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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저 드래곤 1권(22화)
7장 새로운 호적수(2)


트리스탄 자작령 인근, 한 그림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숲 속을 내달리고 있었다.
“훅! 후욱!”
카라스였다.
그는 낮에 트리스탄 자작을 죽이고, 슈너드 남작을 꺾고, 공장을 박살 냈다.
그 직후 영지를 유유히 빠져나온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나절을 내달렸다. 곧 추적이 붙을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메탈슈트 생산 공장은 어느 국가이건 최고의 특급 시설로 분류하는 곳이다. 그런 곳이 자신의 손에 의해 박살이 났다.
곧 공국의 모든 치안력이 동원되어 그를 추적하고 포위하게 될 것임이 자명했다. 그러기 전에 한 발짝이라도 더 움직여야 했다.
그는 앞으로의 길을 잠시 숙고했다.
공국의 동쪽에는 제국이 있다. 제국은 공국이 상국으로 모시는 곳이다. 갈 곳이 못 된다. 그렇다고 남쪽으로 가자니 그쪽은 바다가 가로막고 있다.
남은 곳은 서쪽 아니면 북쪽.
그중에서 그는 북쪽을 택했다.
북쪽에는 아무것도 없다. 국가도, 영지도 없다. 오로지 끝없이 펼쳐진 광야와 설산, 포악한 괴수와 야만인들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추격을 뿌리치고 잠시 숨을 죽이기엔 제격이다.
카라스는 북쪽을 향해 움직였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공국의 수배망과 추격대는 서쪽을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카라스가 도망갈 곳이 그쪽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카라스가 일찍이 분석했던 것과 대동소이했다.
게다가 공국의 수뇌부는 내심 카라스가 서부국가연합의 첩자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러니 서쪽의 수배망에 더욱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지사.
열흘이 흘렀다.
그사이 카라스는 별 어려움 없이 수배망을 뚫고 북쪽을 향할 수 있었다.
그때쯤 드디어 추격자가 뒤를 따라붙었다. 카라스는 이른 새벽 일어나 주린 배를 채우다가 감지한 살기로 그것을 눈치챘다.
“…….”
현상금 사냥꾼, 맨헌터(Man Hunter)들이었다.
그는 가만히 상대의 기척을 살폈다.
수는 여섯.
저들의 움직임으로 보아 풋내기는 결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다년간 함께 손발을 맞춘 베테랑들이리라.
피식.
돌연 카라스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그는 모포를 덮고 땅바닥에 누워 버렸다. 이내 그의 코 고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어떻게 하지?”
누군가가 속삭였다.
맨헌터 그룹의 리더는 진땀을 흘리면서도 사냥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사냥감이란 바로 태평하게 누워서 코까지 골며 자고 있는 카라스였다.
리더는 잠시 숙고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여기서 친다.”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각자 정해진 위치로 이동하였다. 그러자 자연히 다섯 명이 반원형으로 카라스를 포위하는 진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리더는 몰이사냥을 하듯 풀밭에 매복하여 카라스를 기다렸다.
다섯 명이 카라스를 향해 접근했다.
스르릉.
단도와 장검의 중간 길이쯤 되는 검이 뽑혀 나왔다. 재를 발라 비반사처리를 한 검이었다. 다섯 맨헌터들이 카라스가 있는 공터를 향해 더욱 접근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카라스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 코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하지만 주변의 새나 풀벌레들은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았다.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하건만, 긴장한 맨헌터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그들의 실수였다.
츠락!
어느 순간, 누워 있던 카라스로부터 한 줄기 섬광이 번득였다. 이미 그를 지척에 두고 검을 치켜 올리고 있던 5명의 맨헌터들이 일시에 동작을 멈추었다.
그제야 카라스가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그는 태연하게 모포를 접어 간이 배낭에 집어넣고, 옷차림을 주섬주섬 정비했다. 그러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겨 들고 걸음을 옮겼다.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는 듯한 유유자적한 태도였다.
그때까지 맨헌터들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푸확!
약속이나 한 것일까.
그제야 맨헌터들의 몸이 둘로 쪼개졌다. 그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절명하였다.
풀숲에 숨어 매복하고 있던 맨헌터 그룹의 리더는 대경실색하였다.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메탈슈트를 소환했다. 아니, 소환하려 하였다.
퍼엉!
“……큽!”
언제 다가온 것일까.
리더는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카라스의 일장을 받고서 내장이 온통 뭉개지며 죽었다.
그가 죽자 주인을 잃은 메탈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라스는 기다렸다는 듯 그 메탈슈트를 분해하였다. 분해에는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꼬박 소모되었다.
그는 쓸 만한 재료들을 분류한 뒤에 카밀카사를 소환했다. 카밀카사는 카라스가 들고 있는 메탈슈트의 코어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것은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카라스가 말했다.
“코어를 흡수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 무엇인가?
“외부 장갑판 개조.”
그 말과 함께 카라스의 식지 끝에서 극도의 열양진기가 치솟았다. 진기를 제대로 집중하면 능히 금속도 녹일 정도의 열기였다.
카밀카사는 약간의 저항감을 드러내긴 했지만 반항까지는 하지 않았다. 덕분에 카라스는 해체했던 메탈슈트의 장갑판 일부를 카밀카사에 부착하였다. 식지로 일으킨 열양진기로 용접봉을 대신하여.
덕분에 카밀카사의 외부 장갑이 크게 보강되어 예전보다 견고한 방어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전투중량이 250Kg으로 증가하였고, 0.5카펠이었던 증폭률의 영향을 받아 전투효율성은 2.0배로 맞추어졌다.
카라스는 다시 북쪽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카밀카사의 개조를 위해 시간을 너무 지체해서였을까. 또 다른 맨헌터들이 카라스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하였다.
맨헌터들은 그 직업의 특성상 같은 목표를 두고 여러 그룹, 혹은 개인과 개인이 경쟁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하나의 맨헌터가 사냥감에게 역습을 당해 죽는다 하여도 오히려 그 시체를 조사하여 더욱 추격망을 좁혀 오곤 한다.
게다가 공국이 카라스의 목에 내건 상금은 약 일천 골드로서, 실로 파격적인 액수라 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때문에 맨헌터들은 더욱 악착같이 그의 뒤를 추격해 왔다. 카라스로서는 이래저래 귀찮은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카라스는 사냥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포식자에 가까웠다.
그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어 맨헌터 그룹을 끌어들였고 그들을 죽여 금전과 식량을 역으로 약탈했다. 그리고 간혹 메탈슈트가 수중에 떨어지면 그것을 해체하여 카밀카사를 개조했으며 코어는 먹이로 주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카밀카사는 처음과는 사뭇 다른 외관을 가지게 되었다.
외부 장갑판은 말할 것도 없고, 기본 뼈대와 내부 부품도 일부 보강되거나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었다. 덕분에 전장은 기존의 2.3미터에서 2.7미터로 확장되었으며, 전투중량은 410Kg이 되었고, 코어는 0.6카펠의 증폭률을 지니게 되어 약 1.46의 전투효율성을 지니게 되었다. 잦은 개조를 거친 성과였다.
그동안 뒤를 추격하는 맨헌터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카라스에 의해 역으로 사냥을 당한 이들이 대다수였으며, 일부 준비가 부족했던 자들은 추운 기후에 의해 동사당하거나 야생 동물의 먹이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지막 맨헌터가 카라스의 손에 의해 목이 잘려 늑대들의 먹이가 되었다. 두 달에 걸친 오랜 추격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카라스는 거기서도 만족하지 않고 더욱 북쪽으로 올라갔다. 날씨가 한정 없이 추워졌다. 점점 사람 사는 마을이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나오는 마을도 집이 다섯 채가 되지 않는, 마을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공국 최북단의 리츠 남작령을 지나자 급기야 사람의 종적이 뚝 끊겼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발자국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사람들이 괴수라고 부르는 것들의 발자국이었다.
일 년 내내 눈이 내리는 곳.
너무나 추워 이 기후에 적응한 몇 가지 식물을 빼고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곳.
북방의 설산이 카라스를 맞이했다.
그는 설산의 한귀퉁이에서 작은 암굴을 발견했다. 아늑하진 않지만 적어도 바깥의 차가운 바람과 눈보라를 피할 수는 있는 곳이었다.
그는 암굴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만 밖으로 나가 땔감을 주워 오고 사냥을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날도 사냥을 나서던 카라스는 암굴 주변에 못 보던 발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괴수의 것이 아니었다. 설상신발을 신은 사람의 발자국이었다.
대체 누굴까.
카라스는 기감을 확장시켰지만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그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사냥을 나섰고, 커다란 엘크 한 마리를 잡아 암굴로 돌아왔다.
그는 암굴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우뚝.
카라스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는 어깨에 지고 있던 엘크를 내려놓았다. 쿠웅, 하는 소리가 울리며 육중한 엘크의 몸이 절반이나 눈 속에 파묻혔다.
그러자 암굴 앞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이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기다란 은빛 머리칼을 기묘한 형태로 밀은 머리 모양. 새파란 귀기가 감도는 눈동자. 파란 염료로 기하학적인 문신을 빼곡하게 새긴 얼굴과 상반신. 털가죽을 걸친 장대한 근육질 체구.
이곳 북방의 야만 종족, 체로키족의 전사였다.
전사가 걸걸한 목소리로 알아듣기 어려운 북방 사투리를 내뱉었다.
“이곳은 우리 부족의 조상들이 살아 숨 쉬는 땅이다. 너, 허락받지 아니하고 설산의 생령들을 사냥하는 자. 썩 이 땅을 떠나라.”
카라스의 눈빛이 냉랭하게 가라앉았다.
“싫다면?”
“죽음뿐.”
처척.
체로키족 전사가 등에서 기다란 병기를 꺼내 들었다. 특이하게도 얼음으로 만든 창이었다.
전사가 돌진했다.
“타하아!”
쉬릿!
얼음 창이 날카로운 기세로 쇄도했다. 하지만 창은 오늘 상대를 잘못 만났다.
콰지직!
얼음 창이 깨어졌다. 깨진 얼음 조각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찬란한 빛을 흩뿌렸다. 카라스의 정권이 그 빛줄기 사이를 가로질렀다.
꽈앙.
“컥!”
정권에 맞은 체로키족 전사가 뒤로 주루룩 밀려났다. 바닥의 눈에 두 줄의 자국이 길게 남았다. 넘어지지 않으려 버티는 바람에 발이 끌리면서 자국을 새긴 것이었다.
“쿨룩! 쿡! 후우욱!”
하지만 체로키족 전사는 피 한 모금을 뱉은 후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내상이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그 모습에 카라스는 적잖이 놀랐다. 천마신공 4성의 일격에 당하고도 죽지 않았다. 게다가 호흡 한 번으로 내상을 회복시키다니, 괴물 같은 치유력이다.
오랜만에 호적수를 만난 카라스가 낮게 웃었다. 천 초 지적의 적수, 그리고 눈으로 뒤덮인 설산.
기시감이 들었다. 그가 파군성으로 살았던 생의 마지막, 태산 꼭대기에서 북천검제 무곡성과 마주했던 때가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크큭큭.”
그 웃음과 함께 짙은 마기가 피어올랐다. 체로키족 전사도 그 기운을 느꼈는지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이내 둘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둘의 충돌에 설산이 몸을 뒤틀었다. 허연 눈이 튀어 오르고, 시퍼런 얼음이 사방으로 깨어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승부는 쉽사리 갈리지 않았다.
삼 일 밤낮이 흘렀다.
둘 모두가 지쳤다.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체로키족 전사가 쓰러졌다. 카라스에게 맞아서 쓰러진 것은 아니었다. 힘이 다해 탈진한 것이었다.
“후, 후욱!”
카라스 또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체로키족 전사 곁에 주저앉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둘의 긴 대결은 결국 이렇게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그때였다.
덥석.
쓰러졌던 체로키족 전사가 손을 뻗어 카라스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깜짝 놀란 카라스는 반격하려다가 멈칫했다. 전사가 조용히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웃음에서는 별다른 적대감이 내비치지 않았다.
체로키족 전사가 말했다.
“난, 우루무치. 부족의 수호전사다. 그대는?”
“카라스.”
“그대와 같이 용맹한 자는 내 생전에 처음이군.”
“네놈도 제법 훌륭하다.”
어느새 둘은 서로를 의지하여 일어섰다.
우루무치가 말했다.
“이대로는 너무나 아쉽다. 다음에도 다시 겨루고 싶다.”
제대로 나지 않은 승부에 미적지근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카라스가 답했다.
“동감이다. 이대로는 찝찝해.”
우루무치가 씨익 웃었다.
“카라스라고 했나. 그대가 머무르는 것을 허하도록 하지. 부족의 다른 이들이 연유를 묻는다면 내 이름으로 답하면 될 것이다.”
“그거 고맙군.”
둘 사이에 화목한 말들이 오갔다. 하지만 분위기까지 화목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둘의 눈동자는 이전보다 더한 불꽃을 튀키고 있었다.
이번엔 카라스가 먼저 말했다.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뜨는 자정이 어떤가?”
“좋다.”
둘은 함께 웃었다.
살벌한 투쟁심이 어린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