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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저 드래곤 1권(24화)
8장 마룡의 설산에서(2)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훈련이 석 달째로 접어든 하루, 카라스는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꼭대기에서 내려왔다. 그는 자신만이 아는 길을 이용해 거의 뛰어내리다시피 하여 한 시간 만에 해발 4,000미터 지점까지 내려왔다.
그는 평소처럼 설산 원숭이나 산양 무리의 흔적을 탐색했다. 곧 설산 원숭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린 자취가 보였다. 그는 살기를 갈무리하며 그 흔적을 추적했다. 그렇게 어느 바위 절벽의 귀퉁이를 돌아서 나온 순간이었다.
오싹!
카라스의 등으로 소름이 돋아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온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음을 짐작했다. 어이가 없게도 그 원인은 공포였다. 담대한 카라스의 마음을 공포로 질리게 만든 괴수가 바로 등 뒤에서 숨을 내뿜고 있는 것이었다.
크르르르…….
뜨거운 콧김이 카라스의 어깨를 간질였다.
꿀꺽.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쏜살같이 뒤로 돌아서며 수라혈수인을 내뻗었다.
퍼퍼펑!
장력이 등 뒤의 괴수에게 적중했다. 예기치 못한 공세에 직면한 괴수는 펄쩍 뛰어오르며 뒤로 물러났다. 카라스도 그 틈에 괴수와의 간격을 벌렸다. 그리고 아연함에 입을 벌렸다.
“이런…….”
그를 노려보고 있는 괴수는 설산비호였다. 그러나 평범한 비호가 아니었다. 놈은 다른 설산비호들을 한낱 평범한 고양이로 전락하게 만들 정도로 거대했다.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만 무려 10미터는 되어 보였다. 송곳니의 길이가 카라스의 몸통보다 길었으니 그 크기야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비호의 등에 돋아난 날개의 존재였다. 마치 박쥐의 피막처럼 만들어진 장대한 날개가 비호의 등에 돋아나 있었는데, 그것을 펴자 한쪽 날개의 폭만 무려 40미터, 두 날개를 합치자 그 넓이가 무려 80미터에 달했다.
크르르…….
거대한 설산비호가 눈에서 시퍼런 살기를 줄기줄기 내뻗었다. 카라스도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맞서서 살기를 뽑아내며 기세를 돋우었다.
아무리 괴수라 하여도 결국은 보통보다 더 흉포하고 힘이 센 짐승에 불과하다. 짐승의 습성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야생의 짐승은 인간의 반응에 민감하다. 인간이 당당히 어깨를 펴고 맞서면 공격에 앞서 짐승이 주춤거린다. 하지만 인간이 등을 돌리고 도망을 치는 순간, 짐승은 인간을 사냥감으로 인식해 버린다.
카라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더욱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비호는 달랐다.
크와아악!
거대한 앞발이 카라스를 덮쳐 왔다. 순간적인 도약. 물러서는 카라스의 바로 앞쪽으로 압도적인 돌풍이 스쳤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재빨리 비호의 등 뒤로 돌아 들어갔다. 뒷다리를 부술 속셈술 속셈 덩치가 큰 만큼 다리를 당하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카라스의 오판이었다.
샤아아악!
비호의 꼬리가 날아들었다. 놀랍게도 그 꼬리 끝에는 거대한 뱀의 대가리가 달려 있었다. 기겁하여 뒤로 몸을 젖히는 카라스의 가슴에서 피가 튀었다.
뱀 대가리를 움켜잡았다. 카라스의 몸체가 꼬리에 휘감겼다. 죄어 온다. 천근만근의 압력. 전신에 힘을 주었다. 콰지직, 파육음. 그리고 폭발음. 비호의 꼬리가 중간에서 끊어졌다.
비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더욱 발광했다. 뒷발에 채인 카라스가 얼음벽에 틀어박혔다. 발톱에 스쳤을 뿐인데 내장이 언뜻 보일 정도로 피부와 근육이 찢어졌다.
으드득.
카라스도 분노했다. 한낱 짐승 따위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 수치다. 부순다. 뼈까지 통째로 부순다.
콰아아앙!
카라스가 날았다. 도약의 반발력으로 수 미터의 얼음벽이 통째로 무너졌다. 비호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비틀리는 카라스의 신형. 기이한 각도로 경로를 바꾸어 비호의 앞발에 매달렸다. 발작적으로 앞발을 털어 내는 비호. 으드득. 섬뜩한 소리. 비호의 앞다리가 꺾였다. 펄쩍 뛴다. 아픔에 펄쩍 뛴다.
비호가 날아올랐다.
카라스는 비호의 앞다리에 매달렸다가 어깨를 통해 목덜미로 기어 올라갔다. 카라스는 한 손으로 비호의 털뭉치를 움켜잡고서 다른 손으로 그 목덜미와 등을 거세게 두들겼다.
그동안 얼음으로 뒤덮인 대지가 발치 아래로 쑥 잠겼다. 높이, 더 높이. 카라스가 전생에서 본 어떤 광고 문구처럼, 비호는 끝없이 상공으로 치솟기만 하였다.
공기가 급속도로 희박해졌다. 기온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이내 카투샤사의 익숙한 최고봉이 발 아래로 보였다. 둘은 저 높은 하늘을 베는 검의 꼭대기보다도 높이 상승하였다.
카라스가 뒤에서 주먹질을 하건 말건, 비호는 계속하여 상승했다. 곧 맹렬한 바람이 옆에서 불어왔다. 대류권의 최상층인 제트기류를 만난 것이었다.
카라스는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천마신공을 운기하고 있음에도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추위가 느껴졌다. 또한 산소 부족으로 이미 그의 입술은 새파란 색을 띠고 있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호의 상승이 멈추었다.
퍼어억!
“……!”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다였던 카라스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손아귀에 힘이 풀리는 순간, 그는 비호의 일격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의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다음 순간, 까마득한 저 지상을 향한 추락이 시작되었다.
“크으으윽!”
그는 균형을 잡기 위하여 숨을 골랐다. 하지만 비호는 그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 추락하는 카라스를 습격한 것이었다.
촤악!
옆구리가 시큰했다. 선혈이 허공에 흩날렸다. 옆을 스치듯 지나치며 날린 일격에 당했다.
“쿨룩!”
기침 속에 피가 섞여 나왔다. 그의 상반신은 어느덧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메탈슈트를 꺼낼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따위 도구에 의지해서는 수련의 의미 자체가 사라진다. 그러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지금이라면?
그사이에도 비호의 거대한 동체가 시야를 급속도로 잠식해 오고 있었다. 카라스는 직감적으로 이번의 충돌이 마지막이 될 것임을 알아챘다. 비호는 이번 공격으로 카라스의 숨통을 끊으려는 듯 두 눈에서 시퍼런 살기를 폭사하며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순간, 카라스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그는 죽음이 자신의 목전에 당도했음을 느꼈다. 소름이 돋았다. 생명이라면, 유한자라면 으레 지니고 있는 죽음에의 공포였다.
한 생명이 자신의 죽음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앞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공포에 잠식될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대였다. 게다가 이미 두 번의 죽음을 겪고, 그것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카라스는 죽음의 공포를 정면으로 직시할 줄 알았다.
문득 그의 뇌리로 예전에 보았던 글귀 하나가 떠올랐다.
필사즉생행생즉사(必死則生幸生則死).
죽고자 싸우면 살 것이요, 살고자 비굴한 이는 죽을 것이라는 한 마디. 바로 그가 천마 파군성이었던 시절 즐겨 읽었던 오자병법(吳子兵法)의 한 구절이었다.
그렇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이렇게 손놓고 당할 수는 없다.
죽음을 직시한 덕에 깊은 우물의 바닥을 박찬 그의 정신은 다시 회생을 위해 창공으로 뛰어오를 준비가 되었다.
와드득!
그의 전신에 힘줄이 와락 솟아올랐다. 근육이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동시에 상중하 삼단전으로부터 해일과도 같은 기세가 일어났다. 절로 북명신공이 일어나 주변의 기를 백회혈과 용천혈을 통해 흡수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더 이상의 뒤는 없다.
그런 필사적인 마음가짐이 그로 하여금 일격에 필살의 힘을 싣도록 만들었다.
필살(必殺)!
예외조차 없이 무조건 죽일 정도의 위력은 아무렇게나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바탕이 되는 육체 위에 기를 싣고, 그 위에 다시 마음을 싣고, 거기에 더해 혼까지 실어야 한다. 단 한 번의 일격에 그 모든 것을 실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필살의 위력이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카라스의 주먹에는 단순한 기의 집중이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이 담겼다.
비호가 날아들었다.
“크아아아!”
카라스가 포효했다.
반대로 그의 주먹은 조용히 내뻗어졌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고요한 몸짓이라 설산비호가 아무런 경계심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극도의 살기가 오히려 일상으로 변했다. 비범(非凡)이 평범(平凡)으로 탈바꿈하는 비범한 순간이었다.
파아앗.
둘의 신형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핏방울이 창공에 붉은 무늬를 아로새겼다.
카라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상체에는 새로운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근육이 갈라지고 뼈가 절반이나 잘린 중상이었다. 카라스는 피를 울컥 뱉으며 의식을 잃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반사적으로 비호의 털을 와락 움켜쥐었다.
반대로 설산비호는 너무나 멀쩡하였다. 놈은 으르렁거리며 기세를 살려 날개를 장대하게 떨쳤다. 귀찮게 달라붙은 카라스를 떨쳐 내어 끝장내기 위하여.
하지만 어느 순간, 설산비호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크륵?
놈은 자신의 몸에서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상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힘이 나질 않았다.
섬뜩한 파육음.
비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의 날개가 몸과 따로 떨어져 퍼덕거리는지.
다음 순간, 설산비호와 카라스의 몸이 한 덩이가 되어 지면과 충돌하였다.
콰아아앙―!
새하얀 카투샤사의 한 사면이 신음했다. 체중만 해도 수 톤이 넘어가는 거대한 설산비호다. 그런 거구가 만 미터 상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덕분에 산 사면을 뒤덮고 있던 얼음 층이 박살 났다.
붕괴한 사면을 통해 빙하의 틈새, 커다란 크레바스가 검은 입을 벌렸다. 설산비호의 거체를 집어삼킬 만큼 넓은 구멍이었다.
이미 죽은 비호의 사체가 축 늘어진 채로 크레바스에 빠졌다. 의식을 잃은 카라스는 비호의 털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덕분에 그도 비호의 사체와 함께 구멍 아래로 떨어졌다.

* * *

작은 실바람이 분다.
차가운 바위를 타고 내려온 기류의 흐름이 싸늘하게 식은 설산비호의 시체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푹신한 털 속에 갇힌 카라스의 얼굴을 할퀴었다.
“크으…….”
아득한 한기에 카라스가 정신을 차렸다. 곳곳이 찢어진 육체에서 선득한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고통에 정신의 끈을 놓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해 자신의 몸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였다.
‘갈빗대가 두 대. 다행히 복막까지 찢어지지는 않았군. 그 외에 치명상은 없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진기가 바닥났어. 카밀카사를 착용할 수도 없을뿐더러, 적을 만나기라도 하면 꼼짝 없이 당할지도 모르겠군.’
그는 몸을 추스르며 주변을 살폈다.
사방이 얼음으로 막혀 있었다. 마치 얼음 속에 수직으로 파놓은 깊은 우물에 빠진 듯한 기분. 그는 이곳이 크레바스의 맨 밑바닥임을 알아챘다.
크레바스란 빙하 속에 생성된 깊은 균열이다. 그 깊이나 넓이가 천차만별이라 얕게는 수 미터에서 깊게는 수백 미터를 족히 넘어가는 것도 있다. 또한 구멍 입구 위쪽이 얇은 얼음이나 눈으로 덮여 있기에 눈에 띄지 않아 그야말로 혹독한 자연의 함정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카라스는 올라갈 길을 살폈다. 하지만 저 위쪽의 실낱같은 하늘이 너무나 작게 보였다. 이곳의 깊이는 적어도 수백 미터는 되어 보였다. 지금의 몸 상태로 쉽게 올라갈 높이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힘들다고 하여 이곳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카라스는 기운이라도 차릴 겸 설산비호의 살점을 일부 잘라 내었다. 그리고 생고기를 천천히 씹었다. 곧 육질이 연해졌고, 그는 고기를 삼켰다. 그런 식으로 배를 채우니 그래도 원기가 조금은 회복되었다.
그는 약간의 고기를 더 챙긴 뒤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빙벽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복막이 드러날 정도로 심한 중상을 입은 몸이다. 출혈량도 만만치 않아 금방 힘이 빠졌다. 결국 그는 100미터 정도를 간신히 기어 올라간 뒤 빙벽의 우묵한 공간에 걸터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훅, 후욱…….”
그는 잠시 앞으로 올라갈 길을 살폈다.
아직도 갈 길은 수백 미터나 더 남았다. 평상시라면 도약 몇 번으로도 오를 수 있을 높이이건만, 진기가 바닥이 난데다가 부상을 입은 몸으로 오르기엔 너무나 높은 얼음벽이었다.
그런데 문득, 반대편 빙벽의 어느 지점이 유난히도 신경이 쓰였다. 카라스는 그곳을 살폈다.
“…….”
그곳은 지금 그가 위치한 곳보다 약 3∼40미터쯤 더 위쪽에 있었다.
그런데 그곳의 빙벽 부근에서 이상한 느낌이 왔다. 카라스는 그 지점에 흐르는 비정상적인 기류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잠시 심호흡으로 힘을 비축한 카라스는 다시 위로 올라갔다. 곧 아까 아래에서 살폈던 지점이 가까워졌다.
“과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는 빙벽을 수평으로 꿰뚫은 작은 암굴이 만들어져 있었다. 사람 하나가 충분히 걸어서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그런데 그 암굴에서는 이곳의 기후에 비해 따스한 공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라스는 이 암굴이 다른 공간과 연결되어 있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암굴로 들어갔다. 이게 어디로 통할지는 모르나 적어도 이곳 크레바스 밑바닥보다는 나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전진했다. 암굴 내부는 실낱같은 빛줄기도 없어 어둡기만 하였다. 게다가 예상과 달리 이리 꺾이고 저리 꺾어지는 터라 방향을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더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그의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는 계속 전진하였다. 혹시나 어둠 속에서 덮칠지도 모를 괴수의 습격을 대비하며.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단조로운 어둠뿐이던 암굴의 내부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외부에서 들어온 빛은 아니었다. 차가운 돌로 이루어진 암굴의 벽면이 스스로 미약한 빛을 머금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치 이 암굴에 들어온 침입자의 존재를 알고서 반응하는 것만 같은 기분.
카라스는 더욱 경계하며 전진하였다.
좁던 암굴은 이제 마차 한 대가 지나가도 될 만큼 넓어졌다. 허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가 앞으로 걸어갈수록 암굴은 더욱 넓어져 이제 그 넓이가 이삼십그 넓에 이르렀다. 게다가 벽면의 빛도 더욱 강해졌다. 피처럼 검붉은 빛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암굴의 끝에 다다랐다.
“이건…….”
카라스가 중얼거렸다.
그가 바라보는 곳, 그곳에는 웅장한 철문이 암굴을 가로막고 있었다. 철문이 어찌나 거대한지 넓이는 수십 미터에 달했고, 높이는 백 미터를 훌쩍 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철문에는 복잡한 문양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문양의 전체적인 구도가 너무나 커서 가까이서는 한눈에 담을 수가 없었다. 카라스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문양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용(龍)이었다.
아니, 조금 달랐다.
문양은 이쪽 세계에서 사람들이 드래곤이라고 부르는 존재를 부조로 새긴 것이었다. 철문에 새겨진 드래곤은 당장이라도 하늘을 향해 떨치고 일어설 듯, 혹은 침입자를 향해 금방이라도 불길을 내뿜을 듯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카라스가 그 조각된 드래곤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큭!”
그의 입과 귀로 선혈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정체를 알 수 없을 막대한 살기가 드래곤의 눈을 통하여 카라스의 내부를 뒤흔든 것이었다.
그는 황급히 물러서며 기운을 흘리려 애썼다. 진탕된 내기의 영향 때문인지, 아공간에 있던 카밀카사마저도 온몸을 떨었다.
그때였다.
키리릭.
어디선가 기관 장치의 작동음이 들렸다. 카라스는 더욱 긴장하였다. 하지만 그가 걱정하는 종류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방금 그에게 살기를 쏘아 보냈던 거대한 철문이 굉음을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 굉음에 암굴 전체가 곧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거대한 문은 그 크기만큼이나 열리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