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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13화)


약간은 불리한 입장인 흑사자대가 이렇게 나오니, 심리적으로 위축된 것은 오히려 공화군의 궁수들이었다.
가뜩이나 검은 가면을 써서 위압감을 주는 흑사자대였다.
그런 자들이 벼락 치듯 요란하게 지축을 울리며 돌진해 오니, 공화군의 궁수들이 본래의 실력을 발휘하는 건 무리였다.
때문에 궁수들은 손을 떨며 엉뚱한 방향으로 화살을 날렸고, 그나마 제대로 날아간 화살도 힘이 없어 흑사자대의 방패에 쉽게 튕겨져 나갔다.
흑사자대는 좁은 틈을 통과해 요새에 진입한 후, 부챗살처럼 넓게 퍼지며 궁수들을 향해 돌진했다. 뛰어난 기마술과 무모할 정도의 과감함을 자랑하며.
일명 전투의 귀신들이라 불리는 흑사자대, 그들은 수많은 격전을 통해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적을 압박할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체득했던 것이다.
단순히 대열이 무너진 것이 아닌, 처절한 압살(壓殺).
그렇게 공화군의 일차 저지선이었던 궁수들은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공화의 이차 저지선인 중무장 보병대도 마찬가지였다.
공화의 중무장 보병대가 거대한 방패를 들고 흑사자대의 돌파를 차단하려 했지만, 흑사자대는 거대한 몸집과 가속을 살려 방패의 벽을 그대로 부숴 버렸다.
그리곤 백병전에 약하다는 상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말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주위의 보병들을 그대로 짓이겼다.8)

―돌파와 근접전 모두가 최상인, 전천후의 특수부대.

그게 바로 흑사자대였던 것이다.
게다가 소브리우스는 이러한 흑사자대의 활약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이 과감하고 용맹하게 공화군의 저지선을 뚫고 요새로 난입하자, 뒤이어 소브리우스가 이끄는 제7요새 소속의 중무장 보병들이 난입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바탕 큰 태풍에 휩쓸린 듯 진형이 어수선해진 공화의 병사들을 공격하는 한편, 내부 사정에 밝은 이점을 십분 살려 요새의 요소요소를 신속하게 점거했다. 마치 마른 벌판에 불길이 번지듯 빠르면서도 강렬하게.
푸른 깃발이 나부끼던 제7요새.
제7요새는 서쪽에서부터 점차 붉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제국의 붉은 깃발, 거기에 공화군 병사들이 흘린 붉은 피가 더해짐으로써.

* * *

“제길! 지금 대체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칸세르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막막했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망루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광경, 검은 사신들이 벌이는 일방적인 학살을 바라보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역시 저놈들은 그 이름처럼 정말 사신들이란 말인가?”
문득 그의 입에서 낮고 복잡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말대로였다. 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제국의 저승사자들은 전투라는 말이 무색하게 일방적으로 아군의 장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아무리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해도, 아무리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도, 놈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살인 기계들이었다.
아니, 놈들은 그런 저항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욱 살의를 번뜩이며 주위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과연 레오니스 님의 말대로다. 저런 지독한 놈들과는 정면 승부를 벌여서는 절대 승산이 없다. 놈들을 잡기 위해서는 몇 겹의 함정으로 몰아넣어 자멸시키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그제야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 레오니스가 그토록 신신당부를 했는지를. 어째서 레오니스가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요새를 포기하고 도망치라고 했는지를.
그것은 단순히 부하들의 목숨을 아껴서만이 아니었다.
레오니스는 자신마저 없는 상황에서 적과 승부를 벌여서는 조금의 승산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요새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도망칠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저 주어진 명령에만 충실하면 되는 일반 병사라면 모르겠지만, 일군(一軍)의 지휘를 맡고 있는 이상 그에게는 끝까지 주어진 책임을 다할 의무가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재차 입술을 깨물며 비장하게 말했다.
“전군, 지금부터 레오니스 님의 명대로 요새는 포기한다. 이제부터 내가 직접 결사대를 지휘하겠다. 내가 시간을 끄는 사이, 모든 병사들은 적과 맞설 생각 따윈 하지 말고 오직 자신의 소중한 목숨만을 생각하라.”

―Etiam, mei dominus!
그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이백여 명의 정예 병사들, 이미 각오를 한 결사대원들이 오른손을 허공으로 곧게 뻗으며 큰 소리로 복명했다.
‘제국의 개들! 공화(共和)가 무엇인지 그 기개(氣槪)를 보여 주겠다!’
몸을 돌리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망루 아래의 어느 한곳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죽음의 중심, 적의 대장으로 보이는 붉은 가면을 쓴 사신이 있었다.

* * *

카시우스는 냉정했다.
흑사자대의 중심에서 일방적인 학살을 지휘하면서도, 제일 선두에서 승리의 달콤함을 제일 먼저 맛보기 직전에도,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그저 냉정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후방의 안전한 곳에 가만히 앉아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냉정함을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한편으론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훗날 군단이 거대해지고 대전(大戰)을 펼칠 때는 그도 어쩔 수 없이 후방에서 군의 지휘에만 충실했지만, 적어도 이때까지의 그는 항상 선두에서 몸소 장졸들을 이끄는 실전형의 지휘관이었다.
한마디로 얼음 같은 차가운 냉정함. 그런 그의 얼음에 균열이 간 것은 요새에 진입하고 대략 십여 분이 지난 후, 백여 명의 소규모 친위대를 이끌고 한창 선두에서 적진을 돌파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앞서 밝혔듯이 제7요새는 그 거대함과 복잡함으로 유명했다.
따라서 카시우스는 자신이 직접 일군을 이끌고 서문에서 동문으로 요새를 가로지르는 한편, 나머지 장졸들은 각 백인대별로 흩어져 요새를 헤집고 다니도록 했다.
즉, 위에서 보면 그와 친위대가 서쪽에서부터 요새를 횡으로 쪼개듯 돌파하고, 다른 흑사자대원들이 부챗살처럼 퍼져 나가며 요새를 제압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적의 주력은 대부분 요새의 반대편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아군에게 쉽게 성문을 허용한 대신 상대적으로 퇴각이 유리한 장점이 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더 적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르게, 적이 정신을 차리고 퇴각을 하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요새의 동쪽을 제압해야 한다.’
그가 요새의 돌파를 서두른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단지 빼앗겼던 요새를 탈환한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지금껏 억눌린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중앙으로 소환됐을 때 조금이라도 더 면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반드시 한 명의 적이라도 더 죽이고 타격을 입혀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말을 재촉했다.
오른손에는 창을 들고 왼손으론 고삐를 잡은 채, 그는 몸을 바싹 낮추고 발로는 연신 말의 옆구리를 찼다.
물론 요새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시야를 가렸지만, 비명과 고함이 귀청을 찢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조금의 흔들림이 없는 여유로운 기마술을 자랑하며 돌진했다.
신속(迅速).
신속하기 그지없는 돌파였다.
그를 중심으로 좌우로 날개처럼 펼쳐져 뒤를 따르는 친위대도 마찬가지였다.
좌측의 셉티무스를 비롯한 병사들 또한 과연 흑사자대에서도 고르고 고른 최정예들다웠다.
그들은 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거친 숨소리 하나 내지 않으며 흡사 유령처럼 상대를 덮쳐 갔다.
그런데 그들의 질주가 한창 절정에 달했을 무렵,
“물러서지 마라! 저놈들도 기껏해야 뼈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일 뿐이다!”
공화군의 뒤편에서 돌연 분노에 찬 고함이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한줄기 은빛 섬광이 카시우스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적의 원군인가?’
카시우스는 적의 병사를 찌르려던 창을 거두어 급히 가슴을 막았다, 거의 본능적으로.
챙!적이 던진 투창과 그의 창이 공중에서 부딪치며 찰나의 불꽃을 만들었다.
‘제법이군!’
카시우스는 창을 쥔 오른손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무리 창졸간에 기습을 했다고 해도 그의 손이 가볍게 떨리게 만들 정도라면, 보통 완력으로 던진 투창은 아니었던 것이다.
“네놈이 대장인가? 내가 상대해 주마!”
재차 큰 고함이 들리더니, 이어서 공화군의 푸른 군복을 입은 기병 장교 하나가 매서운 살기를 내뿜으며 그를 향해 달려왔다.
그때까지는 카시우스의 냉정함에 전혀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흔들린 것은 그다음, 적의 대장으로 보이는 그 기병이 자신을 향해 돌진하며 주위의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외친 명령 때문이었다.
“적에게 절대 더 이상의 돌파를 허용하지 마라! 우리가 누굴 따르는지를 잊지 마라! 우리는 레오니스 님을 따르는 전사들!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지언정 결코 레오니스 님의 이름에 먹칠을 해서는 안 된다!”
고전하고 있는 공화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외침이었다.
그러나 카시우스에게는 레오니스라는 이름, 그 자체만으로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레오니스! 역시 그가 이곳에 있었던 것인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멍해지며 가슴이 쿵쾅거렸다.
하마터면 들고 있던 창을 놓칠 정도로 손발이 떨렸고,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실 이미 각오는 하고 있던 바였다.
공화군에 레오니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또한 오늘 아침에 요새를 공격하기 전부터, 그는 레오니스와 마주칠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실제로 그 이름을 들으니 그는 자신의 모든 각오가 속절없이 무너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카시우스의 이상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언제나 뒤에서 그를 따르는 그림자, 셉티무스였다.
“우리 대장님은 겨우 네깟 녀석을 상대해 줄 만큼 한가하진 않다!”
좌측에 있던 셉티무스가 허공에 대고 크게 창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상대를 막아섰다.
“흥! 잔챙이는 흥미없다!”
공화군의 장교 또한 코웃음을 치고 크게 창을 휘두르며 셉티무스에게 맞섰다. 비록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상대가 범상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임을 직감하며.
채챙!말이 끝나기도 전에 둘의 창이 공중에서 두 차례의 요란한 금속성을 만들었다. 그들의 애마는 힘차게 이마를 부딪치며 길게 울음을 터뜨렸고, 또한 찰나의 순간이지만 둘이 내뿜은 살기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상대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제야 카시우스는 레오니스라는 이름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애써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눈앞의 현실로 돌아와 찬찬히 상대를 살폈다.
상대는 군인으로서 한창 전성기에 접어든 삼십대 중반가량의 사내였다. 약 175cm가량의 키에 군살 하나 없는 단단한 근육을 자랑했는데, 다만 매부리코에 눈매가 날카로워 약간은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그의 이름은 칸세르.
그러나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에 선 카시우스에게 있어 상대의 이름 따위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말을 들어 보니 이곳의 장졸들은 하나같이 레오니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나 보군. 하긴, 그는 예전부터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으니…….’
카시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머금는 한편, 셉티무스와 칸세르의 대결을 유심히 관찰했다.
용호상박(龍虎相搏).
두 마리의 군마가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리기 위해 중앙에서 연신 머리를 부딪치고 있는 가운데, 셉티무스와 칸세르의 대결은 한마디로 용호상박이었다.
비록 장창이라는 동일한 무기를 사용했지만, 일단 둘의 기본적인 움직임은 정반대의 양상이었다.
셉티무스가 수많은 실전으로 단련된 거친 몸놀림을 보이는 반면, 칸세르는 체계적인 무예 훈련을 받은 듯 정교하고 세련된 몸놀림을 보였다.
공격하는 방식 또한 셉티무스가 요소요소 적의 급소만을 노렸다면, 칸세르는 차분히 허점을 공략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다만 한 가지,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굳은 각오와 으르렁거리는 듯한 매서운 살기는 동일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