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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10화)
“송방.”
“예, 예! 사숙조님!”
묵유자의 부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힘차게 대답하는 송방이었다.
묵유자는 잔뜩 긴장한 기색을 보이는 송방과 진송하의 얼굴에 난 멍 자국을 보고는 이전에 있었던 일까지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송하가 현은이 떠나고 나서 고생이 심했나 보구나. 바쁘다는 이유로 일 년 동안 거의 찾아보질 못했으니, 이런 상황이 된 데는 내 탓도 크다.’
그는 일부러 매서운 눈으로 송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감히 무당의 도사가 되어 한 식구에게 폭력을 휘두르다니, 네가 정녕 벌을 받고 싶은 게냐?”
“아, 저 그, 그게……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는 송방의 모습에 묵유자는 의문이 들었다.
‘이상하군. 이쯤 되면 변명 삼아 송하의 무공에 대한 언급을 할 만도 한데?’
잠시 생각에 잠긴 묵유자는 곧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냈다.
‘송하를 괴롭히면서도 심한 벌을 받는 것까진 바라지 않기에 비밀을 지키는 걸 수도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송하가 배우고 있는 무공에 대한 욕심 때문일지도 모르겠구나.’
묵유자는 이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라면 일이 좋게 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송하가 익힌 심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묵유자는 내심 웃음이 나오는 걸 참아야 했다.
“너는 송하가 익힌 무공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냐?”
“예, 예? 아닙니다!”
묵유자는 한동안 송방의 얼굴을 세밀히 바라봤고, 이내 그의 눈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욕심이라기보다는 호기심에 가깝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그 무공이 무엇인지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겠군.’
“송하에게 심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나다. 이 아이가 사 년 전에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생명을 구하고자 알려 준 것이지. 너는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느냐?”
“아! 아닙니다! 절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감동받은 눈치다.
묵유자는 송방이 생각보다 나쁜 아이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대로 마무리 지어도 되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는 진송하를 돌아다봤다.
진송하는 목함을 품에 안은 채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이 녀석이 정말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된 건지 확인하겠다고 마음먹고서는 지금까지 잊고 있었구나.’
새삼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 묵유자였다.
“오랜만이구나, 송하야.”
“예. 작은 할아…… 아니, 어르신.”
“허허. 예전처럼 편하게 작은 할아버지라 부르면 된다.”
“예? 그, 그래도…….”
현은이 무림맹으로 떠난 후, 진 노인을 통해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되었고, 그렇기에 무당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들은 진송하였다.
이제는 자신의 신분을 자각했으니, 예전처럼 묵유자를 진 노인과 구분하여 작은 할아버지라 부르는 걸 거북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허! 안 그러면 네가 똥오줌 못 가릴 시절에 불렀던 것처럼 묵유 할배라 부르라 할 테다?”
“풉!”
자기도 그런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똥오줌이라는 말에 송방이 웃는 소리를 냈다.
진송하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대답했다.
“아, 알았어요, 자, 작은 할아버지.”
“허허. 그래, 그건 그렇고. 진 노인께서 아프시다 들었다. 이곳에 안 계신 걸 보니 아직 낫지 않으신 게냐?”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진송하는 대번에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허리를 다치신 지 벌써 석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 계세요. 의원님께선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 거니 충분히 쉬셔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 이곳의 일은 제가 하고 있어요.”
“흐음……. 내 언젠가 시간이 나면 찾아뵈어야겠구나. 내가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무심했어…….”
핑계는 아니었다. 실제로 무당 내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 말이다.
지금도 이곳에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묵유자는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송하야, 오른손을 이리 내어 보겠느냐?”
진송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랐지만 묵유자의 진지한 태도에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묵유자는 진송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역시 착각인가?’
맥을 짚자마자 그의 손상된 혈맥이 여전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혹시나 싶어 진기를 불어넣어 보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가닥가닥 갈라져 이내 사라지고야 말자 묵유자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아니다. 혹시 모르니 끝까지 확인해 봐야겠다.’
묵유자는 마지막으로 태극심법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진송하에게 말했다.
“심법을 운기해 보거라.”
묵유자의 말에 진송하는 송방의 눈치를 봤다.
묵유자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결국 눈을 감고 지난 사 년간 꾸준히 연마해 온 태극심법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그런 진송하의 무릎 위에는 여전히 목함이 놓여 있었다.
‘히익! 귀, 귀신?’
송방은 눈앞에 사조뻘 되는 어른이 있다는 사실에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아 비명이 나오는 건 막았지만 너무도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야 말았다.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송하가 운기를 시작하자 멍이 빠른 속도로 희미해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목격하니 그 기괴함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진송하가 생각한 오늘 안에 멍을 지우기 위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예전에 송방에게 당한 날, 우연히 태극심법을 운용하니 멍이 사라진단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진 노인에게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단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항상 맞을 때마다 태극심법을 운기해 온 것이다.
그래서 진 노인은 그때 이후로 진송하가 더 이상 맞고 다니지 않는다 생각하고 안심할 수 있었다.
송방이 놀란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목함이었다. 두 사람은 눈을 감고 있어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목함 안에서 미약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희미해지는 멍과 목함에서 흘러나오는 빛.
어린 송방을 공포에 떨게 만들 정도로 충분히 괴기스런 장면이었다.
‘이제 보니 무공이 아니라 저 귀신 들린 책이 원인이었구나! 바로 저 책 귀신이 저 녀석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이었어! 제, 젠장! 설마 내가 낸 상처라고 나한테 해코지하지는 않겠지? 히익! 마, 맞아.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바로 전에 묵유자가 직접 심법을 가르쳤다고 말을 한 사실은 눈앞에 펼쳐지는 기괴한 광경에 의해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진 후였다.
‘지금 귀신은 송하를 치료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겠지? 그럼 도망갈 기회는 지금뿐이다!’
송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묵유자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은 채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진선각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목함 안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이건?’
진송하의 몸 상태를 알아보느라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묵유자 역시 송방과 이유는 달랐으나 놀라고 있었다.
‘어째서 아직까지 음기가? 더구나 이건 양기가 아닌가? 대체 이게 어찌 된 것이란 말이냐! 마치 천년삼왕과 빙정의 기운을 전혀 흡수하지 못한 것 같지 않은가?’
심법을 통해 몸 안에 쌓은 공력을 일컬어 진기(眞氣)라 한다. 이는 곧 음과 양, 둘 중 하나에 치우치지 않은 순수한 기운이라는 말인데, 어째서 진송하의 몸에 아직까지도 양기와 음기가 각각 존재한단 말인가?
묵유자는 시간이 없음을 느끼면서도 좀 더 집중하여 살펴보기 시작했다. 엉킨 혈맥 때문에 세밀히 살펴볼 순 없었으나, 진기의 속성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맙소사! 양과 음이 섞이지 않고도 기묘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구나.’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묵유자는 이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산에서 캔 약초들과 천년삼왕의 양기가 송하의 몸을 위협했고, 이를 막기 위해 소청단을 먹였지.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을 뿐. 결국 삼 년 후에 빙정까지 먹이고서야 점차 정상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태극심법이 그 기운들을 섞어 놓았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태극심법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 같구나.’
결국 약초와 천년삼왕, 빙정으로 이루어진 양기와 음기가 오로지 소청단의 효능에 의해 균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란 말이었다.
‘흐음. 이것을 이대로 놔두어도 괜찮은 것인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괜히 건드렸다가 오히려 균형을 깨트릴 수도 있으니, 일단은 이대로 두는 편이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묵유자는 이내 진송하의 손목을 놓아주며 눈을 떴다.
“아니?”
그제야 진송하의 몸에 난 멍 자국이 사라진 것을 본 묵유자는 송방과 마찬가지로 크게 놀랐다.
“송하야! 어찌 된 게냐?”
“…….”
“응?”
진송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묵유자는 그가 아직까지도 운기 중이란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일 년 전에도 이랬던 것 같구나. 아무래도 태극심법을 운기 중일 땐 오감이 차단되는 모양이야. 그나저나 상처가 이렇게 빨리 사라지다니……. 이것이야말로 태극심법의 효용이란 말인가? 후우, 이거야 원. 현재 무당에서 태극심법을 익히고 있는 자는 송하밖에 없으니 확인할 방도가 없어 답답하구나.’
묵유자는 언제 다시 시간이 나면 송하를 따로 불러 재차 확인해 보리라 마음먹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송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쯧쯧. 이 녀석은 그새를 못 참고 도망친 건가? 그리 참을성이 없어서야 어찌 무당의 도사라 할 수 있겠는고. 내 현중에게 단단히 일러 제자를 좀 더 엄격히 가르치라 말해 두어야겠구나.”
묵 자 항렬인 그가 한 배분 아래인 현중에게 그런 말을 하면 송방에게 미칠 파급효과란 정말 어마어마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묵유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럴 작정이었다.
진선각을 나서던 묵유자는 문득 무언가를 깜빡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런! 송하에게 현은의 소식을 좀 묻고 싶었건만, 그것도 다음으로 미루어야겠구나. 무심한 녀석! 일 년이 넘도록 사부에게 소식 한 번 전하지 않다니. 설마 아직도 억지로 하산시킨 것 때문에 꽁해 있는 건가?’
묵유자는 송하에게도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四章. 꿈속을 거닐다
평상시와 다르게 다른 사람 앞에서 운기를 해서인가? 진송하는 운기를 시작하자마자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집중이 안되는 거지?’
쏴아아―
‘바람 소리잖아?’
물론 밖에서 진선각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곧 그게 아니라 확신할 수 있었다.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라 바람에 의해 나뭇잎과 꽃 들이 흔들리는 소리와, 그런 흔들림에 의해 꽃의 향기까지 콧속으로 스며들어 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박사박.
‘어? 누구지?’
분명 누군가가 풀을 밟고 접근하는 소리였다.
이쯤 되면 운기를 계속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할짝.
“으헉!”
결정적으로 그 존재가 자신의 뺨을 핥기까지 하니, 결국 비명과 더불어 눈을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운기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난 진송하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무당산에서는 보기 힘든 부드러운 연녹색의 풀들과 그 위로 솟아난 꽃들이 오색찬란한 초원이었다.
“여, 여긴 대체 어디야?”
대체 진선각에서 운기 중이던 그가 어찌하여 한순간에 이런 곳에 올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옆에 있던 묵유자와 송방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광경에 놀라기만 할 수도 없었다.
진송하는 이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에게 접근하여 뺨을 핥은 존재를 찾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둘러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송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목련(紫木蓮) 뒤에 살짝 튀어나온 무언가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