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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18화)


그렇다고 싫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부터 엄중한 문책을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영웅 대접은 오히려 이쪽에서 감사의 인사라도 해야 될 판이었다.
‘꼭두각시 인형 노릇, 기꺼이 받아 주마! 그리고 곧, 그 결정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카시우스는 웃었다. 화가 나기는커녕, 그는 자기도 모르게 문득 차디찬 웃음을 흘렸다.
잠시 후, 카시우스가 차갑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름 따윈 없습니다. 여황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그 순간부터 전 이름 따윈 잊었습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되는가? 무명(無名)?”
카시우스의 당당하면서도 약간은 비웃는 듯한 말투가 거슬렸던 탓일까. 이에 사내는 잠시 카시우스를 노려봤다, 상대를 꿰뚫을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제 암호명은 호노스(Honos)입니다. 정 그러시면 호노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이윽고 그가 침착을 되찾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호노스? 고대어로 명예라는 뜻인가? 그 이름…… 기억해 두지!”
한마디, 한마디 강조하듯 차갑게 내뱉은 카시우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상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뜻밖의 패배로 인한 악화된 여론을 희석시키고, 군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만들어진 영웅!
이것이 카시우스가 본격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계기였다.
당사자의 의지나 의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손익계산에 의해 강제적으로.
그러나 이것이 카시우스 본인에게 행운이 될지, 혹은 불행이 될지는 오직 운명의 여신만이 알고 있었다.




제6장 개선식[Triumphus]


1
개선식!11)
초대 황제인 베리타시우스 1세가 마침내 대륙을 통일하고 고향에 돌아와 신에게 제사를 올린 것에서 유래된 행사다.
전장에서 죽어 간 수백만의 병사들과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진 수천만의 백성들, 그리고 이들이 흘린 피로 만신창이가 된 천하까지…… 황제는 이 모든 것들을 위로함과 동시에 마침내 전쟁의 시대가 종식되었음을 알릴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축제와 제사 의식을 겸한 개선식이었다.
이후 개선식은 제국이 큰 승리를 거둘 때마다 전통처럼 반복되었고, 해가 지날수록 그 시대의 유행과 화려한 색채 등이 더해져 마침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제국력 623년 11월 15일.
특히 그날의 개선식은 역대 그 어떤 개선식보다 더욱 눈부셨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는 연신 폭죽들이 솟구쳐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오색의 색종이 들은 바람을 타고 춤을 추었고, 수도 곳곳에 위치한 높은 첨탑에서는 연신 맑고 우렁찬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리는 개선군의 모습을 보기 위한 군중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으며, 그들이 일제히 질러 대는 요란한 함성은 거대한 메아리가 되어 멀리 울려 퍼졌다. 말로는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아니, 말로 표현하려는 것 자체가 모독일 정도로 눈부시고 황홀한 광경이었다.
개선식의 당사자들은 당황스러웠다.
맨 처음 황실의 친위대가 성 밖에까지 마중을 나왔을 때도 그들은 자신들을 압송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성벽 위에 나부끼는 검은색 깃발을 봤을 때도 자신들의 깃발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고, 심지어 구름처럼 몰려 있는 인파를 본 다음까지도 그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우린 처벌을 받는 게 아니었나?’
‘지금 우리를 환영하는 건가? 정말 우리가 이 개선식의 주인공이 된 건가?’
그들은 성에 들어서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경탄과 경외를 몸소 체험한 다음에야, 자신들이 이 요란한 개선식의 주인공임을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의식은 수도 베리타스의 남문에서 출발해 ‘신성한 길[Via Sacra]’을 행진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때 거리는 온통 화려한 꽃과 색종이들로 장식이 됐으며, 길 양쪽에는 군중이 늘어서서 모두 한목소리가 되어 고대어로 ‘이오 트리움페(Io triumphe)’12)를 크게 외쳤다.
이러한 개선 행진은 번쩍이는 황금 갑주를 걸친 이천 명의 황실 보병대가 한 줄에 스무 명씩 길게 열을 맞추어 입장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들은 제국의 상징인 황금 독수리가 새겨진 커다란 붉은 깃발을 앞세운 채 등장했고, 열과 오를 정확히 맞춘 늠름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행군했다.
사전에 몇 번이나 연습한 것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굳게 다문 입술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당당한 느낌이 들게 했으며, 특히 허리에 찬 의장용의 황금색 장감은 햇빛을 받아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반짝였다.
그다음으로 등장한 것은 무려 이천 명에 이르는 군악대였다. 친위대와 마찬가지로 황금빛 갑주를 걸친 채 열을 맞추어 씩씩하게.
그들은 듣고만 있어도 절로 힘이 넘치는 군가를 연주하여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고, 절도있는 힘찬 노래까지 곁들여 장엄한 분위기마저 연출했다.
세 번째로 등장한 것은 이천 명의 황실 의장대였다.
그들 또한 앞선 황실의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황금색 갑주를 걸치고 있었는데, 다만 손에는 각각 1.5미터가 넘는 기다란 창을 들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겉보기에는 무겁고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속이 비어 있고 찔러도 다치지 않는 의장용의 창을.
그러나 그들은 창을 크게 휘두르거나 혹은 허공에 대고 현란한 창술의 선보여, 특히 군중들의 갈채를 한 몸에 받았다.
시작부터 화려하게 분위기를 띄운 황실의 친위대와 군악대와 의장대.
본래 그들은 황제의 개선식이 아니고선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공을 세운 카시우스와 그의 부대는 개선식을 치르기에는 너무 수가 적고 초라했기 때문에, 게다가 카시우스를 영웅으로 만들려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일반적인 개선식보다 더욱 화려하고 특별한 연출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은 전례를 어기면서까지 초반에 등장하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어쨌거나 황실의 병사들이 한참 등장한 뒤, 그다음으로 등장한 것은 오백여 명의 살아남은 일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각각 열 명씩 짝을 이루어, 여섯 필의 말이 끄는 커다란 수레를 타고 천천히 등장했다,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물론 그들은 패잔병의 남루한 모습은 아니었다. 목욕을 하고 수염까지 다듬은 말끔한 모습이었고, 의복 또한 방금 막 다림질을 한 것 같은 정갈한 붉은색의 군복이었다.

―와―아! 제국이여, 영원하라!―와―아! 제국 만세! 만세! 만세!
그들의 모습을 본 군중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함성을 질렀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한참 동안이나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다음 다섯 번째로 등장한 것은 주력인 이천 명의 흑사자대였다.
전직 흉악범들이 아닌, 수많은 전투를 승리를 이끈 정의의 특수부대로 여론이 조작된 흑사자대. 이번 개선식의 실질적인 주역인 그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특이하게도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거나 하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전투에 나서는 것처럼 검은색의 가면을 쓰고 천천히 말을 몰아 등장했다, 섬뜩한 죽음의 기운을 강하게 풍기며.
하지만 이 독특하면서도 정적인 등장이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로우면서도 위압적인 느낌이 들게 했다.
그 모습을 본 군중들은 크게 수군거렸다.
“저들이 그 유명한 흑사자대인가?”
“아! 전투의 달인들만 모였다는 그 특수부대?”
“과연 분위기부터가 달라. 괜히 전장에서 죽음의 신이라 불리는 게 아니겠어!”
군중들은 하나같이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론 경외감이 깃든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렇게 무려 삼십여 분에 걸쳐 기나긴 행렬이 이어진 뒤, 마침내 오늘의 가장 큰 주인공이 등장했다.
카시우스 넥스 안겔루스!최근 대륙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된 그가 마침내 수도 베리타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카시우스의 등장은 화려한 개선식에서도 단연 백미였다.
그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대한 코끼리, 그 위에 설치된 황금빛의 높은 의자에 앉아 천천히 등장했다.
그의 등장과 동시에 성내의 높은 건물들에서 일제히 거대한 뿔나팔을 울려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바람을 타고 날리는 색종이와 꽃잎들은 그 수가 절정에 이르렀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주변으로는 황금빛 갑주를 걸친 황금 기사단 이천여 명이 호위를 했으며, 그 뒤로는 다시 수레 몇 백 대 분량에 이르는 전리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보는 이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카시우스! 카시우스! 카시우스!
이미 반쯤 이성을 잃고 넋이 나간 군중들이 마치 광신도라도 된 것처럼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눈물을 흘리는 자는 부지기수였고, 심지어는 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서로 밀치는 통에 곳곳에서 아찔한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사실 간신히 돌아온 카시우스의 부대가 적의 갑주나 전리품들을 가져올 리는 없었다.
그가 타고 등장한 코끼리 또한 본래 남부 지방에는 살지 않고, 서부 지방에만 일부 존재하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정치란 국민을 관객으로 하는 일종의 쇼에 불과하다’라는 티투스의 예견처럼, 대중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지, 그 속에 담긴 진실이 아니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개선식은 단순히 승리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한 행사가 아니었다. 비록 승리를 자축하는 축제의 성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전쟁으로 죽은 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제례 의식에 가까웠다.
때문에 카시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개선식의 행렬은 수도를 관통하는 ‘신성한 길’을 따라 두어 시간가량 행진한 뒤, 최종적으로 북쪽 외곽에 위치한 성전(聖殿)에 도착했다.
도무스 데이(Domus dei).
고대어로 ‘신의 집’이라는 뜻으로, 개선식을 거행한 장군이 위령제(慰靈祭)를 올리는 신성한 곳이다.
설령 황제라 할지라도 이 신전에서는 반드시 예를 지켜야만 했고, 심지어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일단 이 신의 집으로 도망을 가면 잡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 이름처럼 신성불가침한 성지(聖地).
그리고 카시우스가 이 신의 집에 도착했을 때, 티투스가 준비한 ‘쇼’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

신13)의 광장.
그곳은 수도 베리타스의 정중앙에 우뚝 솟은 언덕에 조성된 광장이었다.
넓이는 무려 오천여 평.
도시 전체에 걸쳐 거미줄처럼 얽힌 길은 모두 중앙의 이 광장으로 집결됐고, 성내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덕분에 수도의 상징이라 불리기도 했다.
또한 잘 포장된 도로와 여름이면 시원하게 물을 뿜어내는 분수, 그리고 각종 조형물들로 인해 관광지로도 명성이 높았으며, 실제로 언제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신의 광장이 유명한 것은 단지 관광적인 요소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의 집.
제국의 성지라 불리는 ‘신의 집’이 바로 이 신의 광장 북쪽에 위치했던 것이다.
신의 집은 넓이는 대략 오백여 평 정도였다.
바닥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지고, 그 위에 높이가 10미터에 이르는 여덟 개의 거대한 기둥이 자리 잡았으며, 다시 기둥 위에 거대한 대리석 지붕이 올라간 원형의 구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