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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10화)
마그누스 루시아 스페스 베리타시우스(Magnus Luxia Spes Veritasius)!
선대 황제의 갑작스런 서거 이후 뜻하지 않게 여황의 자리에 오른 소녀.
사실 황제의 서거 당시, 연륜과 덕망을 고루 갖춘 다른 황실의 종친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황제의 사촌 동생인 디카우스(Dicaus) 등을 비롯해 몇 명의 유력한 인사들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여황의 자리는 관심이 전혀 없이, 다른 평범한 소녀들처럼 근사한 왕자가 나타나길 바라는 꿈 많은 소녀였다.
하지만 당시 유력한 귀족이었던, 그러나 안겔루스 가문과 아우다키우스 가문에 밀려 영원한 이인자들이라 불리던 제미니우스(Geminius) 가문과 비르고스(Virgos) 가문이 비밀리에 동맹을 체결했고, 선대 황제의 유일한 친혈육이란 이유로 그녀를 전격적으로 황제로 옹립했다.
장미의 동맹.
제미니우스 가문의 상징인 붉은 장미, 그리고 비르고스 가문의 상징인 흰 장미에서 유래된 동맹이다.
그들은 이후 허울뿐인 여황을 앞세워 전횡을 시작했고, 여황을 위협할 수 있는 황실의 종친들, 혹은 그들을 견제할 만한 다른 유력 귀족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정의는 그들의 권력 아래 무참히 짓밟혔으며, 그들의 의사에 반하는 것은 설령 여황이라 해도 허락이 되지 않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순순히 장미의 동맹에 굴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안겔루스(Angelus) 가문과 아우다키우스(Audacius) 가문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정의와 개혁은 무참히 실패했다.
사실 그들이 내세운 정의나 그들이 추진한 개혁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사상이나 노력만 놓고 봤을 때, 그들의 정신은 후세 역사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받을 만했다.
다만 그들이 실패한 이유는 단 하나, 귀족 의식(意識)의 개혁보다 제도의 개혁을 먼저 내세웠다는 게 먼저였다는 점이다.
―의식이 뒷받침되지 않는 개혁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당시 개혁 실패에 대해 지적한 카시우스의 말처럼, 그들의 개혁은 시대와 장소를 너무 앞서 나갔던 것이다.
그들의 개혁은 장미의 동맹에 의해 반역으로 호도(糊塗)되었다.
그 주동자들은 구족을 멸하는 화를 입었으며,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뿔뿔이 흩어졌다.
개혁은 고사하고, 오히려 개혁의 실패 이후 장미의 동맹이 더욱 공고하게 유지된 것이다.
그가 동생처럼 여기던 카시우스를 떠난 것, 그의 가문이 수백여 년 동안 뿌리를 내렸던 제국을 떠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당장 살기 위해, 그리고 장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따르기 위해 그는 제국을 떠났다. 아니, 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잠시나마 옛 회상에 잠긴 탓일까. 그는 생각을 접고 화제를 바꿔 다소 가라앉은 음성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금 녀석과 나는 엄연히 적. 게다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녀석과 나는 이미 충분히 많은 말을 나눴다. 녀석, 제법 많이 컸더군. 형, 형하며 따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울보 꼬마라고 놀리지도 못하겠군.”
그는 재차 쓰게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상대를 압박하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멀리 어디선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을 카시우스의 시선을 느끼며, 그는 이미 카시우스와 충분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카시우스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고, 얼마나 큰 성장을 했으며, 또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비록 언어로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카시우스의 지난날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는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
지금 중요한 것은 저 멀리 남쪽에 카시우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다는 현실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뒤에 대기하고 있던 십여 명의 장교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약간은 복잡한 표정으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그의 시선을 받은 장졸들이 경외심이 가득한 찬 표정으로,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떨리는 표정으로 그의 눈을 바라봤다.
이윽고 그가 재차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다들 알고 있겠지만, 난 며칠 전 의회로부터 소환을 받았다. 죄명은 명령 불복종 및 근무지 무단이탈이더군. 이미 두 차례나 소환에 불응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소환을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면서 그는 품에서 며칠 전 전령을 통해 받은 소환장을 꺼내 들었다, 공화국 총통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최후통첩에 가까운 소환장을.
사실 사내가 전령을 통해 소환장을 받았다는 소문은 다들 알고 있었다.
그 소환 일이 며칠 남지 않았으며, 사내가 부득이하게 소환에 응해야 한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막상 소환장을 꺼내 들며 그것을 확인시켜 주자, 모두는 발을 구르며 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적의 난공불락 요새를 점거했건만, 상훈은 주지 못할망정 소환이라뇨?”
“이건 대장님을 시기하는 일부 의회 놈들의 농간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 따위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눈앞에 적이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강제 소환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사내로서는 이미 예상을 했던 반응. 하지만 그 완강한 반대는 역시나 그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는 약간의 뜸을 들인 뒤, 자조적인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 또한 지금 이 상황에서 소환당하는 게 좋은 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적의 요새를 탈취한 것도 사실이지만, 패잔병을 추격하라는 상관의 명령을 지시를 따르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 또한 사실이다. 비록 그 결과만 놓고 봤을 때 공을 세운 것이지만, 과정을 봤을 때는 이런 소환장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장교들의 반대 또한 여전했다.
“그래도 이건 부당한 명령입니다! 부당한 명령은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대장님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면서…… 대체 언제까지 속 좁은 의회 놈들이 하라는 대로 하실 셈입니까?”
“이건 필시 대장님을 시기하는 아키에스의 농간이 분명합니다! 이번 기회에 오히려 대장님이 실력 행사를 하셔서 본때를 보여 주셔야 합니다!”
갈수록 더욱 거세지는 반대.
따지고 보면 장교들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특히 지금처럼 적이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 대장이 의회에 강제로 소환된다는 것은 군(軍)에 대해 무지한 일반인이 생각하기에도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내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공화의 군인이다. 따라서 아무리 부당한 명령이라도 일단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게다가 법이 부당하다고 하여 따르지 않는다면, 어찌 그 법이 법으로써 힘을 가질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잘못된 법이라도 일단 정해졌으면 그것을 따라야 한다. 만약 정말로 그 법이 잘못됐다면 그것을 무시할 게 아니라 올바르게 고치는 것이 맞는 절차이다.”
이 말과 함께 사내는 손을 들어 장교들로부터 더 이상의 반론을 제지했다.
―부드럽기는 하되, 한번 자신이 옳다고 뜻을 정하면 어떤 경우에도 원칙을 고수한다.
이것이 바로 사내가 가진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다른 장교들 또한 그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더 이상 뭐라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사내가 다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내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정색을 하는가? 일단 공식적인 발언은 여기까지고…… 그럼 지금부터는 비공식적인 발언을 하겠다.”
“네?”
갑작스런 말에 순간 장교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갑자기 뜬금없이 비공식적인 발언이라니?
장교들 모두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그래 봐야 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담하게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지금까지의 행동을 봤을 때, 적장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치밀함과 담대함을 동시에 갖췄으며, 용맹하고 병사들의 신뢰 또한 한 몸에 받고 있다. 이런 자와 부딪쳐 봐야 우리만 손해일 터.”
“……?”
“너흰 도망쳐라. 일단 최선을 다해서 요새를 방어하되, 만약 조금이라도 상황이 불리해졌다고 생각되면 미련을 갖지 말고 지체없이 도망쳐라.”
그 말을 들은 모두는 일순 어이가 없었다.
“일껏 어렵게 뺏은 요새를 놔두고 도망이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게다가 우린 지금 적보다 훨씬 유리한 상황이 아닙니까? 이 상황에서 도망치란 말씀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장교들 중 누군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우리가 적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우리는 방어에 유리한 요새를 점하고 있다. 물자도 적보다 풍부하며, 조금만 버티면 원군이 도착할 테니 시간적으로도 유리하다. 하지만 전투는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으로 그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 법.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것 외에 다른 여러 조건들을 고려해 봤을 때, 유리한 건 우리가 아니라 오히려 적이다.”
“……?”
“게다가 적은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드는 자들이다. 포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패잔병들은 일명 흑사자대라는 사형수들로 구성된 일종의 소모품들이라고 한다. 그런 자들이 크나큰 패배를 당한 것도 모자라 요새마저 빼앗기고 돌아가면 사형이 당연할 것이니, 놈들은 죽을 각오로 요새를 탈환하기 위해 덤벼들 것이다.”
약간의 뜸을 들인 뒤,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주어진 여건이 불리하고, 싸우고자 하는 의지 또한 불리하다. 이런 상황에서 적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너무도 무모한 짓이다. 게다가 적장도 이런 아군의 약점을 잘 알고 있을 터. 그러니 이깟 요새 하나에 목숨을 걸지 말고 여차하면 무조건 도망치라는 것이다.”
그의 설명은 여기까지였다.
사실 그는 차마 그다음 말을 하지 못했다, 애초 자신이 예상했던 결과는 이게 아니라는 것을.
비록 명령을 어기긴 했지만, 그는 일단 적의 요새를 탈취하기만 하면 추가 원군이 도착하여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요청했던 원군은 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고, 대신 자신을 의회로 소환하는 통지서만이 날아왔으니…….
그가 무조건 도망치라고 한 것도 따지고 보면 무리는 아니었다.
여전히 장교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설명을 들을수록 더욱 이해가 되지 않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다만 한 가지, 그들에게 있어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자신들의 대장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들을 실망시킨 적이 없으며, 그의 말은 언제나 절대적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깟 요새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다시 뺏을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빼앗긴 자네들의 목숨은 신이 아닌 이상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더 이상 반론은 금한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리고 내가 평소에 누차 말했을 텐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자신의 목숨이라고. 일단 살아 있어야 개인의 부귀영화를 누리든, 혹은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든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알겠나?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살아 있다는 것이지, 그깟 얄팍한 신념이나 정의 따위가 아니다!”
그제야 모두는 그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들이 어째서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따르고 있는지. 어째서 자신들이 그를 향해 무한에 가까운 신뢰를 보이는 것인지.
―Etiam, mei dominus!
장교들은 발을 구르며 차렷 자세를 취하고, 동시에 오른손을 허공을 향해 곧게 뻗는 경례를 취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하나같이 입가에 묘한 웃음기를 머금고.
“복명은 하지 마라.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비공식적인 발언이니까. 공식적으로 자네들은 최선을 다해 요새를 방어해야만 한다. 후후후!”
그 또한 장난스럽게 히죽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의 이름은 레오니스 비타 아우다키우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