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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매 1 권 (24화)


제국은 끓어올랐다. 아니, 제국만이 아니라 대륙의 모든 이들이 이번 특별 황명에 광분했다.

―남부의 영웅, 카시우스 넥스 안겔루스.
―서부의 영웅, 피케르 사틴 제미니우스.

이 두 명이 장차 제국을 짊어질 차세대 인재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바였다.
그 시간이 언제인가 하는 문제만 있을 뿐, 둘 중 하나가 최고가 되리라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두 명이 최고의 자리를 두고 이처럼 빨리, 이처럼 전격적으로 격돌하게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현재의 정세를 아는 자들이라면 자기 일처럼 광분하는 게 당연했다.
제국은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두 명의 젊은 인재가 동시에 남부 전선에 투입된다면 오직 승리만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침내 카시우스의 첫 번째 도전이 시작되었다.

* * *

여황의 공개적인 ‘남벌’ 선언.
그로부터 얼마 후, 공화 또한 공식적인 응전 의사를 천명하고 준비에 돌입했다.
총대장은 아조루스의 승리로 주가를 높인 아키에스였으며, 최소 3개 군단 6만 명의 병력을 헤아리는 대군이었다.
그리고 이즈음, 한직으로 좌천되어 근신 중이던 레오니스 또한 다시 중앙으로 복귀했다.
비록 약간은 반항아에 가까운 그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약간 제멋대로이고 상부의 명령보다 자신의 신념을 더 중시하는 그였지만, 그의 군사적 재능은 반대파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군에 복귀한 레오니스의 공식 직함은 아키에스의 수석 참모.
일부에서는 총대장 아키에스를 능가하는 최고의 천재라 칭송받는 그도 마침내 공식적인 데뷔전을 치르게 되었다.





4





현재 제국의 군사력은 병들어 가고 있었다.
병사들의 양과 질이 전성기에 비해 확연히 수준이 낮아진 것은 당연지사.
우선 네 명의 장군[Cum Imperio]이 거느린 중앙의 상비군은 어느새 그들의 사병으로 변질돼 있었다.
그들 장군들은 다시 각각 흰 장미파와 붉은 장미파로 나뉘어 보이지 않는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중앙의 군대는 지방의 반군 진압에 거의 손을 놓은 상태였다.
지방 상비군의 상황도 중앙에 못지않았다.
중앙에 비해서는 장미 일족의 영향이 비교적 덜하긴 했지만, 그들도 반쯤은 지방 장군들의 사병으로 변질돼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지방의 상비군은 반군의 진압은 고사하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도 급급했고, 아조루스 토벌 같은 군사행동이 필요할 때마다 중앙에서 준장군 같은 임시 군단을 만들어서 처리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참고로 아조루스 토벌전에 참가했던 페디토르 또한 정식의 군단이 아닌, 중앙에서 각 부대에서 조금씩 차출한 병사들로 만든 임시 부대의 성격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제국에 반기를 든 반군들의 상황도 조금은 그 성격이 이상했다.
만약 반군이 너무 힘을 키우면 제국 중앙의 장군들이 손을 잡고 대대적인 토벌을 벌일 위험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제국의 군사력이 많이 감퇴했지만, 그리고 장미 일족의 견제로 인해 중앙의 군대가 묶여 있는 상황이었지만, 만약 그들 중앙의 군대가 움직이면 그 규모만 해도 족히 삼십만은 헤아린다.
게다가 만약 여황이 전시 선언이라도 하게 되면, 수십만의 상비군이 아니라 그보다 몇 배에 이르는 예비군까지 총동원된다.
그렇다고 반군도 언제까지 제국의 눈치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세력을 확대하며 힘을 키우고 있었지만, 이대로 지방의 일부 독립적인 세력으로 남기엔 그들의 야망이 너무 컸다.
남부 공화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현재 남부의 공화는 공식적으로 제국에 반기를 든, 반군 중에는 가장 세력과 영향력이 큰 집단이었다.
따라서 공화가 제국의 토벌을 막아 내고 지금처럼 계속 그 세력을 불린다면, 이에 자극을 받은 다른 반군들도 본격적인 반기를 들 수 있다.
게다가 제국의 망조는 이미 시작이 됐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해지는 건 그들 반군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공화가 제국에 제압당한다면 다른 반군들은 아직은 시기상조임을 절감하며 이전처럼 계속 제국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여황의 남벌이 갖는 중요성은 바로 이것이었다.

―제국이 반군들에게 아직은 시기상조임을 천명하는가, 아니면 제국의 힘이 쇠락함을 드러내어 본격적인 난세의 시작임을 알리는가?

대륙 전체의 이목은 자연스럽게 다가올 남벌에 집중되었다.


<『제국의 매』 제2권에서 계속>





주석



(1) 삼인성호(三人成虎)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말. 삼인성시호라고도 한다. 전국 시대 위(魏)나라 방총이 태자를 모시고 조나라 한단으로 인질이 되어 가면서 자기가 없는 동안 왕의 관심이 자기에게서 멀어질까 하여 혜왕을 만나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왕께서는 믿겠습니까?”
“그 말을 누가 믿나?”
“그럼 두 사람이 와서 같은 말을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반신반의하겠지”
“이번에는 세 사람이 와서 같은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말을 믿을 것 같다.”
방총은 말했다.
“시장에는 분명히 호랑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 됩니다. 저는 지금 멀리 한단으로 떠납니다. 제가 떠난 후 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셋만은 아닐 것입니다. 귀담아듣지 마십시오.”
“내가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면 믿지 않을 테니 걱정 마오.”
이에 혜왕은 끄덕여 약속했고, 방총은 태자를 모시고 조나라로 떠났다.
과연 방총이 출발하고 아직 한단에 도달하기도 전에 그의 걱정대로 참소가 들어왔다. 혜왕은 약속과는 달리 방총을 의심(疑心)하게 되었고, 몇 년 뒤 태자는 인질에서 풀려 귀국했지만 방총은 그가 예견한 대로 왕을 만날 수 없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2) 금적선금왕(擒賊先擒王)
이 말은 병법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두보(杜甫)라는 시인의 ‘출새곡(出塞曲)’ 가운데 ‘전출새(前出塞)’라는 시에 나오는 말이다.
싸움에서는 우두머리를 먼저 잡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활을 당기려면 강하게 당기고[挽弓當挽强],
화살을 쏘려면 멀리 쏘아야 한다[用箭當用長].
사람을 쏘려면 먼저 그 말을 쏘고[射人先射馬],
적을 잡으려면 먼저 그 왕을 잡아라[擒賊先擒王].

라는 시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신당서(新唐書) 장순전(張巡傳)’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나라 숙종(肅宗:711∼762) 때 장순(張巡)과 윤자기(尹子奇)의 군대가 전투를 하였는데, 장순의 군대가 적을 공격하여 혼란에 빠뜨렸다. 이에 장순은 윤자기를 죽이려 하였으나 문제는 상대의 얼굴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순은 병사들에게 볏짚으로 만든 화살을 쏘게 하여, 윤자기의 병사가 장순 군대의 화살이 모두 없어졌다고 윤자기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그리곤 병사에게 보고를 받는 윤자기를 찾아 진짜 화살을 쏘도록 하여 윤자기의 왼쪽 눈을 맞혔다.
결국 사기가 떨어진 윤자기의 군대는 참패를 하였는데, 이처럼 장수를 잡기 위해 먼저 그 말을 쏘는 것을 일컫는다.



(3) 전략과 전술
우선 전략이란 근대에 확립된 개념으로서, 오늘날의 전쟁에서는 군사 및 경제 자원을 총동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용어가 처음 쓰이기 시작한 18세기와 19세기 초에는 전투를 계획하고 지휘하는 기술과 전투부대를 이동하고 배치하는 기술을 뜻했다.
전략과 전술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략은 전쟁의 전반적인 국면을 다루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전투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 반면, 전술은 주로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병력과 장비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둘째, 전술은 전쟁터에서 병력을 다루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반면, 전략은 전투의 준비 행위로서 이 병력을 유리한 위치에 배치하는 문제를 다룬다.
다시 말해 전략이란 전쟁을 위한 전체적인 틀이며, 이러한 전략의 세부 실행이 바로 전술인 것이다.
즉, 카시우스가 주장한 이기고서 싸운다는 말은 먼저 전략적으로 승리를 확보하고, 그다음 전략의 실행으로써 전술적으로 승리를 거둔다는 뜻에 가깝다.



(4) 레오니스의 정치적 실책에 대한 보충
독일의 군사전문가 카알 폰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저서인 ‘전쟁론’에서 정치와 전쟁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전쟁은 또 다른 형태를 지닌 정치의 연속이다.

즉, 폭력이란 수단에 의존하는 차이만 있을 뿐, 전쟁이란 결국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정치적 투쟁의 연속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당시의 레오니스는 자신의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공화’란 다수가 민의(民意)라는 미명하에 대의(大義)를 결정하는 정치적 수단이다. 따라서 최대 다수가 원하는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면 그 구성원이 미숙할 경우 근시안적이고 비합리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단점이 있다.
레오니스가 간과한 것은 바로 이것, ‘공화’의 구성원들이 아직 미숙하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레오니스의 처지를 생각해 보자.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지녔지만, 아직 ‘공화’ 내에서의 입지는 불안한 편이었다.
정치적으로 그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의 뛰어난 능력을 시기하여 모략을 일삼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그가 일반 장졸들 사이에서 명성과 신망을 얻으면 얻을수록, 이에 비례하여 그를 시기하는 자들 또한 더욱 많아지는 추세였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했다.
만약 당시의 레오니스처럼 아직 정치적 기반이 불안정할 경우, 그는 섣불리 행동하여 공을 세우기보다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여 기반을 튼튼히 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다.
일단 위로부터 신뢰를 얻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이 먼저요, 명령을 어기긴 했지만 뛰어난 공을 세워 자신을 부각시키는 것은 그다음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