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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권 (23화)


아무리 한가락 한다 하는 귀족들이라 해도 현재 권력을 양분하고 있는 비르고스 가문과는 감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혼자가 아니라 좌우에 각각 일남일녀를 대동했던 바, 그들의 신분도 그녀와 비교해서 절대 뒤떨어질 것이 없는 대단한 자들이었다.
때문에 그녀와 일행이 나타나자 지금껏 그를 괴롭히던 귀부인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자리를 비켜 줬다.
그녀와 함께 온 일남일녀는 워낙 유명하여 카시우스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우선 그녀의 우측에는 보라색 페플로스를 입은 전형적인 귀족 가문의 영애가 있었다.
하늘거리는 머플러로 코 아래부터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호수처럼 깊으면서도 시원한 느낌의 눈동자 하나만 보더라도 대단한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체형은 나시디아와 비슷하지만, 성격은 정반대인 전형적인 귀족 가문의 영애.
그녀는 나시디아의 두 살 위 언니이자 현재 제국 제일의 미녀, 일명 ‘제국의 꽃’이라 불리는 플로시아(Flosia) 솔 비르고스였다.
그녀는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었다.
“카시우스 넥스 안겔루스. 제국의 꽃 플로시아 님을 뵙습니다.”
카시우스가 허리를 구십 도로 굽히고 상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정식 인사를 했지만, 그녀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인 게 전부였다.
비르고스 가문의 두 영애가 함께 나타난 것만 해도 사교계에서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나시디아의 좌측에 조용히 서 있던 사내. 플로시아의 정혼자이자 외모와 능력, 출신 배경 등 모든 것에서 완벽하기만 한 사내의 정체였다.

―삼 년 전, 카시우스가 막 흑사자대의 신출내기 대장이 되었을 때, 이미 만 명의 병사들을 이끄는 군단장이 된 자.
―임관 이후 거침없이 승승장구하여 카시우스 이전에 이미 제국의 차세대 영웅으로 당연시되던 자.

카시우스의 사관학교 삼 년 선배이기도 한 그 자는 제미니우스 가문의 후계자, 피케르 사틴 제미니우스였다.
피케르는 여러모로 카시우스와 대비되는 자였다.
우선 외모만 보더라도 그 차이는 명확했다.
카시우스는 붉은 머리칼에 선이 고운 유형의 미남자였다. 보호 본능을 자극하면서도 한편으론 차가움마저 느끼지는 이질적인 분위기의 미남자.
때문에 제국의 어린 여성들 사이에서 유독 인기가 많았고, 반대로 그를 시기하는 일부의 사람들은 군인으로서 너무 약한 이미지라고 그의 외모를 폄하하기도 했다.
반면 피케르는 선이 굵은 강인한 유형의 미남자였다. 188cm가량의 큰 키와 단단한 근육, 역삼각형으로 잘 발달된 가슴과 등 근육은 고대의 조각상을 연상시킬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탐스러운 금발과 푸른 눈동자, 우뚝 솟은 콧날과 짙은 눈은 전형적인 남자다움의 상징이었고, 굵고 시원한 목소리 또한 남자답고 호탕했다.
비단 외모만 대비되는 것은 아니었다.
출신과 경력만 보더라도 둘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카시우스가 이름만 남은 몰락 귀족의 후계자인 반면, 피케르는 귀족 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오른 제미니우스 가문의 후계자였다.
카시우스가 임관 이후 가장 힘들고 어려운 부대만 전전한 반면, 피케르는 출발부터 핵심 부대만 거쳐 승승장구했다.

―모든 영광을 가지고 태어난 자와 모든 영광을 잃고 태어난 자.

제국의 차세대 인재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둘은 이처럼 정반대의 양극단에 서 있었던 것이다.
둘 중 먼저 말문을 연 것은 피케르였다.
“오랜만이군. 아조루스에서의 퇴각전과 제7요새 탈환전에서의 자네 활약은 나도 귀가 따갑도록 들었네. 축하하네.”
이 말과 함께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피케르.
“저야말로 피케르 님의 활약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서부 이민족들을 상대로 무려 사십여 차례에 걸쳐 싸워 전승을 하셨다고요. 동부 이민족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다는 ‘연전연승(連戰連勝)의 무적(無敵)’이란 말은 아무래도 피케르 님을 위해 있는 것 같습니다.”
카시우스도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상대의 손을 맞잡고 대꾸했다.
“하하핫! 아직도 날 피케르 님이라 부르는가? 자네와 난 사관학교 선후배 사이가 아닌가? 그냥 편하게 선배라 부르시게.”
피케르는 호탕하게 웃으며 맞잡은 손을 크게 흔들었다.
카시우스는 웃었다. 그는 대답 대신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케르…… 여전히 자신만만한 모습이군.’
겉으로는 오랜만에 만나는 선배를 대하듯 웃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심정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했다.
십오 년 전, 자신의 가문을 멸문시킨 것이 바로 장미의 가문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선두에 섰던 것이 바로 붉은 장미의 제미니우스 가문이었다.
이 장미의 가문이 본격적으로 전횡을 시작한 때가 바로 자신의 가문이 멸문한 시점이었으며, 또한 대륙 각지에서 본격적으로 제국에 대한 반역의 기치가 올라간 시점이기도 했다.
‘만약 가문이 화를 당하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 만약 우리 가문이 아직도 과거의 빛나던 영광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의 내 모습은 과연 어떻게 변해 있을까?’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피케르가 기분이 좋아서 웃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평소부터 권력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고, 현재 공석인 한 자리의 ‘쿰 임페리오’는 자신의 것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던 피케르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자신이 나타나서 본의 아니게 피케르의 앞을 막은 꼴이 되었으니, 피케르가 절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일 리는 없었던 것이다.
피케르가 그를 견제하고 있다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가 바로 지금의 악수였다.
겉으로는 반갑게 악수를 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경직되어 있었다. 맞잡은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으며, 그 손을 통해 미약하지만 살기마저 느껴졌다.
‘흥! 날 견제하는 건가?’
카시우스가 피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 향한 도전을 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둘은 그렇게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겉으로는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서로의 공을 치하했지만, 서로를 응시하는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
이러한 긴장감을 누그러뜨린 건 곁에서 지켜보던 나시디아였다.
“남자끼리 무슨 눈싸움을 그리 오래한데요? 그나저나 선배, 설마 그 약속을 잊지 않았겠죠?”
그녀는 생기 넘치는 특유의 표정과 어투로 분위기를 전환시키며 카시우스에게 물었다.
“약속?”
그제야 악수를 끝내고 가볍게 고개를 갸웃하는 카시우스.
무슨 약속이었더라?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옛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그녀와 어떤 약속을 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섭섭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언젠가 선배가 장군이 되면 날 부관으로 써 주겠다는 약속 말이에요!”
“아!”
그제야 카시우스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가 사관학교를 졸업하던 날이었던가?
평소 그를 선배라 부르며 따르던 그녀가 그에게 억지로 다짐을 받았다.
언젠가 카시우스가 거대 군단을 지휘하는 장군이 되면 그녀를 부관으로 써 주겠다고.
그런데 당시에는 워낙 그녀가 막무가내여서 반쯤은 억지로 했던 약속이기 때문에, 게다가 어린 소녀의 생떼라고 여기고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기 때문에, 지금 이 말을 다시 꺼내자 카시우스는 조금 당황했다.
“차라리 곁에 있는 피케르 님에게 부탁하는 건 어떤가? 피케르 님은 이미 만 명을 지휘하는 군단장이시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널 부관으로 쓰는 건 어렵지 않을 텐데…….”
카시우스가 슬며시 곁에 있던 피케르에게 떠넘겼지만,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싫어요. 피케르 선배는 날 부관으로 써도 보나마나 제일 후방에서 보급이나 맡길 거예요. 내가 원하는 전장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것이지, 후방에서 집이나 보는 게 아니라고요.”
그녀가 이렇게 나오니 카시우스는 더욱 난처해졌다.
원칙적으로는 군의 모든 인사권은 대장군에게 있었다. 그러나 최근엔 대장군이 대부분의 실권을 잃은 형편이어서, 각 장군들이 상호 합의하에 인사권을 서로 나눠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개선장군이 된 카시우스가 정식으로 장군의 칭호를 받게 된다면, 그녀를 자신의 부관으로 임명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여자라는 것, 그것도 일반적인 여인이 아니라 현재 제국의 권력을 움켜쥔 비르고스 가문의 영애라는 게 문제였지만.
카시우스는 당황했다. 전투에 관해서는 경험이 풍부하고 냉정한 그였지만, 지금처럼 이성을 상대하는 것에는 경험도 없고 서투르기만 했던 탓이다.
그런 카시우스의 모습이 너무 의외였던 것일까. 짐짓 화난 표정까지 짓고 있던 나시디아는 돌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풋! 지금 당장 부관으로 써 달라는 얘기는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버님만 하더라도 내가 전장으로 나가는 걸 허락하시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언제고 적당한 때가 되면 날 부관으로 써 주겠다는 약속을 잊지 마세요.”
그녀의 말에 카시우스는 더욱 당황했다.
‘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일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얼굴만 붉히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혹은 불행인지 카시우스의 이런 당혹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런 카시우스를 향해 피식 웃으며 피케르가 말을 꺼낸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인데 장난이 조금 심했던 것 같군. 아무튼 인사는 이쯤 해 두고 돌아가지. 어차피 자네와 난 앞으로 자주 볼 사이니까. 아, 그리고 조만간 아주 재밌는 발표가 있을 걸세. 아주 재밌는 일이니 기대해도 좋을 걸세.”
겉으로는 화기애애하지만 여전히 가시가 돋친 말.
그 안에 담긴 노골적인 암시를 놓칠 카시우스가 아니었다.
‘재밌는 일? 또 뭔가 꾸미고 있다는 건가?’
카시우스는 직감했다.
피케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허튼소리는 아닐 것이다. 아니, 이 자리에서 이렇게 그들을 만난 것 또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서 그와 장미 일족의 후예들이 만난 것, 그리고 지금 나눈 대화까지…… 이 모든 것은 잘 짜인 각본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카시우스의 개선식 축하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곧이어 피케르는 더 이상 연회에 있을 기분이 아닌 듯 인사도 없이 돌아갔고, 카시우스는 카시우스대로 피케르가 남긴 암시에 골몰하느라 더 이상 연회를 즐길 겨를이 없었다.
과연 피케르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여황은 제국의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파격적인 황명을 내린 것이었다.



3

카시우스의 개선식이 끝나고 일주일 후.
여황은 전에 없이 특별한 황명을 만천하에 공포했다, 제국의 역사상 전무후무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파격적인 황명을.
황제의 명령답게 꽤나 길고 복잡한 명령이었는데,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이 시간부로 ‘준장군[Semi―Imperio]’의 특수 직위를 신설한다.
2. 그간 우수한 전공을 세운 ‘카시우스 넥스 안겔루스’와 ‘피케르 사틴 제미니우스’를 ‘준장군’에 임명한다.
3. 다가오는 제국력 624년 5월 1일, 카시우스와 피케르를 공동 대장으로 하는 대대적인 ‘공화’ 토벌전을 거행한다.
4. ‘공화’가 무단으로 점거한 남부 지방의 평정 이후, 둘 중 더 큰 공훈을 세운 자를 정식 ‘장군[쿰 임페리오, Cum Imperio]’에 임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