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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14화)
‘꽤 흥미로운 대결이군. 셉티무스를 상대로 실전에서 저렇게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는 상대가 있을 줄이야.’
카시우스는 왼손을 들어 다른 병사들이 둘의 대결에 끼어드는 것을 제지했다. 대신 그는 팔짱을 낀 채 실로 오랜만에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둘의 대결을 지켜봤다.
만약 평소의 카시우스였다면 이런 일대일 대결은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대일 대결은 무사들이나 하는 짓이고, 자신은 무사가 아니라 군인이라고 믿는 그였으니까. 아마 평소의 그였다면 진작 몇 명의 병사들을 투입해 상대를 제압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레오니스를 신앙처럼 받드는 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게다가 둘의 대결이 워낙 막상막하였기 때문에, 카시우스는 실로 오랜만에 가만히 팔짱을 끼고 둘만의 대결을 허용했다.
둘의 대결에 끼어들지 않는 것은 공화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전황이나 주변의 분위기는 이미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섣불리 덤벼들었다간 무지막지하게 부딪쳐 올 흑사자대의 대응이 두려웠다.
또한 그들은 다른 병사들이 탈출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고 버텨야만 했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오히려 이렇게 시간을 끌어 주는 게 고마운 일이었다.
이런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덕분에 둘의 결투는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연신 거친 울음을 토해 내며 머리를 부딪치는 두 마리의 군마, 부웅 하고 허공을 가르며 수십 번이나 짧은 불꽃을 토해 내는 두 개의 창, 그리고 기합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두 명의 장수는 보는 이로 하여금 넋을 잃을 정도의 명승부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렇게 대략 십여 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콰쾅!요새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귀청을 찢는 벼락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큰 폭발음과 함께 곳곳에서 동시에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시커먼 연기가 순식간에 요새를 뒤덮어 시야를 가렸고, 인화성 물질이 불에 타는 특유의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칸세르의 결사대 중 일부가 행한 공작, 요새의 주요 시설과 창고에 불을 붙인 것이다.
곧이어 삐이익― 하는 시끄러운 호각 소리와 함께,
“불이다! 불을 꺼라!”
“각 부대는 속히 진화 작업에 집중하라!”
사방에서 터져 나온 장교들의 고함 소리, 이에 호응하는 병사들의 외침이 가뜩이나 소란스런 요새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저놈들! 후퇴할 시간을 벌기 위해 불을 지른 건가?’
카시우스는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 속으로 쓰게 웃었다.
셉티무스와 칸세르의 대결은 쉽게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위험한 순간이 연출되고 치열하게 전개됐지만, 땀으로 범벅이 되어 사람과 말 모두 호흡이 거칠어진 지도 오래됐지만, 둘에게는 각자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절박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카시우스 님 앞에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일 수 없다!―설사 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레오니스 님의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다!
각자 이런 각오로 싸움에 임했던 탓에, 둘의 대결은 치열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결국 싸움을 중단시킨 것은 카시우스였다.
재차 둘의 창이 허공에서 불꽃을 만들어 내려는 찰나,
쐐애애액!어디선가 돌연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한 줄기 은빛 빛살이 직선으로 쏘아져 두 창의 교차 지점을 정확히 꿰뚫었다.
챙!창의 교차점을 정확히 튕겨 낸 빛줄기. 그것은 놀랍게도 흑사자대가 사용하는 작은 투창이었다.
‘뭐야?’
‘누구지?’
놀란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투창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손아귀가 저려 하마터면 창을 놓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창이 날아온 방향, 약 15m쯤 떨어진 곳에서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는 붉은 가면이 보였다.
카시우스가 특유의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그만하면 됐다. 셉티무스도 그 정도면 잘했고, 네 녀석도 이 정도면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이지?”
칸세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기가 눌리지 않게 큰 소리로 말했다.
“말 그대로다. 어차피 네 녀석의 목적은 우리의 앞을 막는 한편, 요새의 주요 시설에 불을 질러 병사들이 요새를 탈출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버는 게 아니었나? 그러니 목적을 달성했으면 조용히 물러서라는 뜻이다.”
여전히 차갑게 내뱉는 카시우스.
‘……!’
칸세르는 내심 뜨끔한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상대를 노려봤다.
당황스럽기는 셉티무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는 아군이 유리한 분위기에서도 상대를 이기지 못한 탓에, 처음보다 더욱 살기에 찬 눈으로 칸세르를 노려봤다.
만약 카시우스가 직접 창을 던져 중단시킨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는 분에 못 이겨 더욱 길길이 날뛰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시 한 차례 길게 숨을 들이마신 뒤, 카시우스의 말은 계속되었다.
“오늘은 특별히 보내 주겠다. 돌아가서 레오니스에게 전해라. 언제고 전장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이 말을 마지막으로 카시우스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고삐를 잡아채 말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돌린 뒤,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명령했다. 마치 칸세르와 공화군의 병사들은 더 이상 안중에 없는 것처럼.
“아무리 요새를 탈환해도 그 안의 물자를 모두 잃어버린다면 요새는 무용지물이다! 전군은 지금부터 적의 척살보다 요새의 진화 작업을 우선한다! 특히 식량고와 무기고의 진화 작업에 힘쓸 것이며, 부상자의 구호에도 각별히 주의하라!”
―Etiam, mei dominus!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복명하는 흑사자대.
셉티무스 또한 아쉬운 듯 몇 번이나 칸세르를 노려봤지만, 곧 다른 병사들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말 머리를 돌렸다.
바람 같았다. 흑사자대는 진격을 할 때도 바람 같았지만, 대장의 명을 받들어 물러서는 것 또한 바람 같았다.
그제야 칸세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가 멀어지는 카시우스의 등 뒤에 대고 큰 소리로 물었다. 비록 위압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이긴 했지만.
그 순간, 카시우스의 말이 한순간 멈칫했다. 마치 얼음에 균열이 간 것처럼 망설이는 느낌으로.
그러나 그는 이내 본래의 차가움을 되찾은 듯, 다시 말을 재촉해 다른 병사들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내 이름은 카시우스! 카시우스 넥스 안겔루스!”
그게 칸세르가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카시우스와 병사들은 급히 말을 몰아 식량고가 있는 북쪽으로 내달렸다.
그때, 멀어지는 카시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칸세르는 생각했다.
‘카시우스? 설마 그 안겔루스 가문의 마지막 후예인가?’
그제야 그는 희미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 카시우스가 순순히 자신과 셉티무스의 일대일 대결을 허락했는지를. 어째서 카시우스가 몇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를 공격하지 않았으며, 어째서 지금 자신들을 순순히 보내 주는 것인지를.
그렇게 제7요새 공방전은 끝이 났다.
6
후세의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그것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이었다고.
아니, 승패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그래도 굳이 승자를 꼽자면 양측 모두 승자였다고.
제국력 623년에 벌어진 아조루스 공방전.
일단 공식적인 승자는 공화 측이었다. 그들은 전력이 열세라는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제국의 군단을 거의 전멸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이 승리를 계기로 공화는 주변의 다른 지역을 흡수하여 그 세를 더욱 확장했으며, 또한 지금까지 제국의 위명에 눌려 눈치만 보고 있던 다른 세력들의 봉기를 촉발시켰다.
그야말로 본격적인 난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공식적으로는 패자였지만 그렇다고 제국 또한 전혀 성과가 없던 건 아니었다.
카시우스 넥스 안겔루스!패배의 와중에서도 제국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별.
그는 패배의 와중에서도 매복해 있는 적의 추격대를 전멸시켰다.
적에게 빼앗긴 아군의 요새를 탈환했으며, 제국은 이로 인해 적어도 아조루스 북쪽으로는 영향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제국의 매, 카시우스 넥스 안겔루스!
그가 마침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만드는 난세(亂世)의 역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제5장 영웅 귀환
1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당신은 왜 제국을 떠나지 않는가? 가문은 이미 멸문의 화를 당했다. 그리고 본인이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보여도 결국엔 신분의 굴레로 인해 그 날개를 활짝 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대체 무슨 미련이 남아 제국을 떠나지 못하는가?
나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늘 이런 질문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난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황. 여황이 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난 제국이 좋아서 충성하는 게 아닙니다. 알량한 정의를 위해 충성하는 것도 아니며, 거대한 야망이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여황 폐하를 위해…… 난 그저 여황 폐하를 위해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대답이었다.
당연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그리고 모두를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일단 현실적으로 달리 도망칠 곳이 없었다. 아무리 힘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제국은 그래도 제국이었다.
아무리 남부의 공화, 동부와 서부의 이민족들, 그리고 그 외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야심가들이 지방에 할거(割據)하고 있다지만, 아직까지는 제국의 힘이 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다만 내부적인 여러 복잡한 요인들로 인해 그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있을 뿐, 만약 내부의 문제점들만 해결된다면 그들 반란 세력은 곧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내가 꿈꾸는 이상(理想)과는 거리가 다소 있었다.
미래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난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제국의 힘을 회복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기존에 반기를 다른 세력들은 하나같이 내부의 개혁이 아닌, 제국의 붕괴를 통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의 창조를 주장했다. 따라서 난 기존의 반항 세력에 몸을 담을 수 없었다.
또한 내가 여황에게 충성을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제국 외부의 요인 때문만이 아니다.
제국 내부의 여러 요인들 또한 내가 여황에게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나는 적이 많다.
아니, 단순히 적이 많은 정도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셉티무스를 비롯한 흑사자대, 그리고 내 직속상관인 대장군과 일부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모두가 나의 적이다.
하지만 여황을 앞세운 덕분에 난 지금껏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첫째, 대외적으로 날 제거할 수 있는 명분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다. 아무리 권력을 쥐고 있는 장미의 동맹이라도 날 제거하기 위해서는 뭔가 명분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여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이상, 아무리 장미의 동맹이라도 섣불리 날 제거할 수는 없었다.
둘째, 아직까지 일부 남아 있는 중도적인 여황 지지파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 비록 군사적인 영향력을 대부분 잃긴 했지만, 대장군을 비롯한 중립적인 여황의 지지파들도 아직까지 상당수 남아 있었다.
게다가 안겔루스 가문은 여황을 위한 개혁을 부르짖다가 멸문을 당했던 바, 따라서 난 여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여황의 기사 카시우스!이것이 내가 제국과 여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