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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11화)


제4장 제7요새 공략전(II)



1

제7요새.
제국의 남부 아조루스에서 중앙의 매오니아 지방으로 향하는 길목, 넓은 평야 지대의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 요새이다.
본래 아조루스를 위시한 남부 지방은 제국의 건국 초기부터 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때문에 제국은 그 남부의 입구라 할 수 있는 길목에 견고한 방어선을 만들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3년여에 걸친 대공사 끝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제7요새였다.
따라서 제7요새는 단순히 방어 위주의 개념으로 만들어진 다른 요새와 달랐다. 물론 유사시 남부의 군사적 위협이 제국 중앙으로 번지지 않도록 막는다는 방어의 개념도 있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반대로 제국이 남부에 군사적 행동을 취할 때, 최전선의 전초기지 겸 병참기지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수비와 공격, 모두를 위한 전천후 요새.

이것이 바로 제국의 제7요새였던 것이다.
제7요새는 제국의 수많은 요새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철벽을 자랑했다. 일단 돌을 쌓아 만든 외곽 성벽의 높이만 해도 무려 10미터.
성벽 주위로는 나무 등을 날카롭게 깎아 만든 목책진이 일차 방어선을 구성했고, 목책진과 성벽 사이에는 수백 개의 무시무시한 함정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성벽에도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각종 함정들이 설치돼 있었으며, 또한 동서남북 네 개의 육중한 성문은 두께만 해도 3미터에 달해 어지간한 충차의 공격에는 끄떡없었다.
비단 대단한 것은 그 외관만이 아니었다.
요새의 규모와 넓이는 외관보다 더 대단했다. 우선 대지 면적만 해도 무려 삼십만여 평. 원형의 둘레는 약 5km가 조금 못 됐다.
실 면적은 최대 3만 명이 상주해도 될 만큼 넓었고, 요새 중앙의 창고에는 1만 명의 장졸들이 최소한 1년은 버틸 정도로 군수품들이 가득 비치돼 있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요새!이러한 철옹성, 사방이 탁 트인 평원 한복판에 우뚝 솟은 괴물을 향한 카시우스와 흑사자대의 도전이 지금부터 시작된다.



2

칸세르 나시디우스 (Cancer Nasidius).
올해 나이 서른다섯. 175cm가량의 키에 군살 하나 없는 단단한 근육이 인상적인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다만 거친 체형과 달리 얼굴은 코가 휘어지고 눈매가 날카로워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보였는데, 성격은 또 의의로 신중하고 사려 깊어 상하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병사들을 지휘할 땐 신중하고 이성적이지만, 일단 적과 부딪치게 되면 누구보다 용맹한 군인.

이것이 바로 불과 서른다섯의 나이로 공화군 상급 천인대장의 지위에까지 오른 칸세르라는 자였다.
제법 경험이 풍부한 칸세르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성동격서(聲東擊西)인가?”
요새에서 가장 높은 곳인 중앙의 망루에 올라 전장을 살피며, 칸세르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미간을 좁힌 채 자기도 모르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서.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제7요새의 남쪽 망루, 요새 아래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위치였다.
그리고 지금 요새 주위에서는 제국의 군대가 병력을 둘로 나누어 공성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바, 문제는 그들이 보여 주는 행동들이다.
카시우스와 소브리우스가 공동으로 이끄는 제국군은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요새의 기병대와 중무장 보병대가 주축인 소브리우스가 지휘하는 서편의 병력 삼천, 흑사자대와 요새의 경무장 보병대가 주축이 된 카시우스가 지휘하는 동편의 병력 삼천이었다.
그리고 그 외 부상이 심한 자들과 나머지 병력 천여 명이 남쪽의 외곽에서 본진을 수비했다.
“음, 역시 적은 아군의 병력이 요새를 완전히 수비하기엔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건가?”
문득 그의 입에서 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실 칸세르도 적이 동서 양편으로 병력을 분산시킨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재 공화군은 요새의 기능을 완벽히 발휘할 수 있는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동서의 정반대에서 공격을 하는 것도 효과적인 전법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제국군이 보여 주고 있는 행동들, 어쩐지 아군을 기만하고 유인하는 듯한 행동들이었다.
허장성세(虛張聲勢).
지금 제국군이 보여 주고 있는 행동들,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성동격서의 전형이었다.
아군의 유연한 군사 이동을 방해하는 동서, 정반대의 공략. 비록 겉으로는 맹렬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실속이 없는 과장된 공격.
그리고 마치 아군을 시험하는 듯한 연속적인 치고 빠지기들.
하루 종일 지속된 제국군의 이 모든 행동들은 모두 성동격서의 전형들이었다.
‘현재 아군에게 동서 양쪽을 동시에 완벽히 방어할 여력은 없다. 그리고 적 또한 동서 양편을 동시에 공략할 여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연 동서 중 어느 쪽이 적의 진짜 주력이냐 하는 점이다.’
그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전황, 계속해서 전해지는 장교들의 보고들, 그리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전장의 분위기 등을 모두 종합하며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겼다.
여기까지만 보면 적의 움직임은 명확했다. 동서 둘 중 하나에 가짜 주력을 투입해 수비군의 이목을 끈 뒤, 반대편에 진짜 주력부대를 투입해 단숨에 요새를 공략한다.
즉, 전형적인 성동격서의 전법이었던 것이다. 다만 적의 진짜 목표가 기병이 주력이 된 동쪽이냐, 아니면 보병이 주력이 된 서쪽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해질 녘.
그렇게 제국 측의 기묘한 공격은 하루 종일 계속된 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겨우 끝이 났다.
겉만 요란한 공격인 탓에 불과 수십 명뿐인 적은 사상자만 만든 채.
“어쩌시겠습니까? 이대로 놈들을 그냥 보내시렵니까? 이미 기마대는 준비가 끝났습니다. 지금이라도 추격 명령만 내려 주시면 당장 놈들을 쓸어버리겠습니다.”
뒤에 있던 젊은 장교 하나가 칸세르에게 다가와 말했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며.
하지만 그는 잠시 생각해 보다 찬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적은 물러서면서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고, 아군 또한 하루 종일 비상 대기 한 탓에 피로가 클 것이다. 게다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유리한 것은 우리일 테니, 오늘은 우리도 이쯤에서 마무리한다.”
이렇게 말한 그는 다시 신중한 눈으로 적의 병사들을 응시했다. 썰물이 빠지듯 신속하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 적의 병사들을.
‘기병대의 동쪽인가, 아니면 보병대의 서쪽인가?’
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습관적으로 팔짱을 끼고 턱을 쓰다듬었다.
복잡했다. 분명 오늘의 이 공격이 일종의 미끼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적도 군수품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동서 양쪽 중 어느 쪽이 진짜인가라는 생각에 그의 머리가 복잡했다. 만약 이럴 때 레오니스가 있었다만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이럴 때 의회에 강제로 소환당한 게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의 고민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 다음에도, 그의 고민은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이윽고 그는 생각을 마치고 감았던 눈을 떴다, 뭔가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한 표정으로.
그리곤 여태까지 그의 뒤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장교들에게 말했다.
“아마 적의 공격은 검은 기병대가 주축이 된 동쪽이 진짜일 것이다. 앞으로 건장한 주력 병사들은 동쪽에 배치하여 전투에 대비토록 하라!”
“정말 동쪽입니까?”
다른 장교 하나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지만, 이미 생각을 마친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적장은 속임수에 능한 자! 그런 적장이 왜 오늘 노골적인 성동격서의 책략을 보였겠는가? 즉, 적장은 처음부터 아군이 자신의 성동격서를 알아채 주길 원했던 것이다!”
“……?”
“적은 오늘 동쪽에서 소리만 지르고 서쪽이 진짜 목표인 것처럼 공격했다. 아마 아군이 자신들의 성동격서를 알아채고 서쪽을 경계하도록 유인하기 위함이었겠지. 즉, 의도적으로 성동격서임을 흘려 서쪽을 강화하게 만든 후, 그것을 역이용해 동쪽을 공격하는 것이 진짜 의도였던 것이다.”
그는 확신했다. 적은 성동격서를 역으로 이용해 함정을 팠으며, 따라서 그 성동격서의 역이용을 다시 역으로 이용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가 있다고.
그러나 과연 그의 예상이 맞을지, 과연 동쪽이 제국군의 주력일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3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하명만 하십시오!”
셉티무스가 말을 몰아 천천히 카시우스에게 다가와 말했다, 언제나처럼 낮고 공손하지만, 한편으론 자신감이 충만하고 믿음직스런 표정과 어투로.
비록 간밤의 찬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지만, 그의 보고처럼 모든 준비는 끝난 상태였다.
숙영지를 정리하고, 간밤에 굳어졌던 몸을 풀며, 병장기를 손질하고, 각자 자신의 애마(愛馬)에 올라 정해진 위치로 움직이는 일련의 과정들.
이젠 몇 번째 전투인지 정확히 기억조차 나지 않았지만, 흑사자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신속하게 이 모든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카시우스가 입을 연 것은 그가 보고를 하고도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수고했다. 소브리우스 군단의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북을 울리고 전투를 시작한다. 그때까지는 다들 긴장을 풀지 말고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카시우스 특유의 담담하면서도 낮은 목소리.

―Etiam, mei dominus!
셉티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복명한 뒤, 이를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전령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전령들은 다시 급히 말을 몰아 각 백인대에게 명령을 하달했고, 잠시 후 모든 병사들은 말에서 내려 병장기를 내려놓고 짧은 휴식에 들어갔다.
그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고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은 동안에 벌어진, 마치 쉬는 동작 하나마저도 철저히 사전에 연습을 한 것 같은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부산히 움직이는 병사들을 뒤로하고, 카시우스는 여전히 선두에 선 채로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저 멀리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회색의 철옹성, 곧 치열한 격전의 장소가 될 제7요새를.
‘레오니스! 그가 정말 저 요새에 있을까?’
언뜻 차갑기만 한 그의 눈에 찰나적으로 복잡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미 예상을 했던 일이다. 로메루스의 입을 통해 레오니스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에 레오니스가 제국에서 도망쳤을 때부터, 그는 본능적으로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자신과 레오니스는 언젠가 적이 되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하지만 그 혹시나 하는 예감이 막상 현실이 되자, 실제로 전장 한복판에서 레오니스와 조우하게 되자, 그는 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심경이 되어 가슴 한구석이 그저 먹먹할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대장님, 죄송합니다만,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셉티무스였다. 그의 뒤에서 문득 셉티무스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렸다.
“뭔가?”
어느새 특유의 냉정함으로 돌아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되묻는 카시우스.
이에 셉티무스는 더욱 송구한 어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 짧은 소견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뭐가 이해되지 않는단 말인가?”
“아군의 목표는 처음부터 요새에서 가장 방비가 허술하고 취약한 ……의 방향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대장님께서는 ……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대신 엉뚱한 성동격서의 책략을 사용하신 겁니까?”
사실 이 의문은 셉티무스만이 가진 것이 아니었다.
다른 방향에서 전투 준비를 하고 있는 소브리우스는 물론, 휘하의 대다수 장교들이 카시우스의 전법에 의문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