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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가드 스컬 1권 (23화)
8. 토르펨(4)


“드레이크를 정신력으로 굴복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아! 물론 드레이크에게 먼저 다가가서 이마에 두 가지 맹약의 인을 찍어야 가능하겠지요.”
말도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다크엘프와의 결혼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드레이크 따위에게 질 내가 아니다.’
죽는 게 낫다고 여길 정도의 어려움을 수백 번이 아니라 수천 번을 넘게 견뎌 온 자신이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싸움도 많았었고 딱 죽는구나 싶었던 순간도 부지기수였다. 카오스 마나 명상법의 2단계를 정복한 이후로 의식의 확장도 경험하지 않았던가. 드레이크가 아무리 대단한 몬스터라고 해도 미물 따위에게 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드레이크를 테이밍하면 되는 겁니까? 그 방법밖에 없다면 하겠습니다.”
루시언은 스컬이 들으면 다크엘프와 결혼하고 말겠다고 물러설 거라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스컬은 99%의 확률로 죽을 위험이 큰 드레이크를 테이밍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저, 정말 그 방법을 택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다크엘프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느니 차라리 드레이크를 테이밍하여 당당하게 이 땅을 차지하겠습니다.”
강렬한 안광을 뿜어내는 스컬의 기세가 폭발하듯 강해졌다. 루시언이 뿜어내는 기운을 밀어내며 방 안을 잠식해 가는 동안 그 파동에 휩쓸려 작은 물건들이 부르르 떨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죽는다는 것이 맞겠지요.”
루시언이 단언하듯 하는 말에 스컬이 강인함이 실린 미소를 선보이며 대답했다.
“저는 스컬입니다. 제 앞에서 죽음을 논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게 드레이크라 할지라도 죽음은 제가 결정하는 겁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밝히는 스컬에게 루시언은 거인을 보는 착각을 일으켰다. 그리 크지 않은 스컬이 마왕의 숲 중심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9. 몬스터 몰이(1)


루시언과의 협상은 스컬이 드레이크에게 도전한다는 전제하에 먼저 로스의 군단을 구하는 것으로 결정 났다. 와이번을 토르펨으로 두고 있는 데보라와 토르펨 부족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귀환하기로 했다.
“타세요.”
아르실이라고 부르는 녹색의 와이번이 고깝다는 듯이 스컬을 노려봤다. 몬스터들의 눈은 눈동자가 세로로 되어 있어 상당히 무섭게 보였다. 주먹보다 훨씬 더 큰 눈동자로 노려보니 매서운 느낌이 더욱 강하게 전해졌다.
“아르실 그럼 안 돼. 스컬 님은 위대한 전사시란 말이야.”
“끼악!”
위대한 전사가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아르실이 기다란 목을 좌우로 흔들며 저항했다.
“아무래도 제가 모시는 게 낫겠군요. 여기로 오르시지요.”
스컬을 향해 말한 사람은 장로 라슨이었다. 그는 다크엘프의 피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지 귀 끝이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아르실 멍청이!”
스컬이 라슨 장로의 와이번에 타려고 하자 데보라가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한 번도 때려 본 적 없는 아르실의 목을 짝 소리가 나게 후려치기까지 했다.
“끼익?”
맹약의 대상인 데보라가 자신을 미워하는 것처럼 행동하자 아르실의 저항이 멎었다. 순한 양처럼 변해 버린 아르실의 행동에 데보라가 손짓하며 불렀다.
“이제 괜찮아요. 여기 타세요. 어서요∼”
코맹맹이 소리를 해 가며 부르는 것에 라슨 장로와 부족의 청년 전사들이 충격을 받아 입을 헤 벌리며 데보라를 쳐다보았다.
“데, 데보라가…….”
“저런 소리를 내다니.”
모두가 그런 표정과 말을 쏟아내자 데보라가 앙칼진 눈으로 흘겨보며 말했다.
“모두 조용하지 못해욧!”
그녀의 말에 모두는 먼 산을 쳐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괜찮겠어?”
아르실에 올라탄 스컬은 아무런 장비가 없는 것에 약간 불안함을 느끼며 물었다. 그러자 데보라가 아르실의 긴 목에 매여 있는 줄을 건넸다.
“이걸 허리에 감으세요. 그럼 떨어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줄을 받아 들었는데 일반적인 줄과는 감촉이 달랐다. 자세히 살펴보니 짐승의 가죽을 꼬아 만든 것으로 탄성이 뛰어나고 질겨보였다.
“고마워.”
스컬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줄을 허리에 감자 데보라가 외쳤다.
“아르실 가자!”
“끼악!”
와이번은 동체가 워낙 크다 보니 날아오를 때도 한 번에 날아오르지 못했다. 몇 번의 도움닫기를 하면서 날개를 펄럭인 후에야 공중으로 날아오를 수 있었다.
파드득! 파드득!
몇 번 날갯짓한 듯했는데 벌써 까마득하게 높이 올라와 있었다.
“멋진걸!”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높은 산에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날아가면서 느끼지는 바람의 압력이 점점 더 거세게 피부를 때렸다. 그 미친 듯한 감각이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고 더욱 더 빠르게 날고 싶은 충동마저 일어났다.
“끼야호!”
너무 황홀한 그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옆에 따라오는 와이번의 라이더들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처음 타는데 그런 소리를 낼 정도면 라이더로서도 충분하시겠군요. 하하하!”
“처음 탈 때 얼어서 눈을 감고 탔던 누구도 있는데 말이죠. 키킥!”
라이더들이 모두 한마디씩 하는데 데보라만이 아무 말도 없이 흥분으로 어깨를 움찔거렸다. 왜 그러나 싶었는데 데보라가 벼락 치듯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분명 눈 뜨고 탔거든요? 그치 아르실?”
아르실에게 구원을 청하는 말까지 했지만 아르실은 대답이 없었다. 영성이 깨어나 어린아이 정도의 지능을 지닌 와이번인지라 차마 거짓말로 주인을 도와줄 정도는 아니었다.
“바보 아르실! 흥, 두고봐욧! 쳇!”
데보라는 위대한 전사를 태우고 가는 내내 자신을 약 올리는 부족의 전사들을 새초롬히 흘겨보며 비행했다.

분지 지형에 군영을 설치하고 스컬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로스와 지휘부는 갑자기 등장한 와이번으로 인해 난리가 났다. 공중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와이번을 발견한 병사들이 석궁을 전부 동원하여 방어 태세에 나섰다. 그리고 기사들과 백인장 이상의 지휘부는 전원이 나와 와이번을 요격하기 위해 대기했다.
“석궁병 준비!”
점점 와이번이 빠르게 다가와 곧 병사들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까지 접근했다. 스컬 대신에 지휘권을 위임 받은 트링커는 석궁병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검을 뽑아 들고 대기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와이번이 사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트링커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처럼 번뜩였다.
“지금…….”
“멈춰! 공격 중지!”
날아오는 와이번에서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외침이 들렸다. 그토록 기다리던 대장 스컬의 목소리였다.
“대, 대장?”
트링커가 놀란 얼굴로 와이번을 바라보는데 커다란 녹색의 와이번의 등에서 스컬이 손을 흔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장님이다!”
“와아! 에드몬 대장님이다.”
병사들은 자신들을 이끄는 실세가 스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스가 군단장이라지만 진짜 대장은 스컬이었고 그는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행동하고 있음도 알았다. 때문에 병사들이 내지르는 함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광적이었다.
퍼드득! 차악!
녹색의 와이번이 날개를 펄럭이며 안전하게 착지하자 트링커와 하커, 그리고 로스와 싱클레어 등이 앞다투며 달려왔다.
“대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갑자기 무슨 와이번이에요?”
한 번에 쏟아지는 질문에 스컬은 손을 들어 제지하며 말했다.
“토르펨 일족의 데보라 양이다. 인사 먼저 하라고.”
“데보라예요. 원정군 여러분을 일족을 대신해서 환영합니다.”
데보라가 섹시미를 물씬 풍기며 인사하자 병사들은 입에 침을 질질 흘리며 쳐다보기 바빴다.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여자 구경은 카트리나가 전부였으니 굶주림이 도를 넘어간 상황이었다.
“트링커입니다.”
“하컵니다.”
트링커는 모습을 보여서 알 수 있었지만 하커는 쉐도우 하이딩 기술로 숨어 있었기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바, 반가워요.”
데보라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으려 주위를 살폈지만 하커의 존재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끼악!”
하커의 존재를 찾은 것은 다름 아닌 아르실이었다. 최상위 몬스터답게 본능적으로 숨어 있는 하커를 찾아낸 것이었다.
스스슷!
아르실의 날카로운 주둥이가 지면을 내려찍자 그림자가 흩어졌다가 모이며 하커의 신형이 드러났다.
“와아… 대단하시네요.”
어쌔신의 기술은 처음으로 보는 데보라는 하커의 쉐도우 하이딩 기술을 보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강력한 전투 기술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전투종족 다크엘프의 피를 타고 태어난 여인다웠다.
“삼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말씀 좀 해 주세요.”
뒤늦게 나타난 한센은 와이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한센은 마법사였고 몬스터에 대한 호기심은 마법사답게 강력했다.
“같이 온 분들은 토르펨 부족이고 토르펨 부족은 역대 마왕의 숲 원정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다. 마왕의 숲 원정대는 제국뿐만이 아니라 그 이전 르브론 왕국부터 시작된 것을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거야.”
르브론 연합제국은 르브론 왕국과 다른 6개의 왕국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제국이었다. 그중 가장 강력하고 큰 땅을 가지고 있던 르브론 왕국은 마왕의 숲 원정대를 500년 전부터 보내왔었다. 토르펨 부족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생존자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보게 되다니… 햐! 놀랍네요.”
“그러게요.”
나이답지 않은 한센과 로스의 대화에 스컬이 말했다.
“손님이 오셨으니 어서 군막으로 모셔.”
“네, 주군!”
하커는 자신을 공격하여 모습을 드러내게 만든 와이번을 노려보다 대답했다. 라슨 장로와 데보라등은 하커의 안내를 받아 튼튼하게 지어진 군막으로 들어갔다.

“나는 원정군의 본대로 오크들을 모두 몰아갈 생각이다.”
스컬은 지도를 펼쳐 놓고 몇 개의 돌을 올려놓은 상태에서 그리 말했다. 그렇게 말하며 돌을 움직이는데 3개의 돌이 주먹만 한 크기의 돌멩이를 향하도록 만들었다.
“이 세 곳이 오크들의 대부락이 있는 곳이다. 요새를 차지하고 있던 부족보다 더 큰 부족들이라고 하니 최소 3만 이상의 오크들이 움직인다고 봐야 한다.”
이번 원정군은 총 12개 군단이 참가했었다. 첫 번째 오크 요새를 탈환하느라 1개 군단이 죽어 나가거나 전투 불능의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단 8천 마리의 오크와 싸우느라 1개 군단이 줄어든 셈이니 3만의 오크와 맞부딪히게 된다면 그 피해가 어떨지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절반은 죽어 나갈 것이다.’
11만 명, 그중에서 1개 군단은 자신의 휘하에 있으니 족히 5만은 죽어 나갈 것이었다. 그것도 작게 잡은 것이고 전열이 무너지면 전멸당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오크들과 싸우게 되면 본대에 타격이 크지 않을까요? 그리고 전에도 사용한 방법인데 제이슨 백작이 가만있지 않을 거 같아서 걱정이네요.”
로스의 말에 스컬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오크들을 몰아가는 건 토르펨 부족분들이 해 주실 겁니다. 와이번으로 몰아서 결정적인 순간에 빠져나가면 우리가 한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겠네요.”
로스가 수긍하자 스컬은 다시 원래대로 작전 개요를 설명해 나갔다.
“그래도 기회는 줘야 하니까 오크 부락이 3곳이고 그 수가 3만 이상이라는 것을 보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싸우려면 병력이 너무 적으니 지원을 해 달라는 것도 상주해야 합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은 로스 군단장님께서 해 주셔야 합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에요. 제가 할게요.”
로스가 선뜻 맡겠다고 나서자 스컬은 트링커와 나머지 지휘관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오크들과 본대가 싸울 때 뒤에서 대기하다가 비어 있는 오크 부락을 점령한다. 마왕의 숲에는 총 3개의 요새가 세워져 있고 그중 북쪽에 위치한 요새가 두 번째 요새로 오크 부족이 점령하고 있다.”
지도에서 가리킨 곳은 3개의 작은 돌이 움직이기 전에 위치한 곳으로 가장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얻어야 할 거점이 이 두 번째 요새다. 이곳과 두 번째 요새를 묶어 거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도에서 보면 알겠지만 북쪽은 거대 몬스터들의 천국이고 남쪽의 첫 번째 요새는 제국에서 언제든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 비워 두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스컬은 모두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라면 마왕의 숲 안에서 반란을 일으켜 시간이 조금 지날 때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이슨 백작을 죽이고 그가 데리고 온 지휘부는 모두 죽여야 했다. 자신들은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몬스터들의 공습으로 지휘부가 모두 죽어 악전고투 끝에 살아남은 낙오병으로 위장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인원이 너무 많아서는 곤란하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죽어야 할 자들은 죽게 놔두는 것이 좋아. 우리의 말을 듣겠다면 구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까지 구할 이유는 없지.’
부하들에게 말은 안 했지만 스컬은 독하게 마음먹고 있었다. 낙오병으로 위장하려면 최대 2, 3만 안에서 살아남아야 제국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트링커!”
“말씀하십시오.”
“혹 본대에 속한 용병단 중에서 아는 자들이 있나?”
농노병으로 온 자들은 전투력이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엄한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어도 칼밥 좀 먹어 봤다는 용병들이 나았다. 그러나 제이슨 백작의 끄나풀일 경우는 피해야 했기에 검증된 자들만을 가려서 받아야 했다.
“몇몇 용병 대장들과 안면이 있습니다.”
“친하지는 않은가?”
“용병들이라는게 다 그렇죠. 같은 편으로 싸웠다가 또 다음 전투에서는 적으로 만나는… 그래서 정을 주지 않습니다. 전투에서 적으로 만났을 때 힘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