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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6화)


이미 일전에 소청단을 먹어 본 경험이 있는 진송하는 이 환단이 이전에 먹었던 그 어떤 약초나 영약 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이건 천년삼왕으로 인해 몸 안을 새까맣게 태울 듯했던 양기를 천천히 가라앉혀 준 소청단과는 분명 달랐다. 마치 양기를 없애기 위해 태어났다는 듯, 엄청난 속도로 몸속의 양기를 차갑게 식히기 시작한 것이다.
진송하는 재빨리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가부좌를 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두툼한 허벅지로 홀로 가부좌를 트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결국 현은이 도와주고 나서야 힘겹게 가부좌를 틀 수 있었으니, 그조차도 오로지 지금까지 먹은 약초들로 덕분에 근골이 유연해진 덕분에 가능한 결과였다.
‘와아! 대번에 가슴속의 양기가 가라앉는 것이 정말 대단한 영약이구나! 대체 아버지는 이런 귀한 약을 또 어디서 구하신 거지?’
하지만 어렵게 구한 것임에 분명한 영약의 기운을 행여 놓칠까 싶어 이내 진송하는 궁금함을 억눌렀다. 그리고는 자신이 일곱 살 때 소청단을 먹기 직전에 현은에게 배운 이름 모를 심결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
이상하게도 그런 진송하를 바라보는 현은의 얼굴에 어린 표정이 실로 복잡 미묘했다.

* * *

한편, 진선각 앞마당에서 책을 옮기는 도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잔소리를 늘어놓던 진 노인은 의외의 인물의 방문을 받았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묵유자? 오랜만이구나!”
현은의 사부인 묵유자였다.
장문인인 유극 진인에게 어떤 언질을 받았는지, 현은이 면벽 수련을 명받은 이후로는 진 노인과 진송하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그가 삼 년 만에 얼굴을 내민 것이다.
“대체 그동안 왜 얼굴을 내밀지 않은 것이냐? 나는 네가 현은 녀석과 함께 면벽 수련이라도 받고 있는 줄 알았다.”
“허허허.”
그 말에 묵유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진선각 너머로 시선을 가져가더니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현은 저 녀석도 저처럼 두 사람에게 접근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장로분들이 싫어하셨거든요.”
“쯧쯧. 뭐, 대충 짐작은 했다. 지들 입장에서야 지보인 소청단 한 알을 우리가 꿀꺽한 셈이니, 내쫓지 않은 것만으로도 많이 참은 거겠지.”
이에 묵유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장로들이 진송하와 그가 삼킨 소청단 때문에 진 노인과 진송하를 내쫓는 짓을 할 리 없었다. 진 노인이 지닌 지식은 소청단 못지않은 무당의 귀중한 보물이었으니 말이다.
진 노인은 삼 년 전만 해도 나이에 맞지 않게 새까맸던 묵유자의 머리카락이 어느새 반백으로 변한 것을 바라보다 말했다.
“……우리를 대신해 네가 고생이 많았나 보구나.”
이에 묵유자는 다시 한 번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못난 제자 놈 때문이지요.”
진 노인은 그 말이 단순히 겸양을 떠는 것이 아닌,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묵유자와 비슷한 명을 받았을 텐데도 현은은 일 년 동안의 면벽 수련이 끝나자마자 진송하의 곁에서 맴돌았으니, 중간에 낀 묵유자의 고생이 만만찮았으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진 노인은 그런 묵유자가 굳이 이곳에 온 이유를 추리하다가 뒷마당에서 진송하와 함께 있는 현은에게 생각이 미치게 되자 경악 어린 얼굴로 물었다.
“서, 설마! 저놈이 가져온 것이 진짜 소청단인 게냐?”
그렇게 확신한 진 노인은 지금 이 순간 묵유자를 막아야 할지, 현은을 막아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휩싸여야 했다.
다행히 묵유자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소청단은 아닙니다. 더구나 제가 구해 온 것이니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네가 직접? 으음……. 그럼 안심이구나.”
진 노인은 진정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묵유자가 누구인가?
바로 대무당파 장문인의 둘째 제자다.
더구나 현재 대제자인 묵경자가 황족들에게 장생술을 가르친다는 목적하에 북경에 가 있어서, 실질적인 묵 자 항렬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존재가 바로 그였다.
그러니 진 노인은 묵유자가 구해 온 것이라면 하등 문제될 게 없다고 안심할 수 있었다.
다행이라는 얼굴을 한 진 노인에게 묵유자가 입을 열었다.
“물론 조건을 달았습니다.”
조건이란 말에 순간 안색을 굳힌 진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 말했다.
“으음……. 조건을 달았다? 난 들은 적이 없으니 현은에게 내건 조건이겠구나. 그래, 무슨 조건이냐?”
현은에게 내건 조건.
충허암에서 현은이 안색을 굳혔던 것이 바로 묵유자가 현은에게 내건 조건 때문이었다.
“무림맹으로 가서 최소 오 년 동안은 무당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조건입니다.”
“무, 무림맹? 오 년? 허! 대체 무엇 때문에? 네 단 하나뿐인 제자를 그리 오랫동안 무당과 떨어뜨려 놓으려고 하다니,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러는 것이냐?”
묵유자가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그게 다 송하와 떨어뜨려 놓기 위해서입니다. 진 노인께서도 현은이 사람에게 쏟는 비상식적인 정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모를 리가 있겠는가? 아닌 말로 현은은 무당파 내에서도 별종 중의 별종이었다.
진 노인이 비록 강호의 정세에 어둡다고는 하나, 현은이 젊은 시절에 한창 무림을 활보하고 다닐 때의 별호마저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뭐, 그 녀석이 괜히 강호에서 인룡(人龍)이라 불렸던 건 아니겠지.”
전도유망한 후기지수들에게 붙는 용(龍) 자.
그 앞에 붙는 말은 그 사람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었으니, 인룡이란 결국 사람을 그만큼 좋아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호였다.
‘사람과의 사귐을 좋아하니, 인룡(人龍)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람이라. 만약 아직까지도 강호에서 낭만을 품은 자가 존재한다면 그자는 바로 낭만검(浪漫劍)이리라.’
오죽하면 강호에서 현은을 표현할 때 이런 말을 쓰겠는가?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인룡이라 불렸고, 이립을 넘겨 후기지수라 하기 힘든 나이가 되었을 땐 낭만검이라 불리는, 현은은 그런 사람이었다.
“현은이 너무 정이 깊다 보니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고, 공정치 못한 일이 있으면 아무것도 재지 않고 무작정 뛰어들고 보는 성격이라는 걸 아실 겁니다.”
“물론이지.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않느냐?”
오죽하면 진송하를 살리기 위해 자기 문파의 지보인 소청단을 훔쳐 와 먹였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도가 아니라 의를 추구한다 하여 현은을 탓할 사람은 무당에 없었다. 애초에 도를 추구하는 사람조차 찾기 힘든 것이 지금의 무당이니 말이다.
진 노인은 그런 이유로 친부자 못지않게 끈끈하게 이어진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으려는 묵유자가 이해되질 않았다.
“그래도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 어차피 그놈 성격이 그러한 것을.”
“아닙니다. 문제는 송하에게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겁니다.”
진 노인은 그 말에 전혀 의외란 얼굴로 물었다.
“무엇이 심하다는 말이냐? 인룡이라 불렸을 정도면 강호에서 활동할 때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별호를 안다고 하여 현은이 강호에서 어떻게 하고 다녔는지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니었기에 진 노인은 그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녀석이 아무리 사방팔방 제멋대로 행동하고 다녀도, 최소한 제 말만은 들었던 녀석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녀석이 지금까지 살아 있기나 했겠습니까?”
인룡, 그리고 낭만검.
현은이 강호에서 그렇게 불리기까지 행한 일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상대와 자신의 실력 차를 재지 않고, 불의를 저지른다 싶으면 무작정 덤벼들었고, 친우가 어렵다 싶으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기세로 도와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 정도를 조절해 주던 것이 바로 묵유자였으니, 그의 말은 전혀 틀린 바가 없었다.
“그런데 송하에게는 그것이 아니란 건가?”
되묻는 진 노인에게 묵유자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 후 재차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애초에 소청단을 훔치려는 걸 제가 방관만 했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훔친 겁니다. 그래서 면벽 수련이라는 벌을 받았는데도, 소청단이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자 면벽 수련을 명받기 전에 재차 훔치려고 들더군요. 어차피 받는 면벽 수련, 몇 년 더 받는다고 달라질 게 없다면서 말이지요. 제 말은 씨알도 안 먹혔습니다. 당시 제가 그보다 더 좋은 영약을 구해 오겠다 약조하지 않았다면 분명 보관된 소청단을 모조리 훔쳐다 먹였을 겁니다.”
‘그놈이 천년삼왕의 일 때문에 그 정도까지 죄책감을 느꼈던가?’
“허허.”
진 노인은 그런 현은의 정성스런 마음이 기꺼워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현은의 사부인 묵유자는 아니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또한 현은이 강호에서 활동을 하지 않은 지 벌써 십 년입니다. 삼 년 전, 천년삼왕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 때문에 그 아이가 진 노인과 함께 약초를 캐는 일을 그만두었지요. 전 당연히 면벽 수련만 마치면 강호에 나가기 시작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손쓸 방도도 없다고 생각했고, 지금까지 그 녀석이 강호에 뿌려 둔 연도 적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면벽 수련이 끝났는데도, 이 년이 지난 지금까지 송하의 곁을 맴돌기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라면 현은은 강호에서 완전히 잊혀지고 말 겁니다.”
“으음…….”
진 노인은 묵유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사부가 제자의 정체된 모습을 보고 싶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떤 점에 있어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번에 네가 구해 온 영약이란 것이 효과가 있어서 송하가 낫기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지 않느냐? 애초에 현은이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도 송하의 건강 때문이니 말이다.”
그 말에 묵유자가 굳은 안색으로 말했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 말에 진 노인도 묵유자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굳힌 채 더 자세한 설명을 재촉했다.
“무슨 문제?”
“제가 이 년간 알아보고 구해 와 현은에게 준 것이 바로 북해빙궁(北海氷宮)의 빙정입니다. 지금 송하의 몸에 빙정만큼 도움이 되는 영약도 없을 테니까요.”
빙정(氷精).
보통 강호에서는 극한의 음한지기(陰寒之氣)로 만든 내공의 정화(精華)를 일컬었다. 내공을 증진시킨다는 영약 중에서도 워낙 음한 기운이 강해서 그 쓰임이 제한적인 영약. 그러다 보니 음한지기를 익히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리 큰 가치를 지닌 물건이 아니어서 중원에서 찾아보기 힘든 영약 중 하나였다.
그나마 빙공을 중심으로 익힌다는 세외의 북해빙궁에서는 그 쓸모가 많아 북해에서는 나름 대중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영약 중 하나였다. 하지만 괜히 북해빙궁이 새외에 위치하는 게 아니다. 이를 구하기 위해 묵유자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지는 안 봐도 눈에 선했다.
현은이 면벽 수련을 명받은 뒤부터 곧바로 구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면, 무려 삼 년이란 긴 시간이 걸린 끝에야 구할 수 있었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송하의 문제가 천년삼왕의 양기 때문이니 네 말대로라면 확실히 음한 성질을 지닌 빙정으로 탁월한 효과를 거둘 것 같구나.”
긍정하던 진 노인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럼에도 문제가 있다라…….”
“예. 제가 예상하기에는 분명 송하의 체내에 잠재된 양기는 빙정으로 모두 억누를 수 있을 겁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 비정상적이었던 몸도 건강해지겠지요. 하지만 이는 비정상적인 양기를 없애는 것일 뿐, 이미 양기로 인해 손상된 혈맥들을 온전히 되돌려 놓지는 못할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송하는 이미 삼 년 전에 내공을 쌓을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습니다.”
묵유자는 삼 년 전, 진송하가 무공을 익힐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현은에게 말했었다.
그럼에도 현은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라며 말이다.
하나 묵유자가 보기에는 전설의 환골탈태라도 하지 않고서는 손상된 혈맥을 되돌릴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진송하를 제자로 거두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고자 현은에게 빙정을 주기 전에 그런 약조를 했던 것이다.
“으음……. 그렇구나.”
오히려 진 노인은 묵유자의 말에 불안감을 잊고 안도할 수 있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야 진송하가 무공을 익히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문제가 다른 것도 아니고, 단지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된 것뿐이라면 자신은 하등 손해 볼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