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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19화)


그리고 그 중앙에는 마찬가지로 흰 대리석으로 만든 수십 개의 하얀 비석들이 지붕에 닿을 정도로 높이 솟아 있었다.
언뜻 보기엔 단지 규모가 크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는 평범한 구조.
그러나 신의 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던 바, 그것은 바로 이 안에 늘어선 수십 개의 비석들이었다.
멀리서 보기엔 거대한 네모진 비석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글자들이 빼곡하게 음각되어 있었고, 그것을 자세히 보면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의 출생 연도가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언뜻 봐도 족히 수백만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의 흔적들.
물론 그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 제국의 초석을 다지고 죽어 간 장졸들, 초대 베리타시우스 1세부터 지금까지 제국을 위해 죽어 간 장졸들이었다.

―무릇 황제란 백성을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保民而王].14)

이것이 바로 초대 황제 베리타시우스 1세의 통치 철학이었고, 이러한 사상의 구체적인 형상이 바로 ‘신의 집’이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개선식은 전장에서 죽어 간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한 일종의 제례 의식에서 비롯된 행사였다.
따라서 화려한 행렬을 모두 마친 뒤, 개선식의 마무리는 신의 집 남쪽 광장에 위치한 제단에서 제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수만 명의 군중들이 구름처럼 운집한 가운데, 광장의 중앙에 위치하여 사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이 2미터가량의 넓은 제단에서.
제단의 전체적인 형태는 신의 집과 비슷했다. 바닥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40평가량의 정사각형이었고, 각 모서리에는 높이 3미터의 둥근 대리석 기둥이 솟아 있었다.
그 기둥 위로는 대리석으로 만든 하얀 지붕이 올라가 있었으며, 지붕에는 제국의 상징인 비상하는 매 수십여 마리가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힘차게 음각돼 있었다.
그리고 제단의 북쪽 중앙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제상(祭床)이 마치 신의 집을 바라보듯이 서 있었다.
카시우스의 개선식 마지막 행사, 죽은 원혼을 위한 제례 의식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이 ‘신의 집’과 ‘신의 제단’이었다.
아무리 개선장군이라고 해도 이 신의 집에서는 무장이 허락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호위병들마저 뒤로 물린 뒤, 남쪽에 난 계단을 밟으며 홀로 천천히 제단으로 올라갔다.
아름다웠다.
제단에 오르는 카시우스는 같은 남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정말 아름다웠다.
사실 복장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순백의 토가(Toga)15)를 붉은 군복 위에 단정히 걸쳤을 뿐이다.
그러나 순백의 토가보다 더욱 하얀 그의 피부, 바람에 춤을 추듯 흩날리는 부드러운 붉은색의 머리칼, 그리고 뚜렷한 이목구비와 이에 대비되는 붉은 입술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주위 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아! 아름답다!’
대중은 그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흩날리는 머릿결을 쓸어 올리는 그의 작은 동작 하나하나에도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따금씩 입가에 머금는 그의 엷은 미소는 쉽게 형언할 수 없는 경건함마저 자아냈다.
사실 카시우스도 기분이 조금 묘했다.
일단 싫은 건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꼭두각시 영웅이 됐지만, 군인 최고의 영예인 개선식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황홀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개선식은 단순히 명예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그의 행보에 날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었다.
‘이제부터다! 나 카시우스의 비상(飛上)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어지간해서는 흥분하지 않는 카시우스.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로 인해 전율마저 느꼈다.
그러나 이러한 흥분과 전율보다 더욱 진한 감정은 바로 오기와 자존심이었다.
비록 과거의 영화가 무색하게 몰락한 이름뿐인 귀족이었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다.
비정할지언정 비굴하지는 않았고, 어쩌면 그 자존심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지금까지 그를 지탱해 준 힘이었을지도 몰랐다.
‘감히 나 카시우스를 상대로 꼭두각시 인형극을 벌이다니……! 좋다! 비록 지금은 그대들의 장단에 춤을 추지만, 머지않아 그대들의 지금 이 결정이 크나큰 실수임을 증명해 보이겠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가문을 파멸로 이끈 장미의 동맹, 동시에 지금 이 연극으로 자신마저 꼭두각시로 만든 자들을 떠올리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물론 지금 이 연극을 꾸민 배후 세력이 장미의 일족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는 배후의 세력이 누군지 알아낼 시간도 없었고, 또 그럴 여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섣불리 증거를 남길 장미의 일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국 전체를 움직인 거대한 여론 조작, 여황의 친위대까지 움직여 꾸민 대대적인 개선식을 진행할 수 있는 세력은 현재 제국에서 오직 장미의 동맹밖에 없었다.
단, 이 모든 것들은 오직 그의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복잡한 생각들일 뿐, 그가 복잡한 심경으로 내심 쓴웃음을 짓는 동안에도 행사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또한 겉으로는 비교적 여유로운 모습으로, 동시에 한편으론 아름다움을 뛰어넘어 우아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침착하게 제단에 올라 제례 행사에 임했다.
제단에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좌우의 거대한 구리 향로에서 회색의 향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제단 북쪽의 제상에는 갖가지 제물들이 황실의 법도에 따라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제단의 남쪽에는 필요한 용품들을 하나씩 든 여덟 명의 여성 신관이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으며, 제단의 아래에도 여덟 명의 남성 신관이 장식용 청동검을 들고 호위를 겸해 주위에 대기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제단의 중앙에 오르자 제례 의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와 동시에 분위기 또한 방금 전까지의 들뜬 기운이 사라지고, 대신 제례 의식 특유의 엄숙하고 경건함만이 가득했다.

―참신(參神)!
제단 아래에 대기하고 있던 남성 신관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외쳤다.
참신은 제사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자, 동시에 신(神)을 뵙는 인사를 뜻하는 말이다.
이에 카시우스를 비롯한 광장의 모든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제단의 북쪽에 위치한 신의 집으로 몸을 돌린 뒤, 두 차례 허리를 굽혀 공손히 절했다.
잠시 후, 다시 여덟 명의 남자 신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강신(降神)!
이것은 제사의 주인이 신을 강림하게 하는 의식이었다.
카시우스가 제상을 향해 앞으로 한 발 나아가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여성 신관 중 가장 좌측에 있던 자가 그의 좌측으로 다가왔다.
이어서 카시우스는 그 신관에게서 두 개의 기다란 향을 건네받은 뒤, 향을 앞으로 내밀고 허리를 반쯤 굽히며 정면의 신의 집을 향해 다시 두 차례 절을 올렸다.
여덟 신관의 외침은 계속되었다.

―진찬(進饌)!
이것은 제사의 주인이 신에게 음식과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제단 아래의 군중들 사이에서 느닷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과 비명이 들린 것은.
“으아아악!”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길게 울리는 가운데, 조용하고 엄숙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뭐지?’
제사에 집중해야 할 카시우스마저도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무차별 살육.
제단의 아래에선 뜻밖에도 무차별 살육이 자행되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하얀색 토가를 입고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다섯 명의 사내, 그들이 주위 사람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단검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공화 만세!”
“껍데기뿐인 여황은 물러가라!”
목이 찢어져라 외치는 것으로 보아 남부를 장악한 공화의 사람들인 것 같았다.
“으아아악! 뭐, 뭐야?!”
“아악! 사, 살려 줘!”
장내는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다.
테러범들의 외침, 그들에게 칼을 맞고 쓰러진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호루라기를 불며 그들을 제지하기 위해 달려오는 경비 무사들의 고함으로 인해 장내는 삽시간에 큰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더욱 상황을 어렵게 만든 건 너무도 많은 군중들이었다.
군중들이 너무도 밀집해 있는 탓에 주위의 경비들이 복면인들에게 쉽게 접근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접근은 고사하고 경비들은 정확한 상황 파악조차 힘들었다.

―성스러운 개선식에서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당연히 이 자리의 모두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을 쳐야 되는지, 아니면 흉악한 테러범들에게 대항을 해야 될지도 몰랐다.
그저 크게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하기에 급급할 뿐, 이것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속 시원하게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개선식을 거행하는 측에서 이런 불시의 사고에 대비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광장 주위로 삼천여 명의 병사들이 비상대기한 것은 물론, 군중들 틈에도 사복 차림의 경호원들이 천여 명이나 잠복해 있었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은 광장 입구에서 사전에 압수됐으며, 특히 제국의 입장에서 요주의 인물이라 낙인이 찍힌 자들은 광장으로의 출입 자체가 엄격하게 통제됐다.
그러나 오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이런 거대한 행사에서 모든 위협을 완벽히 차단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게다가 대다수의 시민들이 예복으로 입는 토가는 치렁치렁하고 길게 늘어지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작은 단검쯤은 쉽게 숨길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의 행사 진행은 무리였다.
여성 신관들이 길게 비명을 지르며 제상 구석으로 몰려들어 몸을 웅크림과 동시에,

―카시우스 님을 보호하라!
제단 아래서 행사를 진행하던 여덟 명의 남성 신관이 급히 제단으로 올라와 카시우스를 에워쌌다.
비록 무기라고는 의전용 청동검에 불과했지만, 게다가 전문적으로 무예를 익힌 경험도 없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몸을 방패로라도 삼는 한이 있더라도 카시우스를 지키려 했다.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 이대로 제단을 내려가는 것은 더 위험합니다. 적의 잔당이 아직 군중들 사이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 불편하시겠지만 이대로 잠시 제단에서 사태를 관망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신관 중 하나가 날카롭게 주의를 살피며 카시우스에게 말했다.
“알겠네. 경비들이 저들을 제압할 때까지 경거망동은 하지 않는 게 좋겠군.”
카시우스도 달리 별다른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장에서의 경험이 누구보다도 풍부한 카시우스였다.
겉으로는 가만히 신관들에게 둘러싸여 추이를 지켜봤지만, 오히려 카시우스는 자신을 보호하는 신관들보다 더욱 냉정하고 침착하게 사태를 분석했다.
‘뭔가 이상하다! 저들은 단순히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위협을 가하는 공화의 졸개들이 아니다!’
맨 처음 군중들 틈에서 비명이 들렸을 때부터 그는 복면인들의 행동이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음을 직감했다.
‘왜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는 걸까? 아무리 아조루스에서의 승리로 기세가 올랐다 하더라도 아직 공화는 제국에 비하면 그 힘이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 실정이다. 그런데 왜 저들은 굳이 이런 테러를 자행하여 제국을 자극하는 걸까? 이런 자극은 의도와 달리 그들에 대한 제국의 여론을 더욱 악화시킬 뿐인데…….’
이것이 그가 고개를 갸우뚱한 첫 번째 이유였다. 비단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약 제국을 동요시키고 민간의 불안을 야기할 목적으로 테러를 자행한 것이라고 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요란하게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겉보기엔 요란해도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다. 만약 제국의 불안과 동요가 목적이라면 최소한의 희생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그사이 제단 아래의 소동은 서서히 진정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