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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15화)


2

‘장미’가 말했다.

―난세는 영웅을 필요로 한다!

* * *

그곳은 아름다웠다.
활짝 핀 흰색의 장미꽃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한 넓은 정원, 그곳은 구름 한 점 없는 정오의 푸른 하늘과 어울려 아름답고 신비로운 느낌마저 주었다. 장미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난방을 위한 거대한 화로만이 간간이 눈에 보일 뿐, 바둑판처럼 네모반듯하게 길이 정리된 정원에는 오직 흰색의 장미만이 가득했다.
본래 장미꽃은 오뉴월에 여러 빛깔의 고운 꽃을 피우는 장미과의 낙엽 관목이다.
그러나 이 정원은 지하에 뜨거운 물을 흘려보내는 특수 시설을 설치한 덕분에, 그리고 정원 곳곳에 화로를 비롯한 특수 시설들을 설치한 덕분에, 늦가을에 접어든 지금도 흰색의 장미가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정원의 한가운데.
장미처럼 눈부신 순백의 튜니카(Tunica)9)를 입은 중년인이 전정용 가위를 손에 든 채 장미를 돌보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오십 정도. 전형적인 학자풍의 점잖게 생긴 인상이었는데, 장미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듯 입가에 흐뭇한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세상에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하얀색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처럼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까지 장미를 좋아하고, 특히나 하얀색의 장미에 약간은 병적까지 집착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흰 장미를 상징으로 하는 신흥 문벌 귀족 비르고스 가문.
구 귀족인 제미니우스 일족과 함께 제국의 권력을 양분하고 있으며, 부(富)와 명예가 현재의 꼭두각시 여황을 능가한다는 말까지 있는 일족이다.
그리고 그 비르고스 일족에서도 집정관[Consul]의 직위에 올라 가장 정점에 선 자, 나시카 솔 비르고스(Nasica Sol Virgos)가 바로 그였다.
그는 흰 장미가 좋았다. 자신의 일족의 상징이 흰 장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는 흰 장미 그 자체를 좋아했다.
화려하면서도 순수하고, 가시 돋친 듯 날카로우면서도 우아한 그 자태 때문에 그는 흰 장미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에게 있어 흰 장미는 바쁜 정무(政務)와 지루한 일상의 도피처이자 위안이었고, 때로는 자식보다 더한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그는 누군가 자신의 성역인 정원에 함부로 들어왔을 때, 그리고 그 누군가가 골치 아픈 업무 얘기를 늘어놓았을 때, 그는 겉으로는 담담히 웃었지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만약 그가 자신의 체면과 상대가 가져온 화제(話題)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았더라면, 그 누군가는 아마 정원에 함부로 침입한 것만으로도 그의 경호원들에게 끌려가 상당히 힘든 일을 겪었을 것이다.
티투스 리브리우스(Titus Librius).
그의 성역에 함부로 침입한 자의 이름이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평민 출신이지만 상당히 영리하여 벌써 십여 년째 그의 아래에서 문객(門客) 겸 참모로 일하고 있는 자.
그가 거느린 수많은 참모들 가운데서도 모략(謀略)에 있어서 가장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그도 티투스의 무례를 눈감아 줄 수밖에 없었다.
티투스는 같은 하얀색의 튜니카를 걸치고 있었지만, 주인인 나시카와는 정반대의 외모와 이미지를 가진 자였다.
나시카가 적당한 키와 체형을 가진 전형적인 학자풍의 외형이라면, 티투스는 키가 크지만 비쩍 마르고 날카로운 외형의 소유자였다.
일단 나이는 나시카보다 정확히 열 살이 어린 마흔.
그러나 눈가에 주름이 많고 머리카락은 새치가 무성해 언뜻 보기엔 나시카와 동년배로 보였다.
코는 매부리처럼 너무 높고 반면 눈은 옆으로 길게 찢어져서 신경질적인 인상이었으며, 얇은 입술은 뱀처럼 차가운 분위기마저 풍겼다.
나시카와 티투스는 비단 외형만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사생활도 정반대로 대조적이었다.
나시카가 가정적이고 두 명의 딸을 두고 있는 데 반해, 티투스는 독신을 고집하며 그 나이까지 가정을 이루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따로 애인을 만나거나 자유분방하게 독신을 즐기는 것도 아니어서, 참모들 사이에서는 티투스가 어쩌면 남자 구실을 못하는 불구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렇게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두 사람이었지만 일에 있어서만은 그 누구보다 호흡이 잘 맞았다.
나시카에게는 티투스의 교활하기까지 한 모략이 필요했고, 티투스에게는 자신의 모략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나시카의 권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십 년 넘게 원만하게 유지될 수 있었고, 또 지금도 이렇게 장미의 정원에서 긴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티투스는 나시카의 뒤에 공손히 시립한 채 잠시 장미를 다듬는 주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나시카는 자신의 유일한 안식을 방해받은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아니면 장미를 다듬는 것에 너무도 열중한 것이었는지, 시종을 통해 그가 왔음을 전해 듣고도 한참 동안이나 아무런 말이 없이 장미만 손질하고 있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보다 성격이 급한 티투스였다.
“어젯밤 붉은 장미와 비밀 회동을 가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어딘가 상기되고 놀란 듯한 표정과 말투.
물론 여기서 말한 붉은 장미는 실제 장미꽃이 아닌, 붉은 장미를 상징으로 삼는 구 귀족 출신의 제미니우스 일족이었다.
그제야 나시카는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남의 얘기라도 하듯이 담담하게.
“자네, 이 말 아는가? 난세는 영웅을 원한다. 상당히 그럴듯한 말이야. 어떻게 보면 지금 제국의 상황이 바로 난세이지 않은가? 그 무엇보다 영웅이 간절히 필요한 난세.”
언뜻 생각하기엔 약간은 엉뚱한 대답.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을 눈치채지 못할 티투스가 아니었다.
“얼마 전 남부 아조루스에서 당한 뜻밖의 패배는 충분히 제국에 위협적입니다. 자칭 ‘공화’라는 반군은 이 승리를 발판으로 삼아 더욱 힘을 얻을 것이고, 지금껏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나겠지요. 게다가 패배에 대한 비관적인 여론, 군장병들의 저하된 사기 등을 고려해 보아도 어떤 해결책이 필요하긴 합니다.”
나시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네. 그 해결책이 바로 ‘영웅’이라는 것이야. 본래 대중은 무지하고 몽매하지. 그들은 만들어 낸 거짓과 다수의 여론에 휩쓸리기를 좋아하고, 얇은 냄비와 같아서 조그만 자극에도 쉽게 끓어오르지. 따라서 지금 같은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누군가 영웅이 짠! 하고 나타나면, 대중은 언제 그랬냐는 듯 위기를 잊고 희망에 열광하게 되겠지. 실제로 현실이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야. 후후후!”
잠시 뜸을 들인 뒤, 나시카의 말은 계속됐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네.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고. 뭐, 틀린 얘기는 아니지. 제국의 시조인 베리타시우스 1세만 보더라도 그가 이룬 위대한 업적들은 결코 하늘이 도왔다는 말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영웅은 하늘이 내리는 것도 있는 반면,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이네. 게다가 그 대상이 젊고, 잘생기고, 천재라 불릴 정도로 일신의 능력 또한 뛰어나며, 드넓은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귀족 출신인 동시에,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혹독한 시련을 겪고 성공을 거둔 사람이라면 영웅을 만들기는 한결 쉬울 테지.”
“드라마틱한 극적인 요소를 지닌 대상, 그가 바로 카시우스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그깟 거짓 영웅 하나쯤 만들어 내는 거야 쉬운 일 아닌가. 여론 조작을 통한 거짓 선전, 입소문을 통한 우상화와 신비화, 그리고 대규모의 물량 공세면 냄비 같은 대중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것쯤은 간단하지. 어차피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론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정확히 규명할 능력이 없고, 또 정확히 규명할 의지도 없으니까.”
다시 잠깐 숨을 몰아쉰 뒤, 나시카는 여전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장미만 손질하는 가운데 말을 계속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미의 동맹’이 가지는 의미였다.
십여 년 전 지금의 여황을 옹립하기 위해 흰 장미의 비르고스 가문과 붉은 장미의 제미니우스 가문이 처음 회동을 가진 이후, 이들 두 일족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
그것이 지금 나시카의 입에서 나온 ‘장미의 동맹’이라는 것이었고, 두 일족의 권력이 절정에 이른 지금에 이르러서는 여기서 나온 결정이 곧 제국 전체의 결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르고스 일족과 제미니우스 일족의 협력이 영원할 리는 없었다. 다만 지금은 두 일족의 힘이 너무도 팽팽해서 어느 한쪽이 쉽게 우세를 점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그들은 서로의 세력이 뭔가 변화가 생기기만을 기다리며 일시적이고 필요에 의한 협력을 지금까지 지속했던 것이다.
적과의 동침.
‘장미의 동맹’을 한마디로 쉽게 설명하자면, ‘필요에 의한 적과의 불편한 동거’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티투스가 이 자리에 온 것도 바로 이 ‘영웅’ 때문이었다. 다시 티투스가 특유의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러한 패배감을 씻는 데에 가짜 영웅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우려하는 것은 그 영웅으로 만들 대상입니다. 제가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꼭두각시로 카시우스를 내세우는 것은 너무도 위험합니다! 저는…….”
이에 나시카는 그의 말허리를 자르고 약간은 장난스런 어투로 대답했다.
“자네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지. ‘카시우스는 발톱을 감춘 사자요, 날개를 접은 매입니다. 그러니 놈이 아직 힘을 갖추지 못했을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해야 합니다. 만약 지금 놈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언제고 우리가 크게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지금도 이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렇습니다. 누차 말씀드렸듯이, 놈을 절대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비록 지금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만, 놈은 생각보다 훨씬 영리하고 영악합니다. 놈은 절대 우리의 꼭두각시로 남을 인물이 아닙니다!”
티투스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시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엷은 웃음기마저 머금고 느긋하게 말했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들려줄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 티투스. 하지만 나시카는 시치미를 떼고 언뜻 별다른 상관이 없어 보이는 말을 계속했다.
“대부분의 정치 초년생들은 처음에는 거대한 꿈과 이상을 갖고 정치에 입문하네. ‘나는 기존의 썩은 정치가들과 다르다! 나는 청렴결백하고 한 점의 부끄럼이 없이 정치를 할 것이며, 이 한 몸 바쳐 조국과 민족의 중흥에 이바지할 것이다!’ 뭐, 대충 이런 거창한 각오를 하고 정치판에 들어오지. 실제로 그들은 대부분 학창 시절부터 수재라는 칭송을 받았던 대단한 인재들이고, 그들의 능력과 명성, 그리고 평소 제시하는 미래의 청사진만 보면 그런 정치적 이상을 현실에 옮길 수 있을 것만 같네.”
“…….”
“하지만 왜일까? 왜 그들의 대부분은 막상 정치판에 등장해 권력만 잡게 되면 타락하는 걸까? 왜 그들은 처음의 신념과 이상은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 잊고, 평소 자신들이 욕했던 기존의 정치가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변질되는 걸까? 정말 재밌는 현상이지 않은가? 하하하!”
나시카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어떻게 보면 방금 그가 한 말은 자기 자신을 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지방의 문인(文人)으로 청운의 꿈을 안고 선대 황제에게 등용되었을 때, 황제에게서 구 귀족들이 독점하고 있는 썩은 권력자들을 제거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그는 기꺼이 제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제국의 중흥이야말로 하늘이 자신에게 내린 역사적 사명이라 생각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이런 의지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국 지금의 그는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구 귀족들과 같은 권력을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