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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9화)


그 단체의 이름이 바로 정도무림맹(正道武林盟)이다.
보통 줄여서 무림맹이라 부르는 이 단체는 구파일방이라는 정도 무림을 대표하는 문파들이 중심이 된 거대 연합체였다.
독산의 중턱에 산을 깎아 만든 정도무림맹의 건물은 중소 도시의 성곽과도 같은 거대한 규모였다.
무림맹은 최상품의 옥으로 세공품을 만들어 황실에 조달하였고, 남은 옥을 팔아 창출한 이윤 역시 대부분 나라에 세금으로 바쳤지만, 그러고도 남는 돈이 적지 않았다.
아니, 이는 나라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적지 않은 정도라는 것이지 실제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았다.
이렇게 정도무림맹은 구파일방이라는 막강한 무력과 어마어마한 자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중원을 대표하는 하나의 힘이었다.
사실 도검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나라의 일을 맡긴다는 것이 결코 흔한 일이라 할 수는 없었다. 하나 이는 모두 무당파가 무림맹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랜 세월, 수대에 걸쳐 황족에게 장생술을 가르치고 있는 무당파 도사들에게 황제가 무당산에 지어 준 수백 채의 건물들과 함께 해 준 보답이 바로 독산의 관리권이었던 것이다.
물론 무당파가 물욕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일 수 없는 도가 계열의 문파였기에, 현 무림맹주와 주요 기관의 장은 대부분 타 문파의 인물들이 맡았다. 이로 인해 무당파는 무림맹 내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지위에 있었다.

무림맹의 수많은 건물들 중에서도 내성에 위치한 삼 층 누각. 그 꼭대기 층 창가에 몸을 기댄 현은은 남쪽 하늘을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뒤편에서 그런 현은을 바라보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안타까운 시선으로 현은을 바라보다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우. 또 그 주워 온 아들 생각하니?”
“주워 왔다고 말하지 마! 친아들이라고! 친아들!”
자신을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현은의 모습에 여인은 이전보다 더욱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휴!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그 아이를 아끼는 네 마음은 가상하지만, 남들 앞에서는 함부로 그런 소리 마. 도사한테 친자식이 있으면 그게 도사니? 무당에 누 끼치기 싫으면 사실대로 양자라고 말하란 말야.”
“끄응.”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짓는 현은이었다.
그런 투정 부리는 애 같은 모습에 여인은 잠시 찌푸리던 인상을 풀고는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친아들과 다름없이 키운 양자라고 주변에 소문을 낼게. 그러면 네가 친아들이라고 말해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지.”
“……고마워, 남화.”
여인의 이름은 소남화(蕭南花).
하남의 거대 문파인 태천문(太天門)의 문주, 소천중(蕭天衆)의 여식이자, 현 무림맹의 정보 조직인 은영전(隱影殿)의 전주를 맡고 있는 여인이었다. 또한 이십여 년 전부터 현은에게 결코 이룰 수 없는 연정을 품은 가련한 여인이기도 했다.
휘릭!
현은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재빨리 몸을 뒤로 돌리는 소남화였다. 복사꽃처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현은에게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십 년 가까이 못 봤으니, 젊은 시절 품은 연정 따위 식었겠지 싶었는데……. 어떻게 겨우 고맙다는 말 하나에 얼굴을 붉히니? 남화, 이 바보 멍청이! ……앗!’
그때 소남화는 보았다. 문가에 서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를 말이다.
“나, 나 이만 가 볼게!”
그리고는 신법까지 발휘하여 재빠르게 사라지는 소남화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현은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쟤 건망증은 어떻게 십여 년 전하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분명 보고할 게 있다고 와 놓고선 그냥 가 버리네. 정말 은영전의 전주를 어떻게 해 먹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니까.”
그때 현은도 문가에 사내 하나가 서 있음을 눈치챘다.
“어? 현상. 사형을 보면 인사부터 할 것이지, 기척을 죽인 채로 뭘 그리 웃고 있냐?”
문가에 서 있는 사내는 현은이 오기 전부터 무림맹에 오랫동안 파견 나와 있던 현은의 사제인 현상이었다. 그는 긴 세월을 무림맹에서만 보냈기에 현 자 항렬의 도사 중 유일하게 현은을 사형으로 대해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후후. 사형도 참, 눈치 없는 건 여전하네.”
이십 년 이상 이어 온 소남화의 연정을 현상은 알고 있었기에 그리 말했지만,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재주가 없는 현은이었기에 현상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뭔 소리야? 아무튼 내가 시킨 일은 어떻게 됐어?”
현상은 속으로 역시 사형답다는 생각을 짧게 하고는 현은에게 다가가 물음에 답했다.
“남양표국주를 직접 만나 확인까지 했어. 사형의 편지는 확실하게 무당파에 전해졌대.”
“그럼 대체 뭐야? 이노무 자식이 벌써 춘정에 빠졌나? 어찌 아비한테 답장 한 통 안 보낼 수가 있어?”
이제 겨우 열한 살 난 아이가 무슨 춘정에 빠진단 말인가? 현상은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뭐, 아무런 설명도 않은 채 이곳으로 왔다면서? 그것 때문에 삐친 걸 수도 있지.”
“윽! 야, 그게 내 탓이냐? 사부님이 억지로 하산시킨 걸 어쩌냐? 그리고 사내가 되어 무슨 일 년이 다 돼 갈 때까지 삐쳐 있어? 난 송하 녀석 그렇게 안 키웠다!”
‘키운 건 분명 진 영감님일 텐데…….’
물론 현상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송하와 얽힌 일로 진 노인과 비교를 하면,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온다는 걸 요 일 년간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상은 얼른 화제를 바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건 그렇고 사형, 의협맹에 대한 조사는 얼마나 진행되고 있어?”
“음, 글쎄다? 아까 남화가 나한테 보고하려던 게 그것에 관한 것일 텐데……. 방금 그냥 나가 버렸으니…….”
“……그래?”
이후 현상이 침묵을 지키자, 현은은 다시금 창가에 기대어 남쪽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송하야, 어째서 이토록 소식이 없느냐? 아비는 우리 아들이 너무 보고 싶단다. 흑흑.”
이제는 질질 짠다.
뒤에서 그런 현은의 모습을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현상은 만약 소남화가 도망가지 않고 이 자리에서 저 모습을 보았다면 연정 따위 금세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현상은 계속 지켜봤다가는 비위가 상해 오늘 저녁을 먹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 뒤로도 현은의 방에서 훌쩍이는 소리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보고를 깜빡했다는 생각에 표정을 다듬고 되돌아온 소남화가 그런 현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우니?”
“송하야아……. 흑흑.”
‘아아, 어쩜 저리도 정이 깊을까?’
현상의 예상은 틀렸다. 소남화는 현은의 질질 짜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정이 깊다는 생각에 그를 향한 연정이 더욱 깊어지고야 만 것이다.

* * *

“자, 일단 일부터 하자.”
한편, 진선각에 도착한 진송하는 먼저 일부터 하기로 했다. 진 노인이 쓰러진 후부터 진선각의 일은 그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으음……. 태평경(太平經), 포박자(抱朴子), 황로경(黃老經), ……상청경(上淸經), 삼황경(三皇經), 태현부(太玄部). 이쪽은 이상이 없네.”
사실 일이라고 해 봐야 별것 없었다. 가끔 하는 청소를 제외하고는 제 위치에 있지 않은 경서를 찾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정도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더구나 진선각에 경서를 읽으러 오는 도사는 하루에 한 명도 채 되지 않아, 책이 잘못 놓여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진 노인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일을 해 왔었기에, 그런 모습을 쭈욱 보아 온 진송하 역시 이 일을 아무렇지 않게 매일 해 오고 있었다.
“응?”
이상 없이 잘 정돈돼 있는 책들을 뒤로하고 몸을 돌리려던 진송하에게 무언가가 시야에 잡혔다.
“이건…….”
삼나무로 만들어진 목함.
바로 십여 년 전, 등선암에서 발견된 도덕경이 든 목함이었다. 물론 이 목함은 진 노인과 현은이 단강에 가서 구해 온 목재로 만든 목함이기도 했다.

“허허. 이것이 바로 너와 우리를 이어 주었단다.”

진송하가 손으로 목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진 노인이 했던 말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거구나!”
“응?”
진송하는 갑자기 울려 퍼진 목소리에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소, 송방?”
그곳에선 송방이 정확하게 목함을 가리키며 서 있었다.
“드디어 네놈의 비밀을 알아냈다! 그렇게까지 소중해하는 얼굴이라니! 분명 그 안에 무공 비급을 숨겨 놓은 거지?”
“뭐? 아, 아냐. 이건…….”
하지만 송방은 변명 따위는 듣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달려와 진송하의 손을 쳐 내고는 목함을 낚아챘다.
이에 진송하의 안색이 급변했다.
“무슨 짓이야! 그게 얼마나 소중한 건데!”
하지만 이는 송방의 오해를 더욱 부채질했다.
“미친놈! 감히 잡일꾼 주제에 무공을 익혀? 분명 정응각에서 비급을 훔쳐 와 숨겨 놓은 거겠지? 나한테 그렇게 맞고도 곧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는 비급이라니! 어디 어떤 건지 나도 한 번 보자!”
“안 돼에에!”
퍽!
“으윽!”
진송하가 덤벼들었지만 송방의 발길질에 곧바로 바닥에 내쳐졌다.
“뭐야? 내가 보는 게 그렇게 아깝냐? 너 그러다간 내가 어른들께 확 불어 버리는 수가 있어! 잡일꾼이 무공을 익힌 게 걸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확!”
그 말은 곧, 지금은 진송하가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진송하는 그런 송방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자신에게는 저 목함과 그 안에 든 책이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돌려줘! 무공 비급이 아니라고 했잖아!”
“이 자식이 끝까지!”
퍽!
화가 난 송방이 달려드는 진송하를 한 번 더 걷어차고는 거칠게 목함을 열어젖혔다.
떠덩!
목함의 뚜껑이 바닥에 떨어지자 진송하는 얼른 기어가 그것을 주워 흠집이라도 나진 않았는지 살폈다.
반면 내용물을 본 송방의 반응은…….
“……도덕경?”
송방도 일단 도사인 이상, 읽어 보진 않았다 해도 그 제목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거칠게 책장을 넘겼지만 그 내용이 별다를 리 있겠는가? 그것은 진짜 도덕경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젠장! 헛짚었나?’
난감해진 송방은 살며시 진송하를 돌아봤다.
“뭐, 뭐야?”
진송하가 눈물까지 흘리며 목함 뚜껑을 소매로 정성스레 닦고 있었다.
송방은 진송하의 표정을 보고는 난감해지다 못해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괴롭혀 온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분명한데, 왠지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린 기분이었다.
그때 송방의 등 뒤에서 한 사람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함과 도덕경은 바로 저 아이와 진 노인, 그리고 현은을 이어 준 물건이란다. 한마디로 고아였던 송하에게 가족이 생길 수 있게 만들어 준 소중한 물건이지.”
깜짝 놀란 송방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는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 사숙조님!”
묵유자였다. 그는 지난 일 년간 워낙 바쁘게 일하느라 진 노인과 진송하를 잊고 지냈는데, 진 노인이 허리를 다쳐 쓰러졌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그리고 진송하가 어떻게 지내는가 싶어 진선각을 찾아 살펴보러 온 것이었다.
“쯧쯧.”
묵유자는 원래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송방을 비롯한 송 자 항렬의 어린 도사들은 내원 내에서 묵유자를 가장 무서워했다. 더구나 묵유자가 곧 장문인이 될 거라는 소문이 무성한 상태였다.
다른 건 몰라도 장문인이란 자리가 이곳 무당에서 가장 높은 자리라는 것 정도는 알 만한 나이였기에 지금 송방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흐음…….”
일단 진송하와 송방을 진정시켜 의자에 앉힌 묵유자는 지금 상황이 의외로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여나 송하가 태극심법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진 노인과 송하뿐만 아니라 나와 현은의 입장마저도 곤란해질 수 있다.’
둘이 다툴 때 진선각에 들어선 묵유자는 송방이 진송하에게 무공을 익혔다고 말하는 부분을 들었기에 그 점을 걱정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