계셨던 것으로…….”
“아아, 그랬었지. 어쩐 바람으로 공국에 가느냐 물었더니 대답을 얼버무리더군. 그렇다면, 사인은? 단순한 사고사인가?”
비서 벨로나가 똑 부러지게 답했다.
“피살입니다.”
“피살…….”
“흉수는 이번에 공국에서 특급으로 지명수배를 받게 된 카라스라는 노예입니다. 사적으로 제조한 메탈슈트를 지니고 있으며, 그 무력의 수준이 일반 기사를 상회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메탈슈트 제작에 무예까지……. 정말 노예가 맞는가?”
“저도 그 부분이 의아합니다.”
“노예로 변장한 다른 국가의 첩자일 가능성은?”
“결코 배제할 수 없습니다.”
“흐음…….”
칼레도는 깍지를 끼며 생각을 정리했다.
“혼자서 특급 시설을 파괴하는 건 일개 노예가 벌일 짓이 아니다. 필시 타국의 첩자일 터. 그렇다면 가장 확률이 높은 곳은 공국과 적대하고 있는 서부국가연합일 테지. 혹시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네.”
벨로나는 재차 명확하게 대답하였다.
그 모습에 칼레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
그가 숨을 고르고는 명을 내렸다.
“공식적으로는 포고문을 발표해. 카라스라는 노예 놈은 이제 베크룩스 은행 기업의 공적이라고. 그리고 병력을 보내어 놈을 적당히 압박하도록. 일단 놈이 어디를 향해 튀어 오르는지 반응을 떠 보아야겠으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하명하십시오.”
“서부국가연합에 군수물자를 일부 풀어 주도록 하여라.”
그 명에 벨로나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표면적으로는 공국에 협조하며 뒤로 서부국가연합을 지원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역시 똑똑하구나. 만약 이번 일이 빌미가 되어 서부국가연합과 공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제국도 함께 움직이게 된다. 그러면 대륙은 제국의 천하가 되고 우리의 기업도 설 자리를 잃게 돼. 그것만은 막아야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예.”
벨로나가 나간 뒤 칼레도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 한숨의 의미는 칼레도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