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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16화)


그들이 영유하던 사치와 향락을 함께 즐기고 있고, 오히려 그들과 권력을 양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홀로 권력을 독점할 야심마저 갖고 있다.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정말 재미있어서 웃는 것인지, 아니면 자괴감으로 인해 허탈해서 웃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향해 웃는 것인지, 카시우스를 향해 웃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도 청운의 꿈을 안고 도전하고 있는 수많은 젊은 정치가들을 향해 웃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나시카는 장미를 다듬던 손길을 멈추고 한참 동안이나 크게 소리 내어 웃을 뿐이었다.
나시카는 그렇게 한참을 크게 웃다가, 어느 순간 돌연 거짓말처럼 웃음을 뚝 그치고는 다시 느릿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지, 정치가들은 일단 권력을 잡으면 하나같이 모두 그 권력을 타락시킨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네. 정치가들이 권력을 타락시키는 게 아니야. 오히려 권력은 늘 한결같지. 타락하는 것은 정치가, 즉 반대로 권력이 정치가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네.
“…….”
“이제 알겠나, 내가 왜 카시우스에 대해 그토록 자신만만했는지. 제아무리 대단한 카시우스라도 이런 권력과의 싸움에서는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네. 아니, 능력이 대단하고 야심이 크면 클수록 그는 더욱 권력에게 크나큰 패배를 겪을 것이네. 물론 만에 하나라도 그가 정말로 권력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는 초대 영웅 황제의 뒤를 이은 진정한 시대의 영웅이 될 터. 만약 그가 하늘과 시대가 내린 진정한 영웅이라면, 나 같은 한낱 미약한 인간은 그를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그러면서 나시카는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누구를 향해, 어떤 이유로 인해 웃는 것인지는 불분명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뭔가 즐거운 일이 있는 것처럼 크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티투스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시카 님은 정말 이 세상에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자는 없다고 생각해서 카시우스의 성장을 그대로 방치하신 걸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나시카 님은 누군가가 자신을 무너뜨리고 시대의 변혁을 주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카시우스의 성장을 그대로 방치하신 게 아닐까?’
그는 헷갈렸다. 주인이자 상관인 나시카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여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티투스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나시카의 장기적인 의도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주인의 장기적인 의도는 나중에 생각해 볼 문제이고, 당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그가 잠재적 위협 요소로 주목하고 있는 카시우스의 약점을 잡아내는 것이었다.
티투스는 주인의 웃음이 옅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르신의 뜻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카시우스를 위해 한 가지 화려한 쇼를 연출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쇼? 그의 개선식에서 뭔가 특별한 사건을 벌이자는 건가?”
나시카는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장미만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습니다. ‘정치란 대중을 관객으로 하는 일종의 쇼에 불과하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왕 카시우스를 영웅으로 내세우기로 했다면, 그를 위해 특별한 쇼를 연출하는 겁니다. 어차피 대중 또한 극적인 요소에 더욱 열광하는 경향이 있으니, 잘만 하면 그를 전 국민적인 영웅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이 있나?”
이에 티투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다가 잠시 후, 상대의 호기심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에야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말은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때로는 낮고 은밀하게, 때로는 약간의 과장된 몸집으로 상대의 흥미를 돋우며.
그리고 그의 말이 계속될수록 나시카의 입가에도 관심과 흥미가 섞인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말이 모두 끝났을 때, 나시카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개선식이라는 제국 최고의 행사에서 쇼를 벌이자는 건가? 좋아, 아주 좋아! 모든 건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부디 역사에 길이 남을 멋진 연극을 연출해 주기 바라네. 하하하!”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티투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그러나 이때, 다시 장미의 손질에만 열중하던 나시카가 한 가지 보지 못한 게 있었다.
티투스의 빛나는 눈빛이 무슨 의미였는지.
그것은 단순히 뒤에 있을 개선식에서 카시우스를 빛나게 하기 위한 연출만은 아니었다.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질 카시우스와 티투스의 치열한 정치적 암투, 그것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3

“제법 춥군.”
카시우스가 문득 나직이 중얼거렸다, 약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이 정도면 그냥 제법 추운 정도가 아닙니다! 이건 완전히 엄동설한이라고요!’
곁에 있던 셉티무스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쳤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너무나도 태연한 카시우스의 모습을 보니, 그는 차마 속 안의 말을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장갑을 낀 두 손을 습관적으로 비비며, 허연 입김을 길게 뿜어 지금이 얼마나 추운지를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그의 말마따나 춥긴 추웠다. 정오임에도 불구하고 태양이 구름에 가려 사방이 어두침침한 가운데, 회색빛 하늘은 금방이라도 진눈깨비가 쏟아질 듯 을씨년스러웠다.
찬바람은 연신 귀곡성처럼 흐느끼며 주위를 맴돌았고, 동시에 칼날처럼 날카롭게 그들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사방의 초목은 그 생명력을 잃고 누렇게 말라 비틀어져 있었으며, 보이는 것이라곤 그저 회색의 메마른 황무지가 전부였다.
삭막한 초겨울의 전형적인 모습.
‘젠장! 역시 춥군! 이래서 겨울에 행군하는 건 질색이라니까!’
셉티무스는 두툼한 검은색 겨울 외투를 바싹 잡아당기며 재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옥 같던 아조루스를 떠난 지 불과 보름. 그러나 북쪽으로 계속 올라와서인지, 아니면 그사이 기온이 많이 떨어지고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됐기 때문인지, 어쨌거나 날씨는 어지간해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춥고 사나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쉬어야 될 것 같군.’
셉티무스는 가볍게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 대열의 선두를 이끌고 있는 카시우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곤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장님! 날씨가 추운 탓에 병사들이 조금 일찍 지친 것 같습니다. 저희야 이런 날씨는 이제 이골이 날 정도로 겪어 봤지만, 부상을 입은 다른 병사들은 꽤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이 말과 함께 그는 힐끔 곁눈질로 대열의 후미를 둘러봤다.
그의 말대로였다. 흑사자대원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 망토로 몸을 두른 채, 그리고 검은 머플러로 코 아래부터 목까지 칭칭 동여맨 채,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대열을 따르고 있었다.
안전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팽팽한 긴장감도 그대로였으며, 날카로운 안광은 오히려 추운 날씨 탓에 더욱 독기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대열의 중앙에 있는 일반 병사들, 본래 페디토르의 예하에서 전투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달랐다.
비록 흑사자대원들보다 더욱 두툼한 붉은 외투와 붉은 목도리를 걸쳤지만, 게다가 무거운 짐은 모두 흑사자대원들에 맡기고 가벼운 병장기조차 들지 않았지만, 그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다리를 후들거리며 간신히 대열을 따르고 있었다. 이미 의식마저 희미해진 듯 몽롱한 눈빛을 하고.
“어쩔 수 없군.”
카시우스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가볍게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게 하고, 왼손을 들어 뒤를 따르던 전령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전군 휴식!
뒤에 있던 몇 명의 전령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외쳐 휴식을 전달했다.
“아아! 이제 살았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흐느끼는 듯한 탄성, 털썩하고 땅바닥에 주저앉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너무 힘들어서 탄성 외에는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욕이나 불평을 하려고 해도 할 힘이 없었다.
병사들은 그저 서로에게 바싹 다가가 체온으로 몸을 녹이며, 바싹 말라비틀어진 전투식량을 꺼내 허겁지겁 허기를 채울 따름이었다.
단, 그렇게 쓰러지듯 주저앉은 것은 일반 정규군 출신의 병사들뿐, 흑사자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각 백인대를 중심으로 호위하듯 그들을 감싸고 휴식을 취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오직 단 한 사람, 카시우스만은 휴식에서 예외였다.
그는 여전히 말에 앉아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주위를 살폈다.
비록 바람이 너무도 거센 탓에 두 손으로 검은 망토를 단단히 여미긴 했지만, 이 정도 추위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덤덤한 얼굴로…….
그는 생각했다.
‘드디어 도착이다! 이번에는 특히 힘들었던 퇴각이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저 멀리 북쪽 지평선 너머,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너머로 고정됐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수도 베리타스의 남쪽에 위치한 대로(大路).
앞으로 반나절만 더 행군하면 드디어 고대하던 집에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사형수 출신인 그들을 반겨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조루스에서의 대패에 따른 문책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집이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나 정말 특별한 것이었다.
특히나 베리타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카시우스에게는, 게다가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영원히 그곳을 맴돌 수밖에 없는 카시우스에게는, 수도인 베리타스가 더더욱 특별했다.
‘루시아!’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떠올렸다.
그는 언제나 아니라고 했다. 자신은 얼음이며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 부정을 해 봐도 그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을 본인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억지로 냉정한 척 스스로를 기만했을지도 몰랐다.
루시아(Luxia) 스페스 베리타리시우스!그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그녀.
그가 그녀를 본 것은 언제인지 기억조차 희미한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부친을 따라 우연히 들어간 황궁,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녀를 본 것이다.
사실 그렇게 예쁜 외모는 아니었다. 흰 피부가 인상적이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제국의 황녀답게 수십 명의 시종들을 거느리고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외모나 체형은 그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금 예쁘장한 여자아이에 불과했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그의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는 본인도 모를 일이었다.
제국의 황녀라는 신분?
천만에. 그는 처음에 그녀가 황족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게다가 당시에는 그 또한 황제마저 인정하는 최고의 명문 귀족이었기 때문에, 설사 황족임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그 눈 때문이었나?’
그는 문득 그녀의 눈을 떠올렸다.
갈색의 깊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녀의 눈.
호화로움의 극치인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모든 것을 갖춘 그녀가 대체 왜 슬퍼 보였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녀의 슬픔은 지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슬픔은 더욱 커지는 듯했다.
호위들에게 둘러싸인 그녀의 모습을 가끔 멀리서 볼 때마다, 그녀의 눈은 점점 더 슬픔에 잠기는 것만 같았다.
그가 여황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다한 것, 스스로 ‘여황의 기사’임을 자처했던 것은 어쩌면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물론 가문이 멸문의 화를 당한 마당에, 게다가 그를 견제하는 적들이 사방에 널린 상황에서,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보이는 것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