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제국의 매 1권 (12화)
다만 그가 언제나 전장에서 최상의 결과만을 도출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동기이자 현재 최고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소브리우스가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 의문과 불만을 표하고 있지 않을 뿐이었다.
카시우스는 웃었다. 그런 뒤 그는 대답 대신 상대를 더욱 의아하게 만드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곤 잠시 후에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적장은 신중하고 병법에 밝은 자다. 굳이 직접 만나 봐야 상대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새의 병력 배치, 성동격서에 대한 반응, 그리고 여러 가지 적의 움직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봤을 때, 적장은 경험이 풍부하면서도 신중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상상도 못할 기묘한 책략으로 아군의 요새를 뺏은 걸 보면 적장은 본래 속임수에 능한 자였다. 하지만 중간에 적진에 무슨 변화라도 있은 듯, 현재의 적장은 속임수와 거리가 먼 신중한 인물이다.”
단지 병사의 운용만으로 공화군 내부의 변화를 정확히 꿰뚫어 본 카시우스.
비록 신이 아닌 탓에 정확한 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감탄을 자아내는 통찰력이라 할 수 있었다.
어느새 주위의 장교들도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잠시 숨을 고른 뒤 그의 말이 계속되었다.
“병법상의 기변(奇變)은 항상 상상을 뛰어넘는 대단한 속임수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지금처럼 신중하고 병법에 능한 자와 상대할 때 어설픈 속임수는 더더욱 위험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직접적인 속임수 대신, 속임수를 쓰는 척 몇 가지 암시를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즉, 속임수를 쓰는 척하고 속임수를 쓰지 않는 게 오히려 상대에게는 가장 큰 속임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대장님께서 적에게 던진 암시가 성동격서란 말씀이십니까?”
카시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아군이 사용한 성동격서는 적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시험인 동시에, 적을 속이기 위한 암시였으며, 또한 오늘의 공격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기도 했다. 어차피 우리는 요새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적의 관심을 그 약점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고, 아군이 약점을 공략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만 벌면 승리할 수 있다.”
이 말과 함께 카시우스는 다시 정면의 요새를 바라봤다.
그제야 셉티무스는 언뜻 이해가 되었다.
‘과연……! 아군이 성동격서의 책략을 사용했다는 건 정식으로 병법을 배우지 못한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병법을 배운 적장도 당연히 알아차렸을 것이고, 적장 또한 아군의 진짜 목표가 과연 동쪽이냐, 서쪽이냐로 머리가 복잡했을 것이다. 적이 동쪽과 서쪽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적이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신이 아닌 바에야 누구도 장담을 할 수 없는 일이고, 어차피 우리의 목표는 처음부터 다른 곳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아군에게 중요한 것은 성동격서를 걸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고, 이에 따라 적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전혀 관심 밖이었다.’
셉티무스는 새삼 상관에게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곁에서 그림자처럼 따르는 카시우스였지만, 그의 군사적 재능과 능력은 볼 때마다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사실 카시우스는 성동격서로 적을 시험하며 한 가지 대책만 준비했던 게 아니었다.
그는 성동격서에 대한 적의 대응에 따라, 요새를 공략하는 몇 가지의 계략을 준비했다.
―미끼를 던져 적의 유형을 파악하고, 적의 유형에 최적화된 전략과 전술로 승리를 거둔다.
이것이 바로 카시우스가 애용하는 필승의 전법, 가장 기초에 충실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전법이었다.
다행히 적장은 그가 상대하기 가장 편하다고 생각한 유형,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물론 신중한 성격이라고 전부 상대하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속전속결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신중한 상대가 오히려 전투의 주도권을 잡기 편했고, 그 덕분에 그는 오늘 생각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요새에 대한 전면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여유는 여기까지였다. 다시 셉티무스가 뭐라 질문을 던지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그의 질문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소브리우스 진영의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신호, 저 멀리 반대편에서 붉은색의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원래 지금처럼 중요한 일전을 앞둔 상태에서는 최고 지휘관이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일장 연설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전투의 중요성, 반드시 승리를 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그 승리를 통한 달콤한 보상들을 통해 병사들의 사기를 돋웠던 것이다.
하지만 흑사자대는 예외였다. 위아래가 하나가 되어 수많은 전장을 헤치고 온 전투의 귀신들에게 있어, 인생의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해 수많은 죽음을 넘어선 전투의 귀신들에게 있어 그런 요식행위는 오히려 불필요할 따름이었다.
그들에게는 그저 최고 지휘관의 명령 한마디, 전투의 개시를 알리는 명령 한마디만으로 모든 게 충분했다.
“잡담은 여기까지다. 전군, 전투준비!”
본래의 얼음으로 돌아온 카시우스가 오른손을 높이 들며 차갑게 외쳤다, 다른 한 손으론 품에서 붉은색의 가면을 꺼내 천천히 얼굴을 가리면서.
―Etiam, mei dominus!
모든 흑사자대원들 또한 품에서 가면을 꺼내 얼굴을 가리며 큰 소리로 복명했다. 그리고 이어서,
―Momento mori! Momento mori!
그들의 외침이 평원 전역에 낮고 음산하게 메아리쳤다, 마치 지옥 저 멀리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환청처럼.
이제부터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동안 몇 명이나 죽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이제부터 그들은 순수하게 죽음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신(死神), 오로지 적을 죽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신들이었다.
4
전투란 단순히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인해 승패가 결정되는 단순한 산수가 아니다. 다시 말해 단순히 병사나 군수품의 많고 적음으로 인해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어차피 전투란 한정된 시간, 한정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적과 나의 상호 모순적이고 대립적인 행동.
따라서 전투란 얼마나 많은 자원을 갖고 있는가로 결정되는 산수가 아닌, 한정된 자원을 얼마나 유기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가 하는 고도로 복잡한 수학이다.5)
카시우스가 밝힌 전투의 승패에 관한 견해였다.
그리고 이런 그의 승패론(勝敗論)에 비춰 봤을 때, 제7요새 공략전의 승패는 처음부터 결정이 되어 있었다.
―주도권을 잡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자와 방어 위주의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자.
그 둘 사이에 있어 자원의 효율적 이용은 이미 처음부터 결과가 나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어진 전투는 이미 결정된 결과를 확정짓는 마무리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전투 개시 직후, 소브리우스가 이끄는 일천 명의 기병대가 맹렬히 요새의 남문을 향해 돌진했다.
두두두두!지진이라도 난 듯 요란하게 지축을 울리며, 기병의 장점인 빠른 기동력을 최대한 살린 채 노도(怒濤)처럼.
군마(軍馬)의 말발굽 소리는 거대한 천둥이 되어 지축을 울렸고, 뿌연 흙먼지는 때 아닌 구름이 되어 하늘마저 가렸으며, 그들이 토해 내는 열기는 당장에라도 성벽을 녹일 듯 뜨거웠다.
그러나 앞서 카시우스의 암시에 빠진 칸세르는 망루에서 이런 움직임을 빤히 보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적장은 속임수에 능한 자다. 따라서 지금 남문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 움직임 또한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어제의 성동격서를 보더라도 적의 노림수는 동쪽이었다. 따라서 지금은 비록 남쪽을 향해 돌격하는 척하지만, 아군이 이에 허둥대서 주력을 움직인다면 곧 동쪽에서 진짜 적의 주력이 나타날 것이다.’
그는 끝끝내 카시우스가 던진 암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카시우스라는 인간은 속임수를 즐겨 한다는 암시에서.
따라서 칸세르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타이밍을 몇 박자나 놓친 다음이었다.
“아차! 설마 처음부터 적의 목표는 남문이었던 것인가? 전군 남쪽을 지켜라!”
그는 뒤늦게 동편에 배치한 주력부대를 급히 서문으로 이동시켰다.
이어서 그의 명령을 받은 전령들이 다급하게 뿔나팔을 불어 신호를 보냈고, 곧이어 각 백인대장들의 인솔하에 공화군의 병사들이 급히 남문으로 모여들었다.
“남쪽! 남쪽이다!”
“남문의 방어를 강화하라! 어서 응전해서 적의 접근을 차단하라!”
중간 장교들의 함성, 병사들의 복명, 그리고 군마의 울음이 한데 어우러져 삽시간에 요새를 난장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지휘관의 뒤늦은 결정은 병사들마저 우왕좌왕하게 만들었고, 게다가 이미 적의 기병대가 요새 주위의 함정을 피해 코앞까지 접근한 뒤였다.
또한 공화 측 병사들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 것은 제7요새의 복잡한 구조였다.
요새는 앞서 카시우스가 지적했듯이 내부 지리가 복잡해 쉽기 익숙해지기 어려웠던 바, 다급해진 공화의 병사들은 지정된 방어 위치로 이동하는데 크게 애를 먹었다.
반면 소브리우스와 카시우스가 공동으로 지휘하는 제국군은 주어진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끝으로 자원의 효율적 사용이라는 타이밍 싸움에서 빛을 발한 것이 바로 카시우스의 가장 뛰어난 능력, 레오니스가 지난 ‘기변(奇變)’의 재능과 쌍벽을 이루는 ‘통찰력’이란 능력이었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카시우스와 싸우면 상대의 움직임을 뻔히 알면서도 도저히 대응하지 못하고 패한다고.
즉, 위에서 장기판을 내려다보듯 언제나 냉정하고 정확하게 판단한 뒤,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의 활용에 조금의 시간 낭비도 허용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카시우스가 지닌 가장 무서운 능력이었던 것이다.
전황은 카시우스의 계획대로 전개됐다. 맨 처음 중무장 기병이 투입된 직후, 경기병들이 공병들을 요새 문 앞에 내려놓기까지는 오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요새와 성문의 구조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백여 명의 공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작업을 했고, 그로부터 다시 이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거대한 성문을 해체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에 불필요한 시간 낭비 따위는 전혀 없었으며, 전체가 한 몸이 된 듯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만약 요새와 성문의 구조를 잘 알지 못하는 병사들이 힘으로 문을 열었다면, 아마 몇 시간이 걸려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을 열기는 고사하고 성문에 설치된 각종 함정들에 걸려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병들은 성문의 구조를 수비하는 측보다 더욱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은 문을 힘으로 부수는 대신 나사와 이음새를 풀어 아예 분해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전투가 개시되고 불과 삼십여 분이 지난 후,
단단한 위용을 자랑하던 제7요새는 죽음의 흑사자대 앞에 그 나약함을 드러냈다.6)
5
그것은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요새 안으로 침투하는 흑사자대의 검은 물결은 날카로운 송곳과도 같았다.
요새의 문은 불과 말 세 마리가 나란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밖에 해체되지 않았지만, 그리고 해체된 문 앞에는 급히 전열을 갖춘 백여 명의 궁수들이 화살을 겨누고 있었지만, 흑사자대에겐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게다가 심리적인 개념에 비춰 봤을 때, 돌진하는 흑사자대와 막고자 하는 공화군의 궁수들 사이에서는 이미 승패가 결정되어 있었다.7)
돌진하는 흑사자대에겐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다. 하긴, 만약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남아 있는 자들이었다면 흑사자대의 혹독한 훈련을 견디지도 못했을 테니까.
눈앞에서 자신들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그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적을 향해 돌진했다. 아니, 동요는 고사하고 오히려 상대를 압박하려는 듯 평소보다 더욱 맹렬한 기세로 말을 몰아 돌진했다.
두 발은 안장에 단단히 고정시킨 채, 왼손에는 화살을 막기 위한 둥근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는 기다란 마상용 장창을 들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