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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17화)


하지만 어쩌면 그는 단순히 그런 이성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슬픔이라는 감성적인 이유로 인해 오히려 절대적인 충성을 보인 것인지도 몰랐다.
그의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저건 뭐지? 아군인가?”
저 멀리 북쪽, 베리타스가 위치한 지평선 너머에서 뿌연 흙먼지가 일어났던 것이다. 지축을 울리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동반하고.
셉티무스가 그에게 말을 몰고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
“대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카시우스는 대답 대신 팔짱을 낀 채로 잠시 저 멀리 지평선을 응시했다.
과연 저들의 의도가 호의(好意)일지, 아니면 적의(敵意)일지는 그도 판단하기 애매했다.
일단 그들은 퇴각하는 과정에서 크나큰 공을 세웠다.
매복해 있는 적의 추격대를 전멸시켰고, 빼앗겼던 제7요새를 다시 탈환함으로써 패배의 여파가 아조루스 이북까지 번지는 것을 차단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쨌거나 아조루스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친 패잔병들이며, 게다가 그 후퇴 과정에서 상관인 페디토르마저도 전사한 상태였다.
물론 카시우스는 페디토르가 난전 중 장렬히 전사했다고 미리 보고를 한 상태였지만, 귀족 중에서도 이기적이고 겁쟁이로 소문난 페디토르가 장렬히 전사했다는 보고를 과연 상부에서 믿어 줄지는 의문이었다.
결국 카시우스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하나뿐이었다.
“전군 전투준비! 부상자들은 뒤로 물리고, 모든 병사들은 각 백인대별로 전투를 준비하라. 전투 대열은 Novem! 단,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고 대기하라!”


―Etiam, mei dominus!
명을 받은 셉티무스와 전령들이 가벼운 목례와 함께 큰 소리로 복명했다.
여기서 Novem은 숫자 9를 뜻하는 고대어가 아닌, 흑사자대의 약속된 움직임 중 하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중앙이 움푹 들어가고 좌우의 기병들을 앞으로 전진시킨 진형.
그런 뒤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꽃이 봉오리를 닫듯 좌우의 기병들이 빠르게 우회하여 적군 전체를 포위하는 전법이 바로 Novem이었다.
언제나처럼 진형의 중앙은 카시우스의 몫이었다.
그는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위치로 이동하는 것을 확인하며, 자신도 무장을 단단히 했다.
사실 흑사자대의 무장은 일반적인 다른 중기병에 비하면 그다지 무거운 편이 아니었다.
일단 색상은 사신을 떠올리는 검은색. 말은 질긴 가죽을 특수 가공해 급소를 가렸고, 관절처럼 특히 중요한 급소에는 얇은 금속을 덧댔다.
병사의 갑주 또한 기본 바탕은 특수 가공한 가죽에 금속으로 중요 부위를 덧댄 형태였다.
그리고 무기로는 1.8m 길이의 마상용 장창과 60cm가 조금 안 되는 투창 2개, 90cm 길이의 얇은 검, 거기에 등에는 항상 상체를 겨우 가릴 수 있을 작은 방패 하나를 기본적으로 소지했다.
이 모든 장비들의 무게만 해도 대략 약 30kg 정도. 그러나 그들의 애마는 고르고 고른 덩치 큰 준마인 덕분에, 게다가 인마(人馬)가 모두 특수 훈련까지 받은 덕분에 그 기동력을 발휘하기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시간은 오 분이면 충분했다.
카시우스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고 불과 오 분 뒤, 흑사자대는 부상병들을 뒤로 호송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적을 맞이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일반적인 부대였다면 이제 겨우 대장의 명령이 각 병사들에게 전달되고 막 움직일 준비를 시작할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흑사자대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숨을 골랐던 것이다.
두두두두!이윽고 저 멀리서 다가오는 수천 마리 군마의 움직임이 천둥 치듯 점점 더 요란하게 지축을 울렸다.
부우― 하는 긴 뿔나팔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흙먼지는 더욱 높이 솟구쳐 이젠 멀리서도 확연히 보였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지나자, 마침내 지평선 너머로 달려오는 일단의 기병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햇빛을 받아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빛 갑주들.
“아! 설마 저들은……?!”
황금빛을 확인한 순간, 모두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짧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심지어 그 냉정한 카시우스마저도 짧은 신음을 내뱉을 정도였으니.
“저 황금빛 갑주…… 설마 저들이 여황 폐하의 친위대는 아니겠죠?”
잠시 후, 셉티무스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황금 기사단.
온통 금빛으로 두른 제국 제일의 부대.
군에 몸담은 자라면 누구나 부러워 마지않는 제국 제일의 부대.
그들은 바로 여황의 친위대인 황금 기사단이었다.
황금 기사단의 대원들은 누구인지, 그들의 정확한 인원이 몇 명인지, 그들에 관련된 모든 사항은 특급 기밀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각 부대에서 특출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해 선발한다고 하는데, 이마저도 확인된 바가 없는 소문에 불과했다.
다만 그들이 엄선된 부대인만큼 압도적인 전투력을 자랑하고, 오직 여황의 명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게 유일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진 최고, 최강의 부대!
최고 명문 귀족 출신인 카시우스마저도 몇 번 멀리서 스치듯 구경한 게 전부인 그들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모든 장졸들이 놀라 수군거리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모두 진정하라!”
카시우스는 왼손을 들어 병사들을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저들이 왜 이곳으로 오는 것인가? 확실히 우리 부대는 제국의 일반적인 병사들로는 제압하기 힘들다. 만약 그런 이유로 인해 우리를 제압하기 위해 저들이 직접 나선 것이라면?’
생각이 복잡했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게 돌아갔다.
지금 그들이 있는 이곳은 방해될 것이 전혀 없는 넓은 대로.
만약 기병 대 기병으로 전투를 벌인다면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게다가 흑사자대는 먼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저들보다 상대적으로 덜 지친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흑사자대라 해도 그 상대가 여황의 친위대라면 승산은 삼 할 이하였다.
다시 몇 분이 지나자 마침내 그들의 숫자가 확연히 드러났다. 정확한 판단은 어렵지만 대략적으로 계산한 그들의 숫자는 무려 이천.
“으음!”
카시우스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진짜 놀랄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황금 기사단.
그 이름처럼 전신을 번쩍이는 황금빛 갑주로 두르고, 황금빛 면사를 써서 얼굴마저 금빛으로 물들인 그들이 이윽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중앙의 카시우스를 확인함과 동시에, 그들은 돌연 말에서 내려 카시우스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것도 허리는 꼿꼿이 세운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오른손으로는 심장을 치는 최상의 예를 갖추며.

―황금 기사단 제2분대! 카시우스 님과 흑사자대를 영접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들이 마치 한 사람처럼 일제히 큰 소리로 인사했다.
“……?!”
당연히 셉티무스를 비롯한 다른 장졸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우리가 언제 여황의 친위대에게 영접을 받을 만큼 대단한 공적을 세웠나?’
‘정말 우리를 마중 나온 건가? 우릴 연행하러 온 게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장졸들은 모두 이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역시나 왜 이런 인사를 받는 것인지는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하긴, 그 냉철한 카시우스마저도 처음에는 난데없는 상황에 어리둥절해 혼란스러웠으니까.
‘무슨 속셈일까? 천하의 황금 기사단이 허튼소리나 할 리는 없는데……. 게다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보아 다른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도 아닌 것 같고…….’
카시우스는 말이 없었다.
그는 대신 꿰뚫는 듯한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를 살폈다.
가까이에서 본 황금 기사단은 그 기도부터가 일반인과는 달랐다.
일단 화려했다. 용이 승천하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황금빛 갑주, 황금빛 용 문양이 손잡이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장창, 심지어는 화려한 금빛의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말까지…… 그들의 무장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체격 또한 남달랐다. 비록 갑옷으로 가렸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는 근육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약간은 둔하게 보이는 육중한 근육이 아닌, 세밀한 부분까지 골고루 발달한 날렵한 이미지의 근육이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러한 외적인 면이 아니었다. 카시우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심장을 찌르는 듯한 상대의 칼날 같은 눈빛, 죽음마저 초월한 흔들림없는 단호한 눈빛이었다.
그때, 카시우스는 내심 생각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어째서 황금 기사단이 제국 최강의 부대라 불리는지를.
‘이자들은 우리와 같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우리 흑사자대가 신분의 굴레라는 절박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강해진 자들이라면, 이들은 여황이라는 종교에 광적으로 심취해 모든 희로애락을 잊은 광인(狂人)들이다. 고도의 훈련을 통해 육체를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거기에 여황에 대한 광적인 믿음으로 마음마저 극한으로 끌어올린 자들! 광적인 믿음으로 죽음마저 초월한 자들이라면 최강의 칭호를 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카시우스마저도 그들에게는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황금 기사단의 가장 선두에 있던 자, 제2분대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다른 대원들보다도 더욱 인상적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차림새는 다른 병사들과 다를 바가 없었고, 제대로 보이는 것은 면사 위로 드러난 눈 주위뿐이었다.
하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와 날카롭게 위로 올라간 눈매, 그리고 짙게 드리워진 눈썹 등은 그가 절대 물러나지 않는 직선적인 성격의 사내라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말없이 상대를 살핀 카시우스.
결국 그의 정면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황금 기사단의 분대장이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하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조루스 퇴각전(退却戰), 그리고 제7요새 공략전의 영웅을 이렇게 초라하게 영접하여 죄송합니다. 지금 수도에서는 모든 개선식 준비를 마친 채 카시우스 님이 입성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단은 개선식의 준비를 서두르십시오. 자세한 일정은 가시는 동안 설명드리겠습니다.”
농담이라고 치기엔 너무도 진지하고 심각한 어투.
“그게 무슨 뜻인가?”
카시우스는 더욱 의아한 생각이 들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사내는 빙긋 웃었다. 면사로 얼굴을 가려 정확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초리가 가볍게 내려가는 것을 보아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게 분명했다.
‘왜 웃는 걸까?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 모습을 본 카시우스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약간의 뜸을 들인 뒤, 사내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자세로 정중하게 대답했다.
“어목혼주(魚目混珠)10)라는 말을 아십니까?”
“어목혼주?”
“저 멀리 동방의 이민족들 사이에서 전해 오는 말로, 물고기 눈알을 진주라고 속인다는 뜻입니다.”
짧은 비유지만 카시우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전후 사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하루아침에 영웅이란 말을 듣게 됐는지. 자신이 귀환하는 동안 수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어째서 뜬금없이 군사 최고의 영예라는 개선식이란 말까지 나오게 됐는지.
“그 말은 내가 지금 물고기 눈알이란 뜻인가?”
평소보다 더욱 차갑게 되묻는 카시우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일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오른 주먹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움켜쥐었다.
“글쎄요, 그건 카시우스 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다만 이것만은 알아주십시오. 세상은 어지럽고 불합리할수록 영웅을 찾는 법입니다. 하지만 영웅이라는 진주가 없다면, 물고기 눈알이라도 대신하는 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친위대장 또한 지지 않고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물고기 눈알이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물고기 눈알이 된 건가?’
카시우스는 쓴웃음이 나왔다. 누군가 자신을 이용해 여론몰이를 했다고 생각을 하니, 자기도 모르게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