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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12화)
진송하는 그제야 자신이 이곳을 벗어날 이유 한 가지를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 나 지금 작은 할아버지께 볼일이 있어 가 봐야 해.”
나름 비장의 수라고 생각하며 꺼낸 말이건만 송방의 표정에는 별로 놀란 빛이 보이지 않았다.
‘으으, 어제 분명 그렇게 혼나 놓고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구나. 결국 오늘도 맞겠네!’
하지만 곧 송방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진송하의 예상을 깼다.
“그러냐? 그럼 가 봐.”
“응. ……응? 뭐라고?”
“이놈이 귓구멍이 막혔나. 가 보라고!”
“어, 어, 으응. 갈게.”
하지만 지금까지 당해 온 게 있는데 발걸음이 떨어질 리 만무했다.
진송하는 말과는 달리 제자리에서 꿈쩍도 않은 채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나 진짜 가?”
“아, 거 진짜 답답하게시리! 그래, 가라고!”
“나 진짜 진짜 간다?”
“이게 그냥 확!”
결국 진송하는 송방이 주먹을 올리자 그제야 후다닥 뛰어갔다.
“끄응. 거 진짜 미치겠네.”
진송하가 떠난 후 송방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제야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도망치긴 했지만, 돌아가고 나서야 묵유자가 진송하에게 심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래. 분명 귀신은 아닐 거야. 귀신이었다면 도력이 높으신 묵유 사숙조께서 눈치 못 채실 리가 없지. 그럼 멍이 사라진 건 그 녀석이 배운 심법 때문이겠지. 하지만 대체 그 목함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뭐야? 혹시 몰라서 사부님이 가지고 계신 도덕경을 읽어 보았지만, 그때 읽은 책과 별다를 게 없는 걸로 봐서는 평범한 도덕경이 분명한데…….’
사실 그래서 목함에 대해 물어보려고 진송하를 부른 것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질문해야 할지 몰라서 가겠다는 말에 그냥 보내 준 것이었다.
‘괜히 목함에서 빛이 나왔다고 말했다가, 미친놈 취급받긴 싫은데…….’
송방은 진송하가 사라진 곳을 말없이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한편 충허암에 도착한 진송하는 다행히 아침을 먹고 이제 막 사당 밖으로 나서는 묵유자와 마주칠 수 있었다.
‘휴우! 바쁘셔서 안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찍 왔는데, 다행히 늦지 않았구나.’
인사를 한 후 곧바로 진 노인의 말을 전하자 묵유자는 잠시 생각을 하다 말했다.
“음……. 내 오늘은 시간이 없구나. 내일 아침 일찍 들르겠다고 전해 드리거라. 그리고 그땐 너도 다른 데 가지 말고 진 노인과 함께 있거라.”
“예.”
그리고 정말 바쁜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묵유자였다.
진송하는 그런 묵유자를 배웅한 후, 이제부터 무엇을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아냐, 이참에 태극심법을 운기해 보자.’
어젯밤 진송하는 자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 본바, 분명 그 꿈이 보통의 꿈과는 다르고, 심법을 운기하는 와중에 꾼 것이니, 태극심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확신했다.
‘어제 잘 때는 분명 그 꿈을 못 꿨어. 그러니 한번 시도해 볼 가치는 있겠지. 으으, 그나저나 그 술 너무 먹고 싶다!’
허락도 없이 사당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진송하는 사당 앞뜰에 앉아 천천히 운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현은이 떠나고 지금은 묵유자 홀로 기거하는 충허암은 묵유자의 지위를 생각해 보면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이기에 확실히 운기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아 진송하는 실망스런 얼굴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칫! 안되잖아?”
그의 얼굴에 진한 실망감이 어렸다.
“아으. 내 술!”
어지간히 그 술이 먹고 싶었나 보다.
결국 진송하는 깊게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충허암으로 이어지는 얼마 되지 않는 짧은 계단을 내려가던 진송하는 계단 입구에서 찡그린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자를 보고는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멈춰 섰다.
‘도, 독한 놈! 어쩐지 안 팬다 싶었어! 여태 기다린 거냐!’
또다시 송방이었던 것이다.
“뭐해? 얼른 안 튀어 오고!”
“으, 응!”
진송하는 서둘러 계단에서 내려와 송방의 앞에 섰다.
송방은 오늘 처음 마주쳤던 때처럼 진송하를 앞에 두고도 한참을 묵묵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야! 대체 그 목함은 뭐냐?”
“뭐어?”
대번에 안색을 굳히는 진송하. 어제의 일이 다시금 떠올랐던 것이다.
송방은 그런 진송하의 태도에 다시금 인상을 쓰며 귀찮다는 투로 약간 버벅대며 말했다.
“으흠! 거, 거 뭐냐. 어제 일은 미안했다. 왠지 소중한 물건인 거 같던데 말야.”
‘얘가 미쳤나?’
진송하가 뜨악한 얼굴이 되자 송방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아, 아무튼!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야. 그 목함, 아니 도덕경…… 에이 씨! 어쨌든 그거 대체 뭐냐고! 그냥 궁금해서 그래.”
진송하도 그제야 송방의 태도가 이전과는 달라졌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 그렇게 궁금하면 말해 줄게. 사실 별거 아니야. 이야기가 좀 길어질 거 같으니까 여기 앉자.”
그렇게 말하며 진송하가 계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송방도 말없이 그 옆에 앉았다.
이어지는 진송하의 설명은 꽤 길었지만 송방은 조용히 다 들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송방은 꽤 놀랐다.
“뭐, 뭐야? 그럼 그 새것 같던 책이 무려 백오십 년이 넘은 책이란 거야?”
“응. 아버지도 같은 말을 하셨으니까, 확실한 것 같아.”
잠시 생각에 잠겼던 송방이 얼굴을 새하얗게 질린 채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그럼 정말 귀신 들린 책이란 거잖아!”
“뭐? 귀신?”
어제 일어난 일을 모르는 진송하로서는 웬 뜬금없는 소리냐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송방은 결국 참지 못하고 어제 진선각에서 자신이 본 사실을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진송하가 비명을 질렀다.
“뭐어? 목함에서 빛이? 그게 진짜야?”
“그래! 내가 직접 봤다니까!”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귀신은 아닐 거야. 당시 책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장문인께서는 진무대제의 축복이 내린 것이라 말씀하셨다니까. 그것도 진무대제께서 부리신 조화가 아닐까?”
“그, 그런가?”
송방이 약간 안심하는 사이, 진송하는 그 빛이 어제 자신에게 일어난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그냥 잘 때도, 태극심법을 운기할 때도 어제와 같은 꿈을 꾸진 못했어. 그럼 설마 목함 때문인 건가? 그래! 시험해 볼 가치는 있어.’
진송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뛰어가자 송방도 급하게 일어나 그 뒤를 쫓으며 외쳤다.
“얌마! 어디 가?”
“확인할 게 있어!”
“뭔 확인?”
그 말에 진송하는 달리는 걸 멈추고 송방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내가 꿈 이야기는 안 했구나.”
“뭔 말이야? 갑자기 웬 꿈?”
“으응. 그런 게 있어. 진선각에 도착하면 이야기할게.”
그리고 다시금 뛰기 시작하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진송하는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다시금 멈춰 서고는 송방을 돌아봤다.
진송하가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자 송방이 약간 당황한 투로 물었다.
“뭐, 뭐야?”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시금 뛰기 시작하는 진송하였다.
송방은 그런 진송하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재차 뒤를 쫓기 시작했다.
송방은 몰랐다. 앞서 가는 진송하의 얼굴에 너무나도 밝고 해맑은 미소가 어려 있음을.
* * *
진선각 안.
그곳에 도착해 진송하에게서 꿈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들은 송방이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거 아무리 봐도 개꿈 같은데.”
“아니야! 얼마나 생생했는데!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운기하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꾼다는 건, 사실 말이 안되잖아?”
“하긴……. 나도 앉아서 운기하다가 졸 정도로 멍청한 놈은 여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이익! 그러니까 안 졸았다니까!”
“크크큭!”
목함을 사이에 두고 앉아 웃으면서 티격 대는 두 사람이었다.
어제까지 일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피멍이 들 정도로 맞았던 아이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이가 좋아 보였다.
“뭐, 아무튼. 그냥 잘 때도, 심법을 운기를 할 때도 그 꿈을 꾸지 못했으니까, 어제처럼 목함을 무릎 위에 놓고, 심법을 운기해 보겠다 이거지?”
“응. 네가 목함에서 빛이 났다고 했잖아. 그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헤에.”
어제만 해도 목함 때문에 벌벌 떨었던 송방의 얼굴에, 이제는 강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야, 빨랑 해 봐. 나도 궁금하다.”
“응!”
목함을 조심스레 들어 무릎 위에 놓은 진송하는 곧이어 눈을 감고 운기를 시작했다.
‘히익!’
잠시 후 송방은 놀라서 속으로 비명을 질러야 했다. 또다시 목함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 * *
휘이잉.
‘아!’
갑자기 들리기 시작한 바람 소리.
더구나 바로 전 충허암에서 운기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에 진송하는 자신이 어제처럼 그 꿈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짝.
그래서였다.
갑자기 뺨에 닿은 감촉에도 놀라지 않은 것은.
진송하는 살며시 눈을 뜨며 눈앞의 존재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있었니?”
메에에!
역시 말을 알아듣는 양 메에에하고 대답하는 건 금세 울 것같이 큼지막한 눈을 한 흰 사슴이었다.
흰 사슴은 곧 어제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따라오라는 양 앞서 뛰기 시작했다.
“에휴! 또 거기까지 뛰어야 되나? 내 꿈인데 그냥 단숨에 날아갈 순 없을까?”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결국 진송하는 흰 사슴을 놓칠세라 아름다운 초원 위를 뛰기 시작했다.
“헉헉! 정말 멀다!”
마침내 흰 사슴을 따라 석탁 앞에 도착한 진송하였다.
숨을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니 지금의 광경이 어제와 완전히 똑같음을 깨달았다. 물론 석탁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진 노인도 여전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이제는 꿈속의 존재란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진 노인의 모습을 한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어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역시나 진 노인은 진송하의 인사를 못 들은 양 술만 홀짝일 뿐이었다.
“끄응.”
결국 어제와 같이 맞은편에 앉자, 예상대로 진 노인이 진송하를 지긋이 바라보며 술잔을 내밀었다.
‘역시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오늘은 기필코 마시고 말 테야!’
애초에 이 꿈을 다시 꾸기 위해서 오늘 했던 모든 고생이 바로 저 술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진송하는 새삼 각오를 다지며 술잔으로 두 손을 가져갔다.
……분명 두 손이었다.
“어, 어어?”
메에에!
다시금 울려 펴지는 안타까워하는 듯한 흰 사슴의 울음소리. 그리고 빙글빙글 도는 세상. 찰나간의 침묵.
결국 진송하는 술잔은커녕 진 노인의 손목에 손 한 번 못 대고 눈을 떠야 했다.
사정을 다 들은 송방은 진송하에게 꿀밤을 먹였다.
콩!
“아야!”
“너 바보냐? 분명 니 입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두 손을 쓰면 꿈에서 깨어나는 것 같다고 했잖아! 그런데 뭐? 도착하자마자 두 손을 내밀었다고? 에라, 이 천치야!”
콩!
“아야! 하지만 눈앞에 할아버지가 계시잖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이 나간 걸 어떡해? ……그건 그렇고, 어땠어? 목함에선 빛이 났어?”
목함으로 주제가 바뀌자 송방의 얼굴에 금방 흥미로운 기색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