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엘가드 스컬 1권 (8화)
3. 북부로(2)


“나만 얼굴을 보이는 것은 불공평하겠지?”
스컬은 어쌔신의 복면을 벗겼다. 그러자 드러나는 얼굴은 이제 스무 살이나 됐음 직한 청년이었다. 하얀 피부는 빛을 보지 못하고 살아온 것처럼 창백했다. 그것만 아니라면 갈색의 머리카락과 조화를 이룬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로 인해 제법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는 청년일 것이었다.
“흠… 어디서 본 듯한데… 너 나 알고 있지?”
끄덕끄덕!
위아래로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는 어쌔신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청년이었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며 청년의 얼굴을 따져보다 5년 전쯤인가 만났던 한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는 그때 그 거지?”
“절 알아보시는군요. 하커입니다, 하커. 그때 스컬 님께 제자 삼아 달라고 했던 그 하커.”
5년 전 청부를 이행하다 만났던 거지 소년이었다. 그때 소년은 스컬에게 자신을 받아 달라고 무릎 꿇고 애원했었다. 하지만 살인을 업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또 만들고 싶지 않았던 그는 매몰차게 거절했었다. 따지고 보면 스컬의 얼굴을 알면서 살아 있는 사람이 트리알과 이 이름도 모를 청년인 셈이었다.
“소속이 어디냐?”
“블러드 드래곤입니다. 대륙 최고의 어쌔신 길드…….”
“누가 그러데?”
“네? 그, 그거야 스컬 님의 길드가 와해되면서 자연히…….”
에드몬이 죽고 트리알이 길드원들을 몽땅 데리고 튄 덕분에 블러드 드래곤 같은 곳이 대륙 제일을 떠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안타까운 일이다만 죽어 줘야겠다. 내 얼굴을 아는 놈을 살려 둘 수는 없으니.”
스컬은 한 번의 인연을 가졌던 자라는 이유로 그리 말했다. 하지만 얼굴에는 한 점의 미안한 마음도 엿보이지 않았다.
“사, 살려 주시면 안 됩니까?”
급히 살려 달라고 말하는 어쌔신을 보며 스컬은 싸늘하게 웃었다.
“크큭! 어쌔신들의 율법을 어길 셈이냐?”
청부에 실패한 자는 죽는다. 어쌔신들의 율법의 제일 첫머리에 기록된 내용이었다. 그리고 적에게 사로잡힌 자는 반드시 자살함으로서 비밀을 지킨다는 것도 있었다.
“스컬 님 때문에 어쌔신이 된 접니다. 그때 스컬 님이 너무 멋있으셔서… 그것이 제 꿈이 됐단 말입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자신의 살인행을 보고 어쌔신이 됐다는 말을 들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설마 그때 받아 달라고 한 것이… 큭! 내게 거절당하고 찾아간 곳이 블러드 드래곤이었나?”
“맞습니다. 그때 저를 구해 주시고 같이 있던 사람들을 구해 주신 그 모습을 보고 가만있을 수 있어야죠. 반드시 스컬 님 같은 최고의 어쌔신이 되고 싶었습니다.”
“미친…….”
자신을 동경해서 어쌔신이 됐다는 것을 들으니 한 대 진하게 패면서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안면이 있다고 살려 둘 만큼 자신이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지 않던가.
“미안하지만 죽어 줘야겠다.”
손을 뻗어 죽음에 이르는 부위를 가격하려고 할 때 그가 외쳤다.
“부하로 받아 주십시오. 스컬 님처럼 되기 위해 5년을 죽어라 수련했단 말입니다.”
절절하게 외치는 어쌔신의 눈빛은 간절했다.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를 갈구하는 빛이 가득했다.
“진짭니다. 부하로 받아 주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거라니까요. 저 이래 봬도 쌈도 잘하고…….”
“그러는 놈이 내 한 수도 못 피하냐?”
스컬의 타박에 청년은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흐흐! 그거야 스컬 님이 워낙 세서 그런 거 아닙니까. 급이 다르잖아요, 급이!”
청년의 말이 맞기는 했다. 스컬 자신은 해결사라 불리며 제국의 공적란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존재였다. 고작 A급 어쌔신과 비교를 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랐다. 생각해 보면 부하가 하나쯤은 있는 편도 좋았다. 언제나 자신이 자질구레한 일을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던가.
“해독약은 있고?”
어쌔신들은 배신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만성 독약을 먹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 그거야…….”
해독약이 없어도 조금만 고생하면 풀어 줄 수 있었다. 자신을 동경하고 따르는 놈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됐다. 대신에 배신하면 그때는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 준다. 알겠나?”
“무, 물론입니다. 성심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히히히!”
졸지에 부하 하나를 거느리게 된 스컬은 막아 놓았던 마나로드를 풀어 주며 원래의 목적을 위해 움직였다.

“갈란트의 뿌리를 있는 대로 다 주게. 고블린의 발톱도 다 주고.”
갈란트의 뿌리는 수술을 할 때 쓰는 마비 약품으로 쓰이는 것이었다. 고블린의 발톱은 이름과는 달리 식물인데 생긴 것이 꼭 고블린의 발톱처럼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이것 역시 마비 독을 추출할 수 있는 식물이었다.
“마법사이십니까?”
상점의 주인은 마법사들이나 찾는 식물을 모두 달라는 스컬을 이상한 듯이 쳐다보았다. 주로 독성을 가지고 있는 식물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마법적으로 사용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그 독성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것은 아니었고 마비를 시키는 식물도 다량으로 섭취를 해야 가능했다.
“그건 아니네만. 얼마나 있나?”
“창고에 가득 쌓여 있기는 합니다만…….”
“내가 다 살 것이니 보여 주겠나?”
“그러시지요.”
상점 주인은 10가지가 넘는 독성이 있는 식물을 모두 산다는 것에 창고로 데리고 갔다. 마법사들이 시약을 만들 때 쓰는 것들이라 제법 많이 모여 있었다.
“전부 다 주게. 얼만가?”
스컬의 물음에 상점 주인은 빠르게 단으로 묶여 있는 식물들을 계산했다.
“100테론만 주십시오. 많이 사시니 자투리는 깎아 드리겠습니다.”
“고맙군. 여기 있네.”
스컬은 주머니에서 플래티넘 주화인 50테론짜리 두 개를 꺼내 주인에게 내밀었다. 상당히 고가의 주화인 플래티넘 주화는 귀족이거나 큰 상단 간의 거래에서 주로 쓰였다. 공손히 받아 든 주인은 물건을 어떻게 배달할지에 대해서 물었다.
“어디로 배달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니, 지금 가져갈 걸세.”
귀족의 행동거지를 자연스럽게 소화해 내는 스컬은 작은 배낭을 풀어 놓았다.
“호오… 혹시 마법가방입니까?”
“그렇네.”
“혹시 비율을 알 수 있습니까?”
상인답게 마법가방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배낭의 비율을 물으며 탐욕스런 눈빛으로 배낭을 살폈다.
“1:1,000짜리일세.”
“엄청 비쌀 건데… 부럽습니다. 큼!”
비율 1:1,000이라는 것은 공간의 크기를 말한다. 스컬이 꺼낸 가방의 1,000배 크기까지 담을 수 있는 마법배낭이었다.
“잘 세게.”
“네네.”
스컬은 빠르게 단으로 묶여 있는 독초들을 배낭에 쓸어 담았다. 무게도 1:100의 비율로 줄여 주는 최고급품답게 그리 힘들이지 않고 담을 수 있었다.

독초와 몇 가지 물건들을 대량으로 사서 가지고 돌아왔다. 한센의 방으로 들어가는 내내 지켜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들은 스컬이 죽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에 당황하며 소곤거렸다.
“에드몬 남작님!”
방으로 들어가려는 스컬을 부른 것은 젊은 청년 기사였다. 기사단장인 마크가 스컬에게 망신을 당한 이후 그를 찾는 기사는 그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인가?”
영지와 관련된 사람들과는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었다. 자연 목소리는 차가웠고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원정군 편성이 완료되었습니다. 가서 보시겠습니까?”
원정군이라고 해 봐야 영지에 있는 농노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끌고 온 사람들일 것이었다. 전투능력은 부하로 삼은 하커만 보내도 전멸시킬 수 있을 정도라고 봐야 했다.
“안내해 주게.”
“네.”
이름도 묻지 않았다.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최대한 이 영지와 관련된 사람과는 연관을 끊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 좋았다. 알고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 인연이 미천한 것이라고 해도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저게 병사라는 건가?’
이건 병사가 아니라 거지들에게 창을 쥐어 준 것과 똑같았다. 덕지덕지 누빈 옷을 입고 언제 씻었는지 모를 정도로 새까만 농노들이 창 한 자루 들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모두 정렬!”
기사는 겁에 질려 있는 농노병들에게 호령했다. 농노들에게 있어서 기사라는 존재는 까마득하게 높이 있는 존재였다. 자신들의 목숨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무서운 귀족인 것이다.
“똑바로 서라. 앞뒤 간격을 맞춰서 줄을 서란 말이다. 줄을!”
오합지졸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그런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민망한지 기사는 소리를 지르며 농노들을 닦달했다.
“그만, 그만하게.”
“하지만… 후우! 알겠습니다.”
기사가 뒤로 물러서자 스컬은 그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만 가도 좋네.”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허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기사가 가 버리자 멀리서 떠드는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시선이 스컬에게 쏠렸다. 농노들은 귀족으로 보이는 청년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자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검을 들어 본 자가 있나?”
스컬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활을 쏴 본 사람은?”
몇몇 농노들이 손을 들었다. 그들도 인근 산에서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으며 영양을 보충하고는 했다. 전문적인 사냥꾼 정도의 실력은 아니지만 아주 맹탕은 아니었다.
“제가 활을 좀 쏴 봤습니다요.”
“저도 입쇼.”
이들도 눈치가 있어서인지 뭔가를 잘하면 대우를 더해 줄 것 같아 서로 나섰다. 그러나 스컬 정도의 실력자는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 어느 정도의 실력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하커!”
“네, 마스터!”
하커는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기사들에게도 들키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라 앞으로 써먹을 곳이 많아질 것이었다.
“이걸 가지고 가서 낫을 사와.”
철컹!
황금 동전들이 가득 들어 있는 주머니가 하커의 손에 떨어졌다.
“낫이라면… 농사지을 때 쓰는 그 낫 말씀이십니까?”
“그래. 저들에게 나눠 줄 거니까 넉넉하게 사와야 할 거야. 아참, 그리고 이들에게 입힐 수 있는 갑옷 종류는 싹 긁어 오고.”
“아! 알겠습니다.”
하커의 기척이 서서히 멀어졌다. 그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스컬은 몇 가지 병력 운용에 대한 것을 생각해 냈다.
‘농노들에게 가장 익숙한 낫이라면 한 번 써 볼만 하겠군.’
집단 전투에 관한 것은 확실히 능력이 떨어졌다. 단독으로 침투해 들어가서 적의 목을 베는 일이라면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휘는 또 다른 문제였다.
‘집단 전투에 능한 놈이 누가 있었지?’
자신의 능력을 면밀히 검토하여 모자란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는 것을 생각했다.
‘용병단을 이끌어 봤던 능력자가 필요하겠군.’
이제 떠나야 할 날자가 이틀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백작령에서 준비해 주는 것은 달랑 식량과 그것을 싣고 갈 수레가 전부였다.
“너! 이리 와 봐.”
스컬은 멀리서 지켜보는 눈 중에 하나를 지목하여 불렀다. 멋지게 불러서 에스콰이어지 종자는 기사에게 딸린 몸종과 같았다. 검술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기사가 책임져 줄 의무가 없는 것이 종자였다. 그런 종자 하나가 겁먹은 얼굴로 다가왔다.
“부, 부르셨습니까요.”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로 겁을 먹은 종자를 보고 스컬이 말했다.
“내가 요청했다고 하고 궁수들이 쓰는 활하고 화살 좀 가져오너라. 아니… 궁병들의 수련 장소로 안내하거라.”
“궁병 수련장이요? 따라 오십시오.”
종자가 앞장서서 가자 스컬은 손을 들었던 이들에게 말했다.
“활 솜씨를 볼 것이니 모두 따라오도록!”
“네, 나리!”
농노들은 자신들의 실력에 꽤 자신감이 있는지 겁 없이 따라왔다. 엉터리일 때 받을 문책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 모습들이었다.

쉬이익! 퍼억!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이 과녁의 원 안에 꽂혔다. 사수와 과녁 간의 거리가 50미터 정도 떨어졌음에도 명중시키는 자들이 꽤 많았다.
“농노들에게 활을 쏘게 만들다니 제법이군.”
스컬이 농노들과 어울려 그들의 실력을 체크할 때 감시자로부터 보고를 받은 비욘드 백작부인은 궁병들의 수련장이 내려다보이는 종탑에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기사단장인 마크가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오라버니에게 내 서신을 전했나요?”
“물론입니다. 연락용 매를 이용하여 서신을 보냈으니 이미 당도했을 겁니다.”
“반드시 저들을 최전방에 세워야 합니다. 단 한 놈도 살아남을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하세요.”
비욘드는 그날 스컬과 한센에게 당했던 치욕을 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죽이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던 자들인데 그런 일까지 당했으니 분노는 두 배로 더 늘어나 있었다.
“공작님께서도 알아서 조치하시겠지만, 우리 쪽에서도 따로 손을 좀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쓴다는 거죠?”
“사령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뇌물을 좀 쥐어 주고 한센을 죽여 달라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제일 선두에서 돌격 명령을 받게 될 겁니다. 흐흐흐!”
마크 단장의 말에 비욘드는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말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그렇게 하세요. 다른 사람을 시키지 말고 단장님이 미리 가서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세요. 아시겠어요?”
“흐흐! 명을 받들겠습니다.”
마크 단장이 고개를 숙이자 궁수들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는 스컬을 내려다보는 비욘드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