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엘가드 스컬 1권 (13화)
5. 원정(2)
사령관의 말 한마디로 포우 자작의 군단에서 로스라는 공자의 군단으로 편성되어 버렸다.
‘저 꼬마가 군단장인가본데.’
로스 공자는 군단장으로 내정된 귀족들 중에서 가장 어려 보이는 소년이었다. 소년의 부친은 차일드만 후작으로 로스 공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자작의 작위를 받게 되어 있었다. 나중을 대신하는 것이기에 군단장을 맡도록 한 것이었다.
‘아주 죽일 작정을 하고 군단장을 맡긴 것인가?’
로스라는 소년을 살폈다. 아무 말 없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소년의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고집스러워 보이면서도 눈은 지혜가 담겨 있었다. 거기에 유약해 보이면서도 앉아 있는 자세가 단정한 것이 꽤 수련을 쌓았음을 짐작하게 했다.
“에드몬 남작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군단장이니 일개 천인장에 불과한 자신보다는 상위 서열인 셈이었다. 나이나 경력 등을 떠나서 먼저 머리를 숙이는 것이 맞았다.
“반갑습니다, 에드몬 남작님.”
로스 공자는 차분하게 답례하며 고개를 까닥였다. 이지적인 눈동자를 시작으로 곧은 콧대를 타고 내려가는 모든 것이 단정한 소년이었다. 뒤에 서 있는 청년 기사가 스컬의 인사에 고개를 숙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주인에게 예의를 차려 준 것이 고마운 듯했다.
“자, 다시 회의를 속개하도록 하지.”
백작의 말을 시작으로 회의가 다시 열렸다. 잡다한 소리가 많았지만 스컬의 귀에는 선봉부대인 로스의 군단에 대한 것 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럼 열흘 후에 출정할 때까지 각자의 부대를 잘 조련해 두기 바라겠소. 이만 해산하지.”
백작의 말에 모든 귀족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전 일이 있어서 이만.”
인사를 하며 속속 회의장을 빠져 나가는 귀족들은 로스 공자와 스컬을 보며 혀를 차 댔다. 자신들의 처지도 안 됐지만 특히 둘의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큭… 어리석은 놈들 같으니.’
스컬은 자신에게 불쌍하다는 투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귀족들이 우스웠다. 같이 죽으러 가는 처지에 누가 누구를 동정한다는 말이던가. 저런 값어치 없는 동정은 사양이었다.
“에드몬 남작이라고 했나? 나 좀 보고 가지.”
“저 말씀이십니까? 그러죠.”
스컬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군단장으로 선출된 로스가 가지 않고 뒤에서 기다리는 듯이 머뭇거렸다. 스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백작이 말했다.
“로스 공자는 그만 가 보게. 내 긴히 에드몬 남작과 할 말이 있어서 그러니 말일세.”
“네, 알겠습니다. 에드몬 남작님은 여기 일이 끝나면 저를 좀 찾아와 주시겠어요?”
조용하게 말하는 로스의 표정으로 보아 긴히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스컬은 이내 알았다는 대답을 하며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네 편이라는 그런 뜻이 담긴 미소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그럼 이따가 뵙죠.”
로스가 나가자 백작은 팔짱을 낀 채 왼쪽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한 번 보고 싶었네. 가일러스 공작가에서 말이 많기에 말이야.”
까놓고 가일러스 공작가에서 로비를 벌였다는 것을 말했다. 물론 죽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걸 알아듣지 못하면 세상 살아가는데 참으로 애로 사항이 많은 사람일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최전방에 세우신 것이 그런 이유였습니까?”
피식 웃으며 묻는 스컬의 물음에 제이슨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세. 남작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어서였네. 원정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 수는 없지만 최대한 버티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백작은 공작가의 로비 따위는 별 감흥이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만 해결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마냥 모른 척할 수도 없어서 말일세. 내가 남작에게 어떻게 해 주었으면 좋겠나?”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백작은 선택을 하라는 듯이 스컬을 바라보았다.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기분 나쁜 상황에 스컬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자신은 몰랐지만 점점 작아지는 눈매로 인해 표정이 무척 무섭게 변했다.
“어떻게 하든 상관없습니다. 어떻게 해도 살아남을 자신은 있습니다.”
살아남을 자신 있다는 말에 백작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보통 상위 실력을 지닌 자들은 자신보다 아래의 사람들을 보면 느낄 수 있었다. 마나량의 차이로 인해서 느껴지는 것인데 스컬에게서는 아무런 느낌도 전해 오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해서 이런 자리까지 만들었는데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불길했다.
‘나보다 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마스터여야 한다. 마스터라면 이런 죽을 자리로 오지 않았을 것인데… 나보다 높은 경지를 이룬 것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인가?’
백작은 스컬의 정체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자신보다 윗줄에 있는 실력자들을 떠올렸다. 제국에는 총 4명의 마스터가 있었고 3명은 후작 이상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용병왕으로 불리는 자였는데 나이가 80줄에 이른 사람이었다. 눈앞의 스컬은 말투나 행동거지로 보아 이제 2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코 용병왕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내 마음 편하게 남작을 선봉에 세우겠네.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회의 때 뵙겠습니다.”
“잘 가게. 배웅은 나가지 않겠네.”
“네, 그럼.”
스컬은 백작에게 건성으로 인사한 후 막사를 나섰다. 바깥에는 로스와 그의 기사로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그들은 스컬이 나오자 다가오며 말했다.
“에드몬 남작님이시라구요.”
“그렇습니다. 군단장님.”
군단장으로 뽑힌 그이기에 존대를 썼다.
“막사 안에서 들었어요. 상당히 강하시다면서요?”
강하다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아이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우습기는 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지요?”
차분하게 묻자 로스의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어렸다. 뒤를 돌아보며 청년 기사에게 시선을 돌린 로스가 말했다.
“싱클레어 경이 말씀 좀 해 주시겠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로스 공자님.”
싱클레어라고 불린 청년 기사는 은색의 긴 머리카락이 사자의 갈기처럼 퍼져 있어 상당히 강인해 보이면서 또 차가워 보였다. 은색이라는 것이 주는 느낌이 차가운 탓이었다.
“저는 싱클레어라고 합니다. 로스 공자님을 따르는 기사로 이번에 익스퍼트가 되면서 기사서임을 받았습니다.”
“그러시군요.”
나이가 어림잡아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익스퍼트가 되면서 기사 서임을 받았다는 것을 보면 아카데미를 나온 것이 아니라 종자부터 출발하여 기사가 된 평민 출신 기사였다. 싱클레어라는 이름만 말하는 것을 보아도 짐작이 가능했다.
“로스 도련님께서 군단장을 맡게 되셨지만 솔직히 군단장의 역할을 수행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천인장 분들을 살펴보니 에드몬 남작님이 계시더군요.”
천인장을 맡은 귀족가의 자제들은 전부 노예나 하녀들이 낳은 반쪽짜리 귀족들이었다. 그나마도 나이가 어려 제대로 전투를 배운 사람이 없었다. 기사들도 갓 익스퍼트에 오른 자들이거나 싱클레어처럼 평민출신 기사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군단을 휘어잡을 능력이 모자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던 차에 백작부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왔던 마크 단장의 대화를 통해 스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백작부인이 죽이려고 드는 것이나 마왕의 숲으로 들어가는 자신이나 죽으러 가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공통점이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실력이 있는 스컬이 군단을 통솔하면 어떠하겠는가 하고 생각한 것이었다.
“지금 그 말씀은 군단을 저보고 통솔하라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수석 천인대장으로 임명할 것이니 그렇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린 소년인 로스는 자신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하여 강한 실력이 있는 스컬에게 힘을 집중해 주려는 것이었다.
“다른 천인대장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까?”
스컬의 물음에 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우리 가문에서 이끌고 온 병력이 1개 천인대이니 그 병력이라도 남작님이 지휘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로스의 대답에 에드몬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떻게요?”
“군단을 통솔하는 것은 저에게도 벅찬 일입니다. 그러니 내 휘하의 천인대와 후작가의 병력만 제가 지휘하는 걸로 하지요. 나머지는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겁니다.”
너무 많은 병력은 지금 스컬의 능력으로 통솔하는 것이 어려웠다. 개인 전투에 치중된 배움이기에 2개 천인대의 병력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병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한데 군단을 무장시키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는 무리다. 로스의 직속 천인대만 끌어들이는 편이 나아.’
현실적인 계산이 깔린 말이었다. 지금도 7개 백인대를 무장시키는데 들어간 돈이 물경 10만 테론이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경화가죽갑옷은 철제 플레이트메일과 견주어 봐도 뒤지지 않는 방어력을 지닌 놈이었다. 그런 갑옷이 철제 갑옷에 비해 무게는 사분의 일에 미치지 않아서 가격이 비쌌다. 그럼에도 그 비싼 갑옷을 선택한 이유는 실력이 떨어지는 농노병들에게는 맞춤형 방어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면서 이야기하죠.”
“네, 남작님.”
로스는 종종걸음으로 스컬의 옆에 서서 걸었다. 스컬은 자신의 천인대가 있는 곳으로 가며 말했다.
“저야 가일러스 공작가의 눈 밖에 나서 선봉에 서게 됐다지만 군단장님은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후작가라고 하면 제국에 30여 명밖에 없는 엄청난 권세가였다. 그런 권세가의 공자를, 아무리 서자라고 해도 선봉에 세우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이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이해가 안 갔다.
“제 가문은 프린령에 속해 있습니다.”
프린령에 속해 있다는 말을 하며 로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스컬의 얼굴에는 알았다는 표정이 지어졌다.
‘프린령이면 연합제국이 생성될 때 끝까지 저항했던 그 프린 왕국에 속한 후작가로군. 황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일 테니 이러는 것도 이해가 간다.’
프린령은 아직도 제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려는 경향이 상당히 강했다. 황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살려 두자니 손가락에 박힌 가시처럼 신경이 쓰이는 곳이었다.
“제 천인대에 가 보면 아시겠지만 병력의 무장을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농노병들은 몬스터들의 먹잇감밖에 되질 않습니다.”
스컬의 말에 싱클레어는 동의를 표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우선으로 갖춰야 할 것이 갑옷하고 타워실드라고 부르는 방패입니다. 휘하의 용병대장에게 들으니 타워실드를 일렬로 세워서 집단 방어 진형을 갖추면 그나마 싸움에 유리하다고 합니다.”
마왕의 숲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가장 많은 몬스터를 꼽자면 제일 먼저 고블린과 오크를 꼽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 고블린은 독침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리 위협적인 몬스터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크로 넘어가게 되면 문제가 달라졌다. 인간의 두 배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는 오크의 저돌적인 공격은 막아 내기 버거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저돌적인 공격을 막으려면 이중으로 타워실드를 세우고 집단 방진을 짜는 것뿐이었다.
“방어는 집단 방진을 하면 되지만 문제는 공격입니다. 제대로 된 궁수를 키우려면 열흘의 시간으로는 무리가 따릅니다.”
길을 가며 설명하는 것은 스컬이었다. 자신에게 천인대의 지휘권을 맡긴다는 로스이니 최대한 살아남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해야 했다.
“그건 저희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갑자기 끼어든 싱클레어의 말에 스컬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오?”
군단장의 부관이니 직급상으로는 자신과 동급이었다. 작위를 가진 귀족이기에 반등급 정도 윗줄로 볼 수도 있지만 함부로 말을 놓을 수는 없었다.
“혹시 프린령의 주력 무기가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주력 무기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싱클레어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제국으로 합쳐진 지 100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프린 왕국에 대한 향수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들은 그네들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르브론 연합제국이 된 다섯 왕국의 연합 공격에도 10년을 넘게 항전했던 것이 그런 자부심을 낳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군과 관련된 것은 잘 모르겠소. 프린령의 레인저들이 제국 최고라는 말은 들은 것도 같고.”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프린 왕국이었을 당시 그들의 레인저 부대는 타 왕국 연합군에게 저주의 대상이었다. 숲을 지배하는 그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했었다. 물론 르브론 제국으로 합쳐지면서 그런 소문은 많이 감춰지고 퇴색되었기에 이제 와서 알려진 것은 별로 없었다.
“프린령에 속한 레인저들이 사용하는 무기가 도르레를 이용한 석궁입니다.”
“석궁이란 말이요? 그건 전략물자라 하여 시중에서 구하기도 어려운 무기일 텐데.”
“3개 백인대를 무장시킬 석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형으로 교체된 후의 것들이지만 아직도 충분히 쓸 수 있는 것들입니다.”
싱클레어의 말을 들어 보니 로스의 아버지 되는 후작이 상당히 후하게 지원을 해 준 듯했다. 낡아서 교체해야 하는 석궁이라지만 그런 무기를 지원해 주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었다. 미리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구입한 500대의 석궁까지 합하면 상당한 전력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요. 원거리 무기를 따로 더 구하기는 하겠지만 상당히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오.”
싱클레어는 스컬이 걱정을 덜었다는 듯이 미소를 짓자 마주보며 웃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사이 어느새 스컬이 많은 천인대가 머무는 군막들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