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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가드 스컬 1권 (9화)
3. 북부로(2)
“무사히 돌아오라! 이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아들이 죽으러 가는 것에도 백작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말을 전하는 레이즌 마법병단장과 몇몇 가신 마법사들이 참석한 조촐한 환송식이었다.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말도요.”
한센은 최대한 의연하게 행동했다. 자신이 허점을 보이면 적들은 그것을 더 깊게 파고 들어올 것이었기에, 아예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했다.
“외삼촌, 이제 그만 가죠.”
갖추고 있는 복장만큼이나 새까만 말을 타고 있는 스컬은 한센의 말에 따라 손을 들어 올렸다.
“출발한다. 전군 앞으로!”
병사들이었다면 최소한 우렁차게 대답하며 발이라도 맞추며 나아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사흘 전까지만 해도 농노였던 자들이었다. 그런 것을 요구하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어느 세월에 쓸 만하게 만들지 원…….”
스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잠깐만요! 기다려요!”
“응? 저 아이는…….”
환송식에도 참가하지 않아 의외라고 생각했던 카트리나였다. 친동생인 한센이 떠남에도 참석하지 않아 무슨 일이 있나 생각하던 차였다.
다가닥 다가닥!
여행자들이 입는 편안한 면바지에 셔츠, 그리고 추위를 막아 줄 망토를 두르고 거기에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스태프가 마법사라는 것을 말해 주는 복장이었다.
“어서 가요, 어서!”
상당히 서두르는 카트리나의 모습에 스컬은 돌아가라고 말하려고 했다. 전장에 가는데 여자인 카트리나가 따라가는 것은 별로 반갑지 않았던 것이었다.
“돌아가라. 네가 갈 곳이 아니다.”
차가운 스컬의 말에 카트리나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스컬의 말보다 더 급한 것이 있는지 얼른 말을 몰아 나아갔다.
“지금은 급해서 그러니까 우선 가자구요. 어서요!”
“원정대가 장난인 줄 아느냐! 돌아가지 못해!”
스컬이 화를 내며 카트리나를 타박하자 한센이 나서서 말렸다. 누나를 잘 알고 있었기에 저런 모습을 보일 때는 뭔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급한 일이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외삼촌, 그냥 가죠. 부탁드릴게요.”
한센이 부탁한다는 말을 하니 차마 자신의 고집만 주장할 수는 없었다.
“알았다. 그렇게 하지.”
스컬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왕의 숲 원정대는 다시 전장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누나 무슨 일이야?”
한센은 성에서 떠난 지 한 시간 정도가 흐른 다음에 카트리나에게 물었다. 바쁘게 재촉하는 카트리나의 행동이 무척 불안해 보였기에 걱정이 앞서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그게…….”
“사실대로 말해 줬으면 좋겠어. 아니라면 누나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어.”
한센이 무뚝뚝하게 말하자 카트리나도 차마 허투루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게… 이걸 보렴.”
한참 뜸을 들이던 카트리나가 품속에서 두꺼운 책을 한 권 꺼냈다. 양피지로 이루어진 책은 오래되어 보이는, 시쳇말로 뭔가 있어 보이는 책이었다.
“줘 봐.”
한센은 누나에게 책을 건네받아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넘기는 내내 한센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져만 갔다.
“이건…….”
“맞아.”
“하아…….”
한센은 철없는 누나의 행동에 절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절대 해서는 안 될 사고를 저질러 버린 누나인 것이다. 가문에서, 아니 몰락해 가는 학파의 근간인 마법서를 훔쳐 가지고 온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버지의 금고 안에 들어 있어야 할 마법서가 이곳에 있을 까닭이 없었다.
“누나, 미쳤어?”
“아니! 난 정상이야. 아무리 미워도 어린 너를 마왕의 숲 원정대로 내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난 그 복수를 하는 거야. 그리고 네가 정당하게 물려받아야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난 잘못 없어! 흥!”
콧방귀를 거나하게 뀌며 고개를 쳐드는 카트리나를 보며 한센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혀를 차 댔다. 누나와 동생이 완전하게 뒤바뀐 듯한 그 모습에, 지켜보는 스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문한 것을 주게.”
스컬의 말에 르브론 제국의 10대 상단 중의 하나인 블룸버그 상단의 지점장 하딘이 일꾼들에게 손짓했다.
“전해 드려라!”
“넵, 지점장님.”
일꾼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튼튼한 레더메일을 전해 주었다. 암갈색의 레더메일은 가죽을 이중으로 덧대어 만든 것으로 일명 경화가죽갑옷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방어력은 철제갑옷에 비견되면서 무게는 절반 이하로 줄여 주는 획기적인 갑옷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흠이라면 가격이 비싼 것인데 의뢰비로 20만 테론을 받아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 아낌없이 지를 수 있었다.
‘의뢰를 완수하지 못하는 것이 더 지랄 맞은 상황인 거지. 돈은 나중 문제다.’
자존심 문제였다. 아무리 어려운 의뢰라도 반드시 해결해 내는 해결사가 자신이었다. 농노병들에게 지급되는 경화가죽갑옷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갈아입는다. 실시!”
“감사합니다.”
농노병들은 그냥 롱스피어 하나만 지급받고 죽음이 기다리는 마왕의 숲으로 끌려가는 줄 알고 있었다. 매사에 시큰둥하게 움직이는 것도 그런 이유가 가장 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의 대장으로 추정되는 귀족은 무언가를 지급해 주었다. 처음에는 대형 낫을 무기로 지급하더니 그 다음에는 활과 화살을 주었다. 그리고 오늘은 무척 비싸 보이는 레더메일을 나눠 주면 입으라 했다. 죽으러 내모는 것이라면 이렇게 돈을 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다 입었나?”
“넵, 대장님!”
자발적으로 대장이라고 부르는 농노병들을 보며 스컬은 상단의 지점장에게 물었다.
“다음 물건은 헥터 영지에서 받게 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여기서는 경화가죽갑옷을 준비했습니다. 저… 그런데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나에게 궁금한 게 있나?”
자신에게 궁금한 것이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의외였다.
“제가 보기에 저들은 농노병 같은데 기사들이나 입는 경화가죽갑옷을 지급을 하셔서 말이지요. 또 헥터 영지에서 주문하신 것은 소형 발리스타 10대와 석궁 200대… 그것이 조금 의외인지라.”
농노병은 버리는 패였다. 그런 농노병에게 영지군에게도 지급하지 않을 최고급 무기들을 주문하는 것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훗! 저들이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날 그 누구도 저들에게 농노병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한 번 두고 보라고, 저들이 어떻게 변해 있는지.”
지금은 초라한 몰골이지만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다면 저들은 최강의 전사들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자신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줄 자신이 있었다.
“하하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저들이 변할 모습을.”
지점장이라는 자는 스컬의 기백에 반해 호탕하게 웃었다. 가끔 세상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는 이런 사람이 있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 주먹질이 성공하여 나라를 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초반에 무너져 허무하게 사라지는 사람이 있었다. 그중 이 젊은 귀족은 어느 쪽인지 두고 보고 싶었다.
고작 300명에 불과한 농노군이었지만 그 겉모습은 제국의 정규군을 뛰어넘는 모습들이었다. 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매달려 움직이는 5대의 소형 발리스타가 압권이었다. 거기에 병사들은 장창 대신 대형 샤이드(낫)를 들고 사각의 카이트실드를 들고 있었다. 벨트에는 작은 샤이드가 달려 병장기의 특이함도 눈길을 끌었다.
“정지! 어디서 오는 군대인가?”
르브론 제국의 최북단에 위치한 발카리안 공작령으로 계속해서 군대가 몰려들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입구에서부터 철저하게 어디서 오는 군대인지 조사하여 주둔지를 안내하고 있었다.
“바이엘 백작령의 군대다. 길을 열어라!”
하커는 어쌔신의 모습이 아니라 군대를 지휘하는 백부장 정도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나이 어린 하커의 변신에는 스컬의 영향이 컸다.
“바이엘 백작령이면… 확인되었습니다. 서편의 군영지로 가십시오.”
병사의 안내에 하커가 한센에게 말했다.
“공자님, 가시지요.”
“안내하게.”
하커가 스컬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농노병 300명으로는 제대로 된 싸움을 해 보기도 전에 무너질 것이란 점이었다. 스컬은 그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용병대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에드몬 남작의 신분을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스컬은 작위를 이용하여 용병대를 이끄는 대장의 신분을 얻을 생각으로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줄 똑바로 서라. 새치기 하는 놈들은 혼날 줄 알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징병관의 앞으로 무수한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각 귀족 가문에서 보내온 병력으로 대부분이 농노로 구성된 농노병들이었다. 그리고 인솔자들은 대부분 나이가 어리거나 돈으로 산 기사들이었다. 죽으러 간다는 생각 때문인지 인상은 찌푸려져 있었고 잔뜩 날이 선 모습들이었다.
“어느 가문에서 오셨습니까?”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양피지 서류에 시선을 박은 채 고개도 들지 않고 징병관이 물어왔다. 단지 귀족가에서 나온 사람들이 서는 줄이기에 존칭을 해 주고 있었다.
“원정대에 참가하러 왔다. 엘가드 S. 에드몬 남작이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국에 속한 귀족가는 단 하나의 열외 없이 참가하기에 귀족의 인장을 기록한 색인이 징병관들의 테이블에 각기 비치되어 있었다. 그 목록을 빠르게 뒤지며 엘가드 S. 에드몬 남작이라는 귀족에 대한 것을 찾았다.
“어디 있더라… 여기 있군요. 엘가드 S. 에드몬 남작님… 전승 귀족이시고… 응?”
징병관은 처음으로 눈을 들어 엘가드 S. 에드몬이라고 밝힌 귀족을 놀라 쳐다보았다.
“징집 대상에 포함되지 않으셨습니다만.”
마왕의 숲 원정대는 죽으러 가는 길이었다. 그 길에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사람들은 혹시 하는 마음으로 많은 돈을 받고 참가하는 용병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신들의 목숨 값으로 가족들이라도 배불리 먹이기를 원하는 자들이 그들이었다.
“혹시 아나, 원정대가 성공해서 공을 세울지.”
길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뜻은 징병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멋모르는 귀족 하나가 공을 세울 부푼 꿈을 안고 마왕의 숲 원정대에 참가하려는 것이었다. 가끔 이렇게 약간 맛이 간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서류를 기재하며 말했다.
“남작이시고 홀로 참가하는 것이니…….”
“잠깐만.”
“네?”
징병관은 젊은 남작이 넌지시 자신을 부르자 기대감에 부푼 눈으로 스컬을 바라보았다.
“별거 아니지만 술이라도 한잔 하게. 하하하!”
말을 하며 남들이 보지 못하게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얼핏 열려 있는 틈 사이로 누런 빛깔의 동전들이 상당했다.
‘회, 횡재했다!’
징병관은 이런 귀족에게는 최대한 편의를 봐 줄 용의가 있었다. 실상 귀족들은 서전트들의 세계를 무시하지만 이들이 군대의 실세라는 것에 있었다. 징병관이 배정해 주는 대로 배속되게끔 되어 있으니 이들에 의해 생사가 오가는 것이었다.
“하하하! 뭘 좀 아시는군요. 이걸 가지고 저기 있는 자크 행병관에게 가시면 안내를 해 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남들에게는 주지 않았던 작은 서류를 하나 더 작성하여 건네주었다.
“수고하게.”
징병관이 내민 서류를 받아 들고 그가 지목한 자크라는 행병관에게 갔다. 아직 다 모이지도 않았음에도 만 단위가 넘어가는 병력이 모인 탓에 북새통 사이를 뚫고 지나가야 했다.
“자크 행병관인가?”
행병관도 그렇지만 군대에서 오래된 서전트들의 위치는 상당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 자리였다. 그런 자들의 비위를 건드리면 적잖은 불이익이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특히 이런 마왕의 숲 원정대 같은 곳에서는 선봉대에 배치시켜도 할 말이 없었다.
“킁! 자크 행병관입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겉보기에도 귀족 같아 보이는 스컬임에도 자크 행병관은 우습다는 느낌이 강하게 대답했다.
“징병관이 주라더군.”
스컬은 징병관이 건네준 서류 외에 또 하나의 주머니를 꺼내 행병관에게 몰래 건넸다.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비리는 얼마든지 감수해야 했다.
“주십쇼. 헛… 뭘 이런 걸 다…….”
스컬이 내미는 서류를 받아 든 자크 행병관은 밑으로 주머니 하나가 딸려 오자 헤벌쭉 웃으며 누런 치아를 드러냈다.
“어디 보자… 엘가드 S. 에드몬 남작님이시고… 전승 귀족이시니 용병대장을 맡으시면 되겠군요. 저 그런데 S가 무슨 약자이십니까?”
“스컬일세.”
“네? 스컬이요? 하하하! 이런 우연이 있나.”
행병관은 스컬이라는 말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혹시 스컬이라는 놈들로 이루어진 용병단을 맡으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같은 스컬이니 통하는 것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스컬? 이름이 스컬인가?”
“웬걸요. 다들 스컬인가 하는 제국의 공적이라고 떠벌리는 허풍선이 들입니다. 뭐 그래도 실력은 좀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스컬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나중에 길드를 되찾으면 다시 한 번 날아오를 불멸의 상징이 될 이름이었다. 그런 자신의 이름을 사칭하는 자들이라니 한 번 쓴 맛을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훗! 그것도 좋겠군. 부탁하네.”
“하하! 따라오십시오.”
행병관은 스컬로 이루어진 용병대를 진짜 스컬에게 맡기는 즐거운 일에 발걸음도 가볍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