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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13화)
“어. 분명 어제처럼 목함에서 빛이 났어. 그런데 내가 그땐 금방 도망…… 아, 아니, 밖으로 나가서 몰랐는데, 빛은 얼마 가지 않아 금방 사라지더라.”
“으음, 그래? 그럼 내가 운기하고 나서 시간은 얼마나 흐른 거야?”
“어디 보자…… 한 한 식경쯤?”
“그 정도면 내가 죽어라 뜀박질한 시간과 비슷하네. 바꿔 말하면 꿈속이랑 현실이랑 시간은 비슷하게 흘러가나 봐.”
“그렇군. 그럼 이제 어쩔 건데?”
송방의 질문에 진송하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답했다.
“당연히 다시 해 봐야지!”
“좋아! 그럼 빨랑 다시 심법을 운기해!”
“알았어!”
하나의 목적을 위해 완벽히 의기투합하게 된 두 사람이었다.
五章. 태극을 배우다
“칫! 너도 내가 한심하니?”
다시금 들어간 꿈속에서 이번엔 흰 사슴이 뺨을 핥지 않고 자신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자 진송하가 내뱉은 말이었다.
흰 사슴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분명 한심함이었기 때문이다. 한낱 동물이 단순히 눈빛만으로 저토록 감정을 잘 표현하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야! 그만 쳐다보고 길이나 안내해!”
이미 송방의 놀림과 꿀밤으로 잔뜩 골이 난 진송하의 외침에 흰 사슴은 가소롭다는 듯 짧게 울고는 이전과는 다르게 엉덩이를 좌우로 씰룩거리며 여유롭게 걷기 시작했다.
‘으으. 왠지 저 녀석도 날 골리는 거 같네……. 맞아, 분명 골리는 거야!’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번이 벌써 세 번째인데도 불구하고 낮은 둔턱들로 이루어진 주변 풍경은 다 거기가 거기 같아서, 흰 사슴의 안내를 받지 않고는 석탁이 있는 곳까지 찾아갈 자신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충분히 골렸다고 생각했는지 흰 사슴이 속력을 내기 시작했고, 투덜거리며 걷던 진송하도 이내 흰 사슴을 따라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석탁 앞.
‘이번에는 절대 실수하지 말자!’
이번에는 곧바로 돌의자에 앉지 않고, 우선 마음을 다지는 진송하였다.
메에에!
여전히 진 노인의 옆에 앉은 흰 사슴이 이번엔 진송하를 보며 응원한다는 듯 울어 댔다.
‘변덕스런 녀석!’
흰 사슴을 한번 째려본 진송하는 다시금 술잔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그러자 술이 뿜어내는 주향과 그 영롱한 색이 또다시 진송하의 욕망을 자극했다.
‘아, 안 돼! 정신 차리자!’
진송하는 그렇게 속으로 외치며 실수를 하면 다시금 현실로 돌아가게 된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가까스로 욕망을 억누르고는 침착하게 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어젯밤과 같이 서서히 손목을 가져다 대는 진 노인이었다.
‘결국 이 상태에서 술잔을 빼앗으라는 건가?’
두 사람의 손목 바깥쪽이 마주치고 있는 상황. 다른 손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술잔을 빼앗으려면 손목을 빼내어 재빨리 술잔을 낚아채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제도 내 쪽으로 손을 당기지 않는 이상은 맞붙은 손목이 떨어지지 않았어. 끄응! 그럼 대체 어쩌라는 거야?’
진송하는 손목을 마주친 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술잔을 뺏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어어…….”
그런데 마치 진송하의 그런 고민을 눈치챈 양, 진 노인의 손목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커다란 원 하나를 그리는 손목.
당연히 그 손목과 맞붙은 진송하의 손목도 같이 돌아갔다.
‘이게 뭐하자는 거지? 근데 이건…….’
그렇게 속으로 의문을 품으면서도 이상하게 몸 안이 간지러운 건 왜일까?
‘아, 태극심법이다! 손목의 움직임이 마치 태극심법을 운기할 때의 느낌과 비슷해!’
아직 몸 안을 관조할 능력까진 없었으나, 느낌만으로도 현재 손목의 움직임이 심법을 운기할 때 기가 도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그만큼 진송하가 꾸준히 태극심법을 익혀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이상하게도 손목의 움직임에 집중할수록 술에 대한 욕심이 옅어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갑자기 목소리가 울린 건 그때였다.
― 획취방기(獲取放棄).
버려야 얻는다.
진송하는 이 목소리가 바로 눈앞의 진 노인이 낸 소리라는 걸 깨닫고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가 놀란 건 목소리의 내용이 아니라 목소리 자체였다.
‘이건 할아버지 목소리가 아니야. 대체 누구지? 내 꿈인데, 왜 내가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더구나 입을 연 것 같지도 않은데?’
슬슬 이 꿈이 평범한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 시작하는 진송하였다.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음인가? 재차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획취방기(獲取放棄). 비이기무사야 고능성기사(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버려야 얻는다. 사심이 없어야 자신을 성취할 수 있다.
진송하는 그제야 목소리의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버려야 얻고, 사심이 없어야 자신을 성취할 수 있다고? 아, 내가 술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술을 얻는다는 건가? 어라? 하지만 후에 온 말은 그런 욕심 자체를 가지지 말아야 된다고 말하는 거 같은데? 으으, 대체 뭘 어쩌라는 거지?’
이해할 수 없으니 자연 답답해졌다.
그때였다.
메에에!
‘어, 어이! 왜 울어? 에엑! 설마? 저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내쫓는 거야?’
갑작스런 울음소리에 흰 사슴을 바라보니 예의 익숙한 안타깝다는 눈빛이 보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주위가 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이내 진송하는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아니 기껏 가르친다는 게 뭐? 버려야 얻어? 이야, 누가 진선각 아니랄까 봐 어떻게 기연도 그리 고리타분하냐?”
내심 불세출한 무학을 얻을 거라 기대했던 송방이었기에 진송하의 말을 듣자 실망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진송하의 생각은 달랐다.
“아냐. 그래도 손목을 빙글빙글 돌리는 건 뭐랄까? 꽤 있어 보였어.”
“뭐? 빙글빙글?”
송방은 그 말에 왠지 무언가 떠오를 것도 같았다.
‘뭔가 익숙한데?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말이야…….’
그때 진송하가 시범을 보일 목적으로 팔을 휘두르며 말했다.
“응! 이렇게 말이야.”
휭휭.
오른팔을 들어 단순히 빙글빙글 돌리는 진송하.
송방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 확 사라지는 걸 느꼈다.
“……뭐야 그게? 그냥 팔을 돌리는 거구만. 대체 뭐가 있어 보여?”
“그, 그래?”
“에이씨, 시간만 버리고 이게 뭐야? 난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갈란다!”
송방이 그렇게 말하며 진선각 밖으로 나가 버리자 진송하도 그제야 해가 중천에 떴다는 걸 깨달았다.
“아! 할아버지 식사!”
그렇게 외친 진송하도 진선각을 나와 서둘러 백운촌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진 노인과 함께 점심 식사를 마친 진송하는 혹여나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진 노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 도덕경을 무릎 위에 두고 태극심법을 운기했더니 꿈속으로 들어갔다?”
“네. 어제와 똑같은 꿈이었어요. 할아버지도 여전히 나오셨고요.”
진 노인은 어제와 달리 꿈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그 역시 이제는 진송하가 겪은 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걸 느낀 것이다.
‘백오십여 년간 조금도 낡지 않았던 그 책에 그런 묘용이 있었단 말인가?’
이는 정말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책이 발견된 곳이 바로 장삼봉 조사께서 등선하신 등선암이다. 태극심법 역시 조사께서 만드신 무학. 혹여 이 두 가지가 작용하여 그런 기사를 만들어 낸 것일지도…….’
진송하는 진 노인이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재차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꿈속에서 할아버지의 모습을 한 그자가 획취방기. 비이기무사야 고능…… 고능…… 아! 고능성기사라고 했어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응? 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
생각에 잠겼던 진 노인은 혹시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획취방기. 비이기무사야 고능성기사라고요.”
‘허! 획취방기는 몰라도 뒤에 오는 말은 필시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거늘!’
그 내용이 특이해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기사를 만들어 내어 전한다는 게 겨우 그 책에 든 내용이라니? 아무리 도덕경이 도가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경전이라 해도, 만들어 낸 기적에 비해 너무도 평범한 가르침이라 생각된 것이다. 태극심법의 구결을 모르는 진 노인이었기에 태극심법에도 도덕경의 구절이 들어 있단 사실까지는 알 리 없었다.
“꿈속에서 내 모습을 한 자가 다른 말은 안 하였느냐?”
“네. 어제도 한마디도 안 한 걸요. 할아버지랑 달리 말도 표정도 없고 정말 무뚝뚝했어요.”
“쩝. 거 어째 내가 수다스럽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수다스러우신 거 맞잖아요?”
‘끄응.’
너무 태연히 답하니 무안해진 진 노인이었다.
“아무튼 할아버지,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일단 물어보니 대답은 해 줘야겠단 생각에 진 노인은 머릿속이 복잡함에도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뭐, 사실 아주 간단하여 설명할 것도 별로 없단다. 흔히 무언가에 빠져 집중하는 걸 삼매(三昧)의 경지(境地)라 한다. 삼매란 무아(無我), 무심(無心), 정신통일(精神統一)을 말함이니, 바로 나를 잊고, 사사로운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뜻이지. 우리 도가에서는 이를 좌망(坐忘)이나 존사(存思)라 하고, 불교에서는 반야정관(般若正觀)이라고도 한단다. 성취를 위해서는 모든 걸 잊고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니, 이것이 곧 획취방기고, 비이기무사야 고능성기사가 되는 것이지.”
“헤에.”
뭔가 중간에 어려운 말이 섞여 있긴 했지만 한결 이해하기 편해진 진송하였다.
그런 진송하에게 진 노인은 아예 지금까지 한 말을 한마디로 정리해 주었다.
“그러니까 거기에 그냥 빠져들란 말이다. 대체 무엇에 빠져들란 건지는 모르겠다만…….”
그 말에 진송하가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 일어나며 말했다.
“이거예요, 이거!”
휭휭.
송방의 앞에서처럼 팔을 빙빙 휘둘기 시작하는 진송하였다.
“……그, 그게 무엇이냐?”
“모르겠어요. 그냥 이렇게 팔을 빙빙 돌리면서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허, 허허.”
진 노인 역시 무언인지 짐작조차 못 하였기에 그저 허무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 참. 그리고 묵유자에게 이야기는 전했느냐?”
“예. 오늘은 바쁘셔서 무리고, 내일 아침에나 들리신 댔어요.”
“그래? 아무래도 그때 네 꿈 이야기도 해 봐야겠다. 그 팔 동작은 잘 모르겠다만 일단 쉬이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구나. 그러니 그때까지는 혹여라도 그 꿈속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아라.”
“예에?”
진 노인이야 그저 진송하가 잘못될까 걱정되어 하는 말이었지만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도전할 요량이었던 진송하로서는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평소 진 노인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던 그였지만, 역시 이번만큼은 술에 대한 욕망이 너무 강했다.
‘아냐. 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그렇다.
그에게는 그보다 더 우선인 것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진송하는 그래서 속으로 진 노인에게 죄송스런 마음을 가지면서도 진선각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손에는 작은 보자기 하나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왔냐?”
“헤헤. 응!”
진송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분명 질렸다는 듯이 진선각을 나섰던 송방이 미리 와서 진송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보같이 웃기는! 얼른 다시 들어가 봐.”
송방이 그리 말하며 목함을 내밀자 진송하는 그것을 한 손으로 받아들며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보자기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