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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11화)
“응?”
처음엔 바람에 흔들리는 목화(木花)인가 싶었다. 하지만 곧 그것이 바람을 맞아 흔들린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잦은 떨림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목화가 겁을 먹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이랄까?
저벅저벅.
조심스레 다가가자 이내 그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백록(白鹿)!”
자목련 뒤에 어린 흰 사슴 한 마리가 고개를 빼꼼 내민 것이다.
너무 어리고 약해 보이는 흰 사슴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눈망울로 진송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뺨을 핥을 때 그가 지른 비명에 놀란 모양이다.
“괜찮아. 안 잡아먹을 테니 무서워 말고 이리 오렴.”
길조를 뜻하는 흰 사슴.
더구나 갓 태어났다고 짐작될 정도로 어린 사슴이었으니 잡아먹을 마음이 들 리 없었다.
흰 사슴은 마치 진송하의 말을 알아들은 양 더 이상 떨지 않고 자목련에서 나와 조심스레 진송하의 곁으로 다가왔다.
할짝.
“하하하. 간지러워!”
어느새 두려움이 사라졌는지 흰 사슴이 진송하의 손등을 핥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감촉이 너무 생생하다는 데 있었다.
“이상하다. 꿈치고는 너무 생생한데? 사슴아, 대체 여기가 어디니?”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하나 그런 것 치고는 감각이 너무도 생생했고, 덕분에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자 진송하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흰 사슴은 예의 그 큰 눈망울로 잠시 진송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쪽으로 뛰어갔다.
진송하는 흰 사슴이 도망치려는 줄 알고 당황하여 재빨리 외쳤다.
“어어? 어디 가니? 도망가지 마!”
그 말에 흰 사슴은 진송하를 잠시 되돌아보고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건가? 같이 가!”
흰 사슴의 뒤를 따라갈수록 진송하는 혼란이 가중되는 걸 느꼈다.
‘말도 안 돼. 무당산에 이렇게 넓은 고원지대가 있다는 소린 들어 본 적도 없다고! 그치만 여기가 무당산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라는 거지? 분명 진선각에서 운기하고 있었는데……. 잠깐, 이거 정말 꿈 아냐?’
진송하는 결국 얼마 가지 않아 재차 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 아직 이토록 생생한 꿈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뿐일 거야. 원래 나이를 먹을수록 꿈이란 게 더욱 생생해지는 걸 수도 있잖아? 아하! 그럼 나도 이제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건가?”
진송하는 그렇게 말을 내뱉고는 잠시 진 노인이 있나 없나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이런 말을 한 것을 들었다면 분명 열한 살짜리가 무슨 어른이냐고 말하며 꿀밤을 한 대 먹였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어, 어어? 할아버지?”
진송하는 놀랐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 것이다. 흰 사슴이 달려가는 방향으로 이 리쯤 떨어진 곳이었는데 분명 누군가가 석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마시고 있었다. 너무 멀어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긴 수염이 바람에 휘날리는 걸 보아하니 분명 노인임이 틀림없었다.
“에이, 설마 진짜 할아버지는 아니겠지? 분명 집에 누워 계실 테니 말이야. 아차, 이게 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구나!”
어쨌든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진송하는 그쪽을 향해 더욱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흰 사슴의 목적지도 같았던 모양인지 진송하보다 앞서 달려간 녀석은 노인의 옆에 가 멈추더니 이내 얼른 이리로 오라는 듯 진송하를 바라보았다.
그곳으로 다가갈수록 진송하는 두 가지 이유로 놀라야 했다.
하나는 아마 술이 들어 있을 거라 짐작되는 잔을 든 노인이 진짜 진 노인이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그 주위에서 너무나도 달콤하고 향긋한 향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와! 진짜 할아버지이시네? 여긴 진짜 꿈속이 맞구나. 근데 정말 향 좋다. 할아버지한테서 나는 퀴퀴한 냄새와는 정말 다르다.’
나름 오랫동안 뛰어서인지 노인과 흰 사슴이 있는 석탁 앞에 도착했을 땐 가슴이 크게 위아래로 솟았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허억! 허억! 아, 아니 왜 꿈인데도 숨이 찬 거야? 그건 그렇고 할아버지, 여기서 대체 뭐하세요?”
“…….”
“응?”
진송하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의 진 노인이라면 분명 자신을 향해 살가운 미소를 흘려야 하건만 눈앞의 노인은 무뚝뚝한 얼굴로 연신 잔 안에 든 술을 홀짝거리는 걸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꿀꺽!
하지만 실제 진 노인인지 아닌지 하는 물음은 곧 진송하의 머릿속에서 사라졌고, 이내 오감을 자극하는 액체에서 나는 향에 모든 주의가 기울어졌다.
“하, 할아버지. 그거 술이에요? 꿀꺽. 되게 맛있어 보여요. 여기까지 뛰어오느라 목이 마른데 저 한 모금만 주시면 안 돼요?”
어린 나이에 술이라니.
평소의 진송하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제는 향뿐만 아니라 언뜻 보이는 잔 안에 든 술이 내는 영롱한 색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런 말을 한 것이다.
“…….”
눈앞의 진 노인의 모습을 한 노인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계속 술을 홀짝거리는 행동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진송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진 노인의 맞은편 돌의자에 앉자마자 외쳤다.
“할아버지! 저도 주세요, 저도요!”
“…….”
그제야 잔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진송하를 바라보는 진 노인.
급기야 서서히 잔을 든 손을 앞으로 내미니, 진송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재빨리 진 노인의 손안에 들려 있는 잔을 향해 오른손을 뻗어 갔다.
휙!
“아앗! 할아버지 못됐어!”
진송하가 얼굴을 찡그리며 볼을 부풀렸다. 진 노인이 그가 내민 손을 피한 것이다.
그런 후에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 잔을 든 오른 손목을 살며시 진송하의 오른 손목에 가져다 댔다.
“뭐하는 거예요, 할아버지! 그만 놀리고 조금만 주세요, 네?”
그렇게 진송하가 사정을 함에도 진 노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덕분에 더욱 골이 난 진송하는 잔을 빼앗으려 재빨리 손목을 돌렸다.
휙!
휙!
하지만 어이없게도 진 노인의 손목이 맞붙은 채 같이 돌아갔다.
“어엇! 안 돼!”
그대로라면 잔 속의 액체가 석탁 위에 쏟아질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 노인도 원치 않는 듯 재차 손목을 반 바퀴 돌려 잔이 위를 향하도록 만들었다.
다행히 술은 쏟아지지 않았는데, 재미있는 건 그 와중에 진송하의 손목도 같이 돌았다는 것이다. 마치 두 사람의 손목을 아교로 착 붙여 놓은 것같이 말이다.
“이익!”
답답해서 손을 좌우로 흔들자 역시나 진 노인의 손목도 따라서 흔들거렸다.
신기한 건 그 와중에도 진 노인은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잔 안의 술을 한 방울도 쏟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이쯤 되자 진송하의 눈에 불이 확 붙었다.
‘좋아! 그렇게 계속 그러면 나도 방법이 있다고!’
이제는 할아버지고 뭐고 없다는 듯이 돌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반대쪽 손으로 잔을 뺏으려 드는 진송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메에에!”
그때 갑자기 옆에서 그런 모습을 구경하던 어린 흰 사슴이 울어 댔다.
그리고는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 ……어엇?’
분명 자신의 발은 바닥에 닿아 있건만 그 바닥이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니, 어지러움에 속이 울렁거리다 못해 먹은 걸 다 쏟아 내고 싶을 지경이다. 실제로 헛구역질까지 몇 번 하자 어느새 세상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찰나간의 침묵.
‘응?’
진송하는 어느새 자신이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내가 언제 눈을 감은 거야?’
그렇게 의문을 품으며 살며시 눈을 뜨자마자 진송하는 너무도 놀라 헛바람을 들이켜야 했다.
“헛! 뭐, 뭐야?”
어느새 진선각 안이었다.
심지어 바닥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분명 진선각 안에서 태극심법을 운용했을 때의 자신으로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여, 역시 꿈이었구나. 하지만 정말 생생한 꿈이었어. 그리고 대체 왜 갑자기 깬 거지?”
진송하는 꿈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장면을 기억해 냈다. 메에에하고 울던 흰 사슴의 그 안타깝다던 눈빛.
“……설마 자리에서 일어나서? 양손을 써서 그 술을 뺏으려 들어서? 아니, 둘 다인가?”
궁금함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액체를 먹고 싶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진송하는 다시 그 꿈속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진선각 밖을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는지 주변이 어두컴컴해진 것이다.
“아차! 식사 준비해야지!”
꿈속의 진 노인보다는 현실의 진 노인이 중요했다. 진 노인이 허리를 다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기에 식사는 자신이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진송하는 재빨리 목함을 제자리에 돌려놓고는 진선각 밖으로 나와 백운촌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급한 나머지 묵유자와 송방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 * *
식사를 마친 뒤 소화가 되도록 등에 이불을 받치고 앉아 있는 진 노인에게 진송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물론 송방에게 괴롭힘을 당한 일은 뺐다. 비록 꿈속을 거닐긴 했으나 이전과 다름없이 태극심법에 의해 멍을 비롯한 상처들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오. 그래, 꿈속에서 나를 봤다고? 우리 송하가 그 정도로 날 생각해 주었나 보구나.”
꿈에서 자신을 봤다는 말에 저리 말하며 웃는 진 노인에게 진송하는 마주 웃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전 거기서 할아버지께서 마시던 술을 뺏어 먹으려고 했는 걸요.”
“껄껄!”
그 말에 진 노인이 대소했다. 진송하가 꿈속에서 그런 짓을 해서가 아니라, 그런 부끄러운 이야기까지 숨기지 않고 자신에게 솔직히 말해 주는 것이 그저 좋았던 것이다.
“칫! 남은 부끄러워 죽겠는데, 왜 웃으세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하는 진송하의 말에 진 노인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질 뿐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웃음을 멈춘 진 노인은 진송하에게 이야기를 계속하라 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를 다 들은 진 노인은 꿈속의 이야기는 그저 꿈으로 치부해 버리고는 오히려 묵유자를 만났다는 말에 관심을 보였다.
‘그 녀석이 바쁜 와중에 굳이 송하를 만나 심법을 운기하라 말했다? 대체 무엇 때문이지?’
묵유자의 됨됨이를 알기에 자신이 이리된 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이 워낙 바쁘다 보니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해서란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괜히 자신 때문에 일을 하는 데 차질이 생길까 우려되어 일부러 부르지도 않았는데, 진송하와 연관된 이유라면 얘기가 달랐다.
진 노인은 혹여나 진송하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가 걱정되어 입을 열었다.
“송하야. 내일 날이 밝으면 묵유자가 있는 충허암에 가서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하거라.”
“예, 할아버지.”
* * *
다음날 아침.
진 노인과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진송하는 진 노인의 말을 전하기 위해 곧바로 초가집을 나와 내원의 충허암으로 향했다.
“어이!”
그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진송하는 순식간에 겁먹은 표정으로 제자리에 멈춰 서야 했다.
송방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어쭈, 동작 봐라. 얼른 안 와?”
“으, 응!”
진송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재빨리 송방에게 달려갔다.
이후 송방에게 이끌려 인적이 드문 이름 모를 건물 뒤편에 도착한 진송하는 이내 송방의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검이 없는 걸 보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는 눈을 꼭 감은 채 주먹이나 발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뭐하냐? 눈 안 떠?”
“어, 어? 으응.”
지금까지 말보다 주먹이 먼저 앞섰던 송방이기에 진송하는 눈을 뜨면서 오히려 더욱 불안해했다.
‘나쁜 놈! 이제는 눈도 내 맘대로 감지 못하게 만들고 때릴 생각이구나!’
하지만 예상을 깨고 송방은 다시금 주먹이 아닌 말을 걸어왔다.
“야, 어제 나 가고 나서 무슨 일 없었냐?”
“응? 무슨 일이라니? 내가 눈떴을 땐 너뿐만 아니라 작은 할아버지도 안 계시던데?”
“흐음……. 그래?”
그리고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는 송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