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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가드 스컬 1권 (11화)
4. 스컬 백인대(2)
‘왔군. 생각보다 빨리 왔는걸!’
남자들이란 쓸 때 없는 자존심을 세우기 마련이었다. 해서 하루는 족히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겨우 1시간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트링커가 왔다. 그 뒤로 용병들 대부분이 따라온 것을 보면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었다.
털썩!
트링커가 막사 안의 의자에 앉아 있는 스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이 깨질 것 같은 소리가 났지만 굳은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중저음의 낮게 깔린 음성으로 트링커가 말하며 스컬을 올려다 보았다. 죄인이 마치 판결을 내리는 판관 앞에 선 것 같은 심정이었지만 트링커는 결코 굴하지 않았다.
‘바로 받아 주는 것은 재미없지. 고생을 좀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필요해서 받아 준다는 것과 나는 필요 없는데 네가 원해서 받아 준다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후자의 편이 이들을 수족처럼 부리기에 더 편해진다.
“뭐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스컬이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받아 주십시오.”
“…….”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 같은 스컬의 눈이 트링커를 무심하게 내려다보기만 했다. 가타부타 응답이 없이 그저 바라만 보는 답답한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다 스컬의 눈이 다시 감겨 버렸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무언의 축객령이었다.
“받아 주십시오!”
전보다 훨씬 커진 목소리는 커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층 더 간절한 바람이 담겼다. 트링커의 절절한 심정이 담겨 있어서일까 듣는 이의 감정에 호소하는 힘이 있었다.
“돈 때문에 목숨을 판 놈들입니다. 죽을 거 뻔히 알면서도 가족들 풍족하게 살릴 수 있으면 됐다고 온 놈들이 저놈들입니다.”
트링커는 뒤에 죄다 쫓아와 있는 용병들을 가리켰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용병들은 그들이 모시던 대장의 외침이라 그런지 더욱 비통해 보였다.
“스컬이라는 이름 쓰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지랄 맞은 세상에 반항이라도 해 보고 싶어서 스컬이라고 소리 질렀던 놈들입니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스컬이라고 허풍이라도 치면 대접이라도 더 받을까 싶어서 그랬습니다. 우리라고 스컬이 좋아서 그랬겠습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진짜, 형식적인 부하가 아닌 진짜 부하로 받아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쿵!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부탁하는 트링커의 모습은 비장했다. 차마 제자로 받아 달라고는 하지 못하고 진짜 부하로 받아 달라는 말로 스컬의 옆에 있고 싶어 했다.
“받아 주십시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한 사람이 선창을 하자 모두가 따라서 받아 달라고 외쳤다. 트링커의 말과 행동에 동화된 이들은 그가 했던 것처럼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머리를 숙였다. 한동안 그들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던 스컬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입을 열었다.
“받아 주지.”
“정말이십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감사…….”
트링커가 받아 준다는 말에 머리를 다시 쿵쿵 찧으며 감사하다고 외쳤다.
“단!”
“네?”
조건이 붙일 때 쓰는 단어가 ‘단’이라는 단어였다. 결코 쉽게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인 것이다.
“내가 죽으라고 말하면 죽어. 죽는 흉내를 내는 게 아니라 진짜 죽어. 그럴 수 있겠나?”
말은 저렇게 해도 진짜 죽으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의 말을 따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하겠습니다!”
트링커는 자신의 목을 내어놓으라고 해도 강해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었다. 이빨을 악문 채 스컬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내는 그에게 그가 말했다.
“두고 보지.”
“감사합니다.”
“가 봐.”
스컬의 축객령에 트링커는 부하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스컬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크큭! 재미있겠어.”
생각했던 대로 트링커를 얻은 것이었다. 자신에게 모자랐던 것을 채워 줄 수 있는 인재를 얻은 것이니 몇 가지만 더 보충하면 재미있는 원정길이 될 것 같았다.
“전쟁을 치러 본 경험은 있나?”
막사 안에서 스컬은 트링커와 개인 면담 시간을 가졌다. 다른 용병들은 밖에서 안의 대화를 들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었지만 스컬은 신경 쓰지 않았다.
“용병 생활이 올해로 12년째입니다. 그간 영지전, 몬스터 토벌전 등등해서 대소 100여 차례의 전투를 겪었습니다.”
“하긴…….”
10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는 것은 대단한 경험이었다. 생과 사가 오고가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면 그만한 실력도 있을 것이지만 운도 있는 자라고 봐야 했다.
“만약 1,000명의 병력을 지휘해야 한다면 해낼 수 있겠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물음이었지만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트링커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영지전을 치룰 때 천인대를 이끈 경험이 제법 있으니까요.”
“그거 잘됐군.”
스컬은 행병관과 행병대장을 만나 천인대 규모의 병력을 자신의 휘하에 둘 생각이었다. 실력을 보이면 충분하겠지만 그렇게 하면 남의 이목을 끌 수 있으니 피해야 하는 방법이었다. 최대한 조용하게 세력을 불리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결정적일 때 한센과 하커 등을 자신의 옆으로 불러들이면 되는 것이었다.
“조만간 인원이 더 늘어나게 될 거야. 천인대를 맡을 생각이거든.”
“천인대를요?”
“그 정도는 되어야 마왕의 숲에서 힘을 써 보지 않겠어?”
인원이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었다. 천인대는 독자적인 전투가 가능한 병력이고 사령관이 죽음으로 내몰기에 가장 만만한 숫자일 수도 있었다.
“겨우 롱스피어 달랑 하나 들고 원정대로 참가한 놈들이 대부분입니다. 숫자가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 백인대 애들은 최소한 갑옷과 방패, 그리고 각자의 손에 익은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이런 정예들이 있는 것이 생존에는 더 낫다고 봅니다.”
트링커는 전문가적인 견해를 보이며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는 실력이 있는 줄 알고 무릎을 꿇은 스컬이 전투에 대해서 문외한인 것 같아 살짝 실망하고 있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병장기와 각종 보급품은 내가 따로 준비할 거니까.”
백작령에서 떠날 때 농노병 하나를 무장시키는데 들어간 금액이 30테론 정도였다. 질 좋은 갑옷과 전투용 샤이드, 그리고 작은 샤이드를 지급하는데 들어간 비용이었다. 석궁과 소형 발리스타를 사는 비용은 더 들었지만 그것은 논외였다. 천인대를 무장시키는데 들어갈 금액은 많이 잡아야 3만 테론이면 충분했다. 전력을 극대화시키는 비용으로 그 정도면 충분히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대장님께서 모든 보급품을 다 준비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돈이 엄청 깨지실 건데요…….”
돈 때문에 용병이 됐고 돈 때문에 죽으러 이곳에 온 용병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돈을 너무 쉽게 쓰는 것 같은 스컬은 이상한 사람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트링커도 원정 실패가 선언될 때까지 살아 남는 게 목표 아니었나?”
“맞습니다. 그러면 살 수 있으니까요.”
원정실패가 선언되면 그 즉시 살아남은 병력은 후퇴를 하게 된다. 그럼 죽은 자들이 남긴 모든 것들과 몬스터들을 잡으며 얻은 부산물들은 모두 살아남은 자들의 몫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용병들이 참가하는 가장 큰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때까지 꼭 살려야 할 사람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 들어가는 비용은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어. 그리고 그 비용이 나가도 손해도 아니고 말이야.”
의뢰 대금으로 한센에게 받은 것이 20만 테론이었다. 그 돈은 비욘드에게서 나왔고 아직 반에 반도 쓰지 않은 셈이니 엄청난 이득인 셈이었다.
“그러시다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우선 방패가 좋아야 합니다. 갑옷도 중요하지만 몬스터들과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워실드거든요. 모양이 좋다고 카이트실드를 쓰거나 괴상한 모양의 방패를 쓰는 놈들이 있는데 그건 미친 짓입니다. 무조건 방어력이 뛰어나고 네모반듯하게 빈틈없이 막을 수 있는 타워실드여야 합니다.”
“그 다음은?”
“원거리 무기를 많이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원거리에서 줄여 놓고 근접전에서 방패 방어와 공격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면 대체로 이기는 싸움이 됩니다.”
“천명을 무장시킨다고 생각하고 보급품을 꾸려 봐. 출발하기 전까지 구해야 하니까 서둘러야 해.”
원정대가 출발하는 것은 이제 채 한 달이 남지 않았다. 그동안 병력을 최대한 많이 배정받고 그들을 훈련시켜야 했다. 그전에 보급품과 병장기 등을 최대한 많이 사 올 생각이었다. 맨손으로 훈련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블룸버그 상단의 지부입니다.”
트링커가 안내한 곳은 블룸버그 상단의 지부였다. 대규모로 물건을 주문하기 위해서 전에 거래를 텄던 하딘을 만나기 위해서 직접 방문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 블룸버그 상단을 찾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활짝 웃는 얼굴로 이마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인사하는 점원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제국 3대 상단에 들어간다고 하더니 점원에 대한 교육도 철저하게 시키는 것 같았다.
“이걸 보여 주면 안다고 하던데.”
스컬이 내민 것은 블룸버그 상단의 앰블럼이 찍혀 있는 금으로 도금된 작은 패였다.
“이 패는 하딘 지부장님께서 발행하신 패로군요. 무슨 용무가 있으십니까?”
“큰 거래를 하려고 하는데 전에 거래했던 하딘 지부장과 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점원은 스컬의 말에 잠시 서류를 확인하더니 이야기했다.
“지부장님은 내일쯤 도착하실 것 같은데요. 지금 저희와 거래를 하셔도 지부장님과 같은 조건으로 하실 수 있습니다. 굳이 기다리지 않으셔도 되지 않을까 하는데요.”
조심스럽게 자신과 이야기를 하자고 말하는 점원에게 스컬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경화가죽갑옷 1,000벌과 타워실드 1,000개, 그리고 중급 이상의 석궁 500개와 볼트 50만 발을 자네 재량으로 판매가 가능하겠나?”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하!”
젊기에 점원 정도로 생각했는데 상당한 재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름을 알 수 있겠나?”
스컬의 물음에 청년은 하딘 지부장이 주었던 것과 같은 작은 패를 건네며 말했다.
“제라르 블룸버그입니다. 성함이…….”
“엘가드 S. 에드몬 남작일세.”
“에드몬 남작님 다시 한 번 인사드리지요. 블룸버그 상단의 셋째인 제라르 블룸버그입니다. 지금은 발카리안 지점을 맡고 있습니다.”
“아… 미안하네. 지점을 맡고 있는 지점장인 줄 알았다면 아까 같은 실례는 안 했을 것을.”
스컬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제라르 블룸버그를 살폈다. 지점을 맡기에는 상당히 젊은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눈이 깊어 상당히 생각이 깊어 보였다. 거기에 상인답지 않게 눈빛이 맑아 학자나 마법사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느낌이 괜찮은 사람이군.’
스컬이 그런 느낌을 받았을 때 제라르는 그 나름대로 스컬에 대한 인상을 정리했다. 공작령의 소문에 정통했기에 에드몬 남작에 대한 것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천인대를 맡으시려고 하십니까?”
“그게 나을 거 같아서 말일세. 그래야 공을 세워도 크게 세울 것이 아닌가.”
그저 외부로 보이기에는 공을 세우려고 혈안이 된 젊은 귀족이어야 했다.
“그러시다면 제이슨 올레이그 백작에게 줄을 대어 보시지 그러십니까.”
“제이슨 올레이그 백작이라면…….”
“이번 원정의 사령관으로 내정된 분입니다. 황제파의 최측근으로 북군의 사령관을 역임하셨었습니다.”
정보가 빠른 상인답게 아직 누가 사령관으로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제이슨 올레이그 백작에 대해 이야기했다.
“호오! 좋은 정보를 얻었군. 내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제이슨 올레이그 백작은 분명 가일러스 공작가의 사주를 받고 한센과 자신을 최전선으로 보낼 사람이었다. 비욘드도 따로 힘을 쓸 것을 알고 있으니 무시해도 상관없었다. 다만 다른 이들이 그렇게 믿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은혜라는 말까지 써 가며 고마워했다.
“경화가죽갑옷 1,000벌과 석궁 500대에 쿼렐 50만 발, 타워실드 1,000개 외에 또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제라르는 아까 지나가는 투로 한 말을, 수량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중간에 길게 대화를 나눴으니 숫자가 틀려질 수도 있는 문제였는데 정확하게 말했다. 그렇다는 것은 제라르라는 지점장의 머리가 상당히 비상하는 것이었다.
“롱스피어는 부대에서 보급 받아도 되겠지만 브로드소드와 한손도끼류도 필요하네. 당장 필요한 것은 그 정도지만 보급을 받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 여분으로 상당한 비축량도 필요하지. 내가 말한 것들의 물량을 맞출 수 있겠나?”
지금 제국의 모든 병장기들은 이곳 공작령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격은 폭등하여 5테론이면 살 수 있는 하급의 롱소드가 20테론을 호가하는 극도의 인플레이션 상태였다.
“물론입니다. 지금 지점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여분의 병장기를 구입하시겠다면 다른 상단에서 사오는 방법도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네. 그럼 가격을 말해 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