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태극혜검 1권 (8화)
결코 거절할 수 없는 대가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부가 제자 잘되라고 하는 일인데 어찌 그것을 마냥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닌 듯했다.
“네가 급하다기에 아까는 미처 설명하지 못했다만, 무림맹에 가서 한 가지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다.”
“무엇을요?”
“현재 강호에서 의협맹(義俠盟)이란 세력이 등장하였다고 하는구나.”
“의협맹이요? 뭐 이름을 들어 보니 저희 무림맹(武林盟)에 속하지 못한 정도(正道) 문파의 연합쯤으로 보이는데, 별로 문제될 것은 없어 보입니다만?”
무림맹처럼 정도를 걷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현은의 생각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더구나 만에 하나, 무림맹이 그곳에 신경을 쓴다 하여도 무당파까지 나설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묵유자는 현은의 생각이 틀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은 모양이다. 무림맹에 속해 있는 문파의 젊은이들까지 그곳에 가담하고 있다고 한다.”
그 말에 현은이 놀라 물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맹에 속한 어린놈들이 뭐하러 의협맹이란 곳에 다시 가입을 하겠습니까?”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겠다. 의협맹이 내건 기치가 바로 ‘현 강호에서 사라진 의와 협을 되살리자’라는 것이다 보니, 젊은 아이들의 피를 자극한 것 같다.”
“으음……. 맹에서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거 아닙니까? 어린놈들이 지들끼리 술 마시고 떠들다 합심한 정도겠지요. 서두를 필요는 없을 거 같으니 최소한 송하랑 작별 인사 정도는 나눌 시간을 주십시오, 사부님.”
묵유자는 현은의 항변에 그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가라.”
“으윽!”
말이 짧아진 묵유자.
현은은 이럴 때 반항하는 것은 신상에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진 노인이 말했다.
“송하 걱정은 말거라. 내가 잘 보살펴 줄 테니.”
현은은 그제야 진 노인이 이미 모든 사정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배알이 꼴렸다.
“칫! 송하를 홀로 가르치게 되었으니, 참으로 좋으시겠습니다?”
현은은 자신이 이렇게 말하면 당연히 진 노인이 자신에 맞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댈 줄 알았다. 하지만 진 노인의 얼굴을 진지했다.
“……그래, 나는 좋다. 송하가 사사로이 무공을 익히지 않아서 좋고, 제자리걸음만 하던 네가 다시 앞으로 나아갈 테니 좋고, 묵유자가 걱정을 덜게 되었으니 좋구나.”
갑자기 진 노인이 그답지 않게 나오자 현은은 당황스러웠다.
“여, 영감님?”
“이리될 운명이었던 게다. 그간 네 노력으로 인해 송하의 몸이 건강을 되찾게 되었으니, 너의 지난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러니 안타깝게 생각하지 말거라. 네가 진정 송하가 무당산에서 제대로 커 갈 수 있길 바란다면, 부디 높은 자리에 올라라. 그럼 네 아들을 우습게 볼 놈은 최소한 무당산에서는 한 명도 없을 게다.”
현은은 진 노인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결국 진 노인과 자신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지난 십 년간 진송하 하나만 바라보며 같이 고생해 온 사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현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속마음과 전혀 달랐다.
“영감님. 뭐 잘못 드셨습니까? 갑자기 왜 그렇게 나근나근해지셨대요?”
“뭐, 뭐야? 이 빌어먹을 놈이, 나를 평소에 어떻게 보았기에! 어서 꺼져 버려라, 이놈아!”
“큭큭. 그래야 영감님답죠.”
현은은 그렇게 말하고는 진선각 뒷마당을 떠났다.
진 노인은 현은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고놈 참, 끝까지 사람 열 받게 만드네. 어찌 네놈하고 저리 다를 수가 있을까?”
“아까는 사부와 제자가 하는 짓이 똑같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까 태극심법을 가르친 것에 대해 뭐라 한 것을 들어 묵유자가 비꼬자, 진 노인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오냐,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말대꾸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그 사부에 그 제자다!’
그리고 그때 진송하의 눈이 떠졌다.
三章. 도덕경과 만나다
어느덧 일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진송하의 몸은 많이 나아졌다. 비대했던 몸도 이제는 약간 통통하다 싶을 정도로 변했고, 백운촌과 진선각을 오가면서도 숨을 헐떡이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졌다.
하지만 진송하에게 지금이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과연 고개를 끄덕일지 모르겠다.
현은이 하산하여 정도 무림맹이 있는 남양부에 가 있는 바람에 그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고, 몸도 튼튼해져서 그런지 송암의 멸시와 송방의 괴롭힘이 더욱 심해진 것이다.
특히 송방은 일 년 전에 현은에게 맞아 한 달간 몸져누운 일에 대한 원한 때문인지 대련 상대를 해 달라는 명목으로 수시로 목검으로 구타해 댔다.
지금도 진송하는 송방에게 대련이라는 명목하에 목검으로 맞는 중이었다.
딱!
“아악! 그, 그만해!”
목검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진송하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송방은 오히려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만해?”
그리고 재차 날아드는 목검.
딱!
“크흑!”
진송하는 결국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송방이 원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만하세요. 소…… 송방 진인님.”
진인(眞人)이라니…….
무당 내에서도 장문인인 유극 진인만이 진인이라 불리는데, 이제 겨우 열한 살. 그 자신보다 한 살 어린 그를 어찌 진인이라 부른단 말인가?
하지만 송방은 진인이라 불리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허허. 이 진인께서 아직 현천검의 극의를 보려면 멀었으니, 너는 조금만 더 견디거라. 견디는 것도 다 수행이니라.”
과장되고 노인네 같은 말투. 하지만 그런 말투보다 계속한다는 말에 진송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시키는 대로 했잖아!”
“어허! 다시 말이 짧아지는 걸 보니, 역시 아직 수행이 부족하구나.”
그러더니 재차 목검을 휘두르는 송방이었다.
퍽!
“아악!”
퍽!
“허억!”
결국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어지던 송방의 구타는 진송하가 기절하고 나서야 멈추었다.
온몸에 피멍이 들어 처참한 모습.
대충 봐도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각한 상처였다. 대체 얼마나 잔인하기에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기절한 진송하를 바라보는 송방의 얼굴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허억! 허억! 제, 젠장! 현은 사숙이 나에게 한 것처럼 딱 한 달간만 몸져눕게 만들고 싶은데, 어찌 된 게 한참을 쳐 대야 간신히 기절만 하는 거야? 그것도 얼마 안되어 금방 깨어나니, 정말 돌아 버리겠네!”
송방은 송방 나름대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사실 어린 나이의 그에게 악한 마음이 얼마나 있겠는가? 또래 아이들이 꿈에 그리던 무당파의 진산제자, 그중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재능을 인정받는 송방이다.
그런데 평소 존경하던 현은 사숙이 허약하고 돼지같이 뚱뚱한 잡일꾼을 소개시켜 주면서 사형이라 부르라고 하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물론 송방은 진송하가 지 딴에 아버지 말을 잘 따르려고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꼬박꼬박 사제라고 부르는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울컥해서 내공을 싣지도 않은 주먹으로 한 대 쳤던 것이다.
그런데 설마 기절까지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 일 때문에 현은에게 죽어라 쳐 맞아 한 달간 몸져누웠을 땐 정말 송방도 꼭지가 돌아 버렸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일 년.
처음엔 당한 만큼 갚아 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정말 자신이 질려 가고 있었다. 대체 저 살인적인 회복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송방은 자신이라면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를 입고도 다음날이면 말끔한 몸으로 내원을 오가는 진송하가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너 정말 무공을 안 익힌 것 맞냐? 제발 그냥 한 달만 몸져누워 있어라. 이젠 때리는 나도 지친다, 지쳐!”
진송하가 이를 들었다면 앓는 척 연기라도 해서 한 달간 꿈쩍도 안 했겠지만, 아쉽게도 정신을 잃고 있으니 오늘과 같은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뻔했다.
그렇게 송방이 투덜거리며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송하가 정신을 차렸다. 온몸에 피멍이 잔뜩 든 것이 아플 만도 한데, 그저 굳은 얼굴로 바닥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기만 해 대는 모습이 자못 어른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송방이 사라졌을 거라 짐작되는 방향을 바라보며 외쳤다.
“나쁜 놈!”
나름 자신이 알고 있는 최악의 욕을 날린 것이다. 하지만 송방을 향해서는 더욱 심한 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한 번 외쳤다.
“뱁새눈!”
그제야 약간 후련해짐을 느낀 진송하였다.
물론 처음 괴롭힘을 당했을 때는 서러워서 정말 많이도 울었다.
하지만 울기만 한다고 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별로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진송하에게 지금 상황을 해결할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오는 건 욕뿐이었던 것이다.
“차라리 한 달간 몸져누울 수만 있다면…….”
바로 전에 송방이 눈앞에서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얼굴을 할지 자못 궁금하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몸이 약해서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너무 건강해서 탈이다. 지금도 온몸에 멍 자국이 생겼지만 분명 하루만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아니, 하루나 간다면 문제가 있었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말끔한 상태가 되어야 했다.
남들이라면 죽어도 이상치 않을 상처를 입은 아이가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진송하는 자신이 그 정도로 심하게 맞았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눈치채시면 안 되니 서둘러 그곳으로 가야겠네.”
진 노인은 몇 달 전에 진선각에서 일을 하다가 허리를 삐끗했는데, 이제는 기력이 쇠해져서인지 아직까지도 다친 허리가 낫지 않고 있었다.
진송하가 괴롭힘당하는 걸 알면 그의 성격에 다친 허리를 이끌고서라도 내원으로 가 발칵 뒤집어 놓을 것이 분명할 터였다.
그러다 안 좋은 허리가 더욱 악화될까 걱정이 된 진송하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어떻게든 멍 자국을 없애야만 했다.
타다닥.
아무도 없을 것이 분명한 진선각을 향해 달려가는 진송하는 수풀 속에 숨어 안 그래도 작은 눈을 더욱 작게 만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서운 놈. 그렇게 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뛰다니! 내 오늘은 기필코 네 녀석의 비밀을 캐내고 말 테다! ……그나저나 감히 뱁새눈이라고 했겠다? 이익! 나중에 두고 보자!’
송방이었다. 자리를 떠나는 척하며 주변의 수풀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슬며시 수풀 속에서 나온 송방은 진송하가 눈치채지 않게 조심스레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열심히 달리는 진송하는 머릿속으로 현은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어떻게 일 년이 넘도록 소식 한 번 안 전하실 수가 있지? 참 너무하셔.’
* * *
후한 시절의 수도였던 남양부(南陽府)의 북쪽 끄트머리에 질 좋은 옥으로 유명한 독산(獨山)이 있다.
신강의 화적옥(和田玉), 요녕의 유옥(岫玉), 호광의 녹송석(綠松石)과 더불어 사대 명옥으로 꼽히는 하남의 독산옥(獨山玉)이 나오는 곳이 바로 이곳 독산이었다.
‘금값은 있어도 옥값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진귀한 보물 옥(玉).
그중에서도 사대 명옥으로 꼽힐 정도라면 나라가 관리하지 않을 리 없었지만, 이곳 독산만은 이상하게도 황실에서 위임을 받아 특정 단체가 옥을 캐내고, 옥장을 고용해 세공하는 일까지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단체는 필수 불가결하게 옥을 노리고 습격하는 도적들에게서 광산을 방어하는 역할까지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