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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14화)


엉겁결에 보자기를 받아 든 송방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뭐냐?”
“점심 먹고 잠깐 짬 내서 만든 거야. 내가 들어가 있는 동안 혼자 기다리고 있으면 심심할 거 아냐.”
“호오.”
송방이 궁금한 얼굴로 보자기를 풀자 그릇에 담긴 작은 경단 여러 알을 볼 수 있었다.
“버섯이랑 풀을 말려서 빻은 다음에 꿀을 섞어서 빚은 건데, 은근히 맛있어.”
하나를 집어 입에 넣은 송방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마, 맛있는데? 이걸 직접 만들었다고?”
“응.”
백운촌에 살며 내원의 요리를 담당하는 손 씨에게 배운 음식 솜씨였다. 더구나 무당 안에서 도사로 살아오며 싱거운 음식들을 주식으로 먹어 온 송방이기에 맛있다고 느끼는 게 당연했다.
“뭐…… 고, 고맙다.”
“헤헤. 응!”
밝은 얼굴로 대답하며 진송하는 생각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술이 아니었다. 이처럼 송방과 인연의 끈으로 이어진 것이야말로 진 노인의 당부에도 포기할 수 없던 이유였다. 아직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말할 수 있으리라.
친구라고.
여전히 멍청하게 웃음을 흘리던 진송하는 송방이 다시 한 번 재촉하고서야 태극심법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 * *

확실히 이번에는 달랐다.
술보다 더 중요한 걸 깨달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진 노인에게 가르침을 받아서였는지는 몰라도 술의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손목을 맞댄 지 벌써 한 시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진송하는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이 팔을 돌리는 행동은 정말 신기했다. 어느새 진송하는 술도, 송방도, 진 노인도 잊은 채 오로지 팔의 움직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른바 진 노인이 말한 삼매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어느새 진송하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얼마나 흘렸는지 팔에서 흘러내린 땀이 석탁에 고일 정도였다.
그리고 드디어 몸속에서 태극심법이 스스로 움직이더니 이내 손동작과 긴밀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쉬쉭. 쉬쉭.
진송하의 팔 동작 하나하나에 대기가 울어 대기 시작했다. 내기를 다스려 그것을 힘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진송하는 알까? 이것이 바로 무(武)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일반적으로 무의 척도를 절정이니, 화경이니, 자연경이니 하는 잣대로 잰다지만, 도가 계열의 문파들은 최고의 경지를 일컬어 무극지경(無極之境)에 오른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무당파만은 달랐다.
장삼봉은 생전에 무극이야말로 혼돈을 의미함이니, 진정한 무의 완성은 무극이 아닌 태극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런 사상에 입각하여 만든 것이 바로 태극검과 태극권, 태극심법이라는 태극의 무학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태극의 무학이란 곧 무(武)를 완성할 수준에 올려야 가능한 무공이란 의미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대성하기 힘든 상승 무학이라는 말이었으니, 이 가설대로라면 지금의 무당파에서 태극이 잊혀진 것도 그리 이상할 바 없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진송하는 그 태극을 배워서 내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경을 통해 꿈속에서 기이한 수련을 해서만도, 내공을 쌓을 수 없는 몸으로 우직하게 태극심법을 익혀서만도, 천년삼왕과 빙정, 소청단이라는 개개의 특성이 따로 노는 영약들을 먹어서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그 모든 상황이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가히 기연과 기연이 만나 이루어진, 어쩌면 정말 진무대제의 안배일지도 몰랐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내기의 발현이 익숙해질수록 두 사람의 동작은 힘이 들어가기보다 오히려 유순해져 간다는 점이었다.
처음에 강맹하게 울어 대던 대기는 차츰 조용해지더니, 이제는 사방이 정적에 휩싸인 채 두 사람의 팔만 돌고 있는 기이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진 노인의 모습을 한 자의 손목이 진송하의 손목에서 떨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튕겨져 나갔다는 게 옳았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그 손에 쥐어져 있던 술잔의 술이 바닥에 버려지고야 말았다는 점이었다.
“아앗! 술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진송하가 그렇게 외치며 바닥에 버려진 술을 안타까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이고, 아까워라. 하, 핥아 볼까?”
그렇게 바닥에 쏟아진 술에 정신을 팔린 진송하는 눈앞의 진 노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메에에!
그때 갑자기 흰 사슴이 울자 진송하가 놀라 외쳤다.
“어어? 야! 또 쫓아내려고? 거 술잔에 뭍어 있는 거 한 번 핥을 시간이라도 주지!”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세상이 빙빙 돌지 않았고, 주변이 어두워지기는커녕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 어어?”
그러고 보니 흰 사슴의 표정도 이전과 달랐다. 마치 성장한 자식을 보며 뿌듯해하는 부모의 얼굴 같다고나 할까?
“그 얼굴에 그런 느끼한 표정이라니, 안 어울려!”
흰 사슴을 바라보며 그리 외친 진송하는 이내 세상이 너무 밝아지는 바람에 눈이 부셔 눈을 꼭 감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으응?”
어느 순간부터 빛이 차츰 옅어지고, 눈앞에 드러난 세상은 꿈속이 아닌 진선각 안이었다. 어느새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이번에는 왠지 쫓겨났다기보다는 배웅을 받아 나온 느낌이네. 역시 이번에는 성공한 건가?’
대체 뭘 성공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진송하는 그렇게 느꼈다.
눈앞에서 송방이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옆의 탁자에 놓인 작은 그릇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이전과 달리 꿈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느끼지 못한 진송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 쪽으로 다가가 밖을 바라봤다.
“허엇! 뭐, 뭐야?”
“헉! 뭐, 뭐야?”
진송하의 외침에 송방도 덩달아 놀라 잠에서 깨며 외쳤다.
“송방! 저거 봐!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어!”
점심을 먹고 곧바로 꿈속으로 들어간 걸 고려하면 세 시진은 족히 흘렀다는 말이었다.
“아함. 야, 너 진짜 독하더라. 나도 두 시진 정도까지는 참고 지켜봤지만 결국 잠들었다니까?”
실제로는 진송하가 만든 음식을 다 먹은 후 반 시진도 못 버티고 잠들었지만, 송방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다 이내 지금 상황에 생각이 미쳤는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야, 그러고 보니 이렇게 오래 있었던 건 처음이잖아? 뭐야,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 응? 빨랑 말 좀 해 봐.”
“으, 응.”
대답은 했지만 진송하는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자신이 대체 무엇을 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이미 송방에게 실망을 안겨 줬던 경험이 있는 그것 말이다.
휭. 휭.
오전과 마찬가지로 오른팔을 돌리기 시작한 진송하였다.
하지만 송방의 반응이 오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입이 쩍 벌어지고 작은 눈을 최대한 크게 뜬 것이 엄청 놀란 모양이다.
“야, 야! 그, 그게 대체 뭐냐?”
“응? 뭐가? 히, 히익?”
팔을 돌리던 진송하도 놀랐다.
사실 뭐라고 콕 찝어 말할 만한 변화는 아니었지만 진송하 자신이 보기에도 지금 팔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게 보였던 것이다.
“이게 뭐지?”
뭐랄까, 너무 반복해서 다른 데 정신을 쏟고 있는 데도 팔이 알아서 돌아가고 있달까? 진송하는 그렇게 반문하면서도 계속 팔을 돌리고 있었다.
“야, 니가 물으면 어쩌냐? 근데 정말 어떻게 된 거야?”
“나, 나도 몰라! 아무래도 오전에 내가 보여 준 그 동작을 오늘은 내내 반복한 거 같은데. 그러다 보니 이렇게 된 거 같아!”
나름 크게 떠진 송방의 눈이 슬슬 기대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역시! 이거 정말 기연이다! 절대 심상치 않아 보인다고! 분명 잊혀진 무당의 절학을 배운 거야, 넌!”
“에, 에이 설마. 난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몸이랬는걸?”
송방도 이제는 사정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전혀 동의할 수 없다는 듯이 재빨리 말했다.
“아냐, 아니라고. 기연이 괜히 기연이냐? 그런 너라도 무공을 익히게 만들었으니 진짜 기연인 거지!”
“헤에…….”
그렇게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진송하의 오른팔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송방. 근데 이거 어떻게 멈추지?”
“그, 글쎄?”
결국 송방이 반 시진 가까이 팔에 매달려 억지로 팔을 멈춰 세운 끝에야 두 사람은 진선각을 나설 수 있었다.

* * *

다음날 아침.
약속한 대로 백운촌으로 묵유자가 찾아왔다.
진송하는 진 노인과 나란히 앉아 맞은편에 앉은 묵유자의 말을 경청했다.
진 노인은 묵유자가 오자마자 진송하를 진맥하고 심법을 운기하라고 한 연유를 물었고, 이에 대해 묵유자가 솔직히 답하자, 곧바로 노성을 토해 냈다.
“뭔 소리야! 네 녀석이 완전히 치료가 되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뭐라? 양기로도 모잘라 빙정의 음기까지 진기로 소화되지 않고 그대로 있어?”
“……죄송합니다.”
분명 자신이 해결했다 말했었는데, 이제 보니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 묵유자로서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진 노인도 더 이상 묵유자만 탓할 수는 없었다. 이게 어디 묵유자 탓이겠는가?
고개를 돌려 진송하를 바라보니 아닌 척 애를 쓰고는 있어도 겁먹은 게 분명한 눈치다.
‘쯧쯧. 왜 아니 그렇겠나. 예전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이니…….’
진송하는 진정으로 겁먹고 있었다.
이제 막 송방과 친해지고, 꿈속에서 기이하지만 꽤나 즐거운 일을 겪고 있는데, 예전의 몸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겁을 집어먹는 게 당연했다.
‘만약 예전의 몸으로 돌아가면 송방도 날 거들떠보지 않겠지?’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이전처럼 죽어라 맞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진송하는 진심으로 완전히 무시를 당하던 때에 비하면 송방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시절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묵유자도 진송하의 기색을 느끼고는 황급히 말했다.
“걱정 말거라. 양기와 음기가 섞이지 않고 있다고는 하나 소청단 때문인지, 아니면 태극심법 때문인지, 묘하게 두 기운이 네 몸 안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더구나. 외부에서 물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지만 않는다면 당장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 진송하의 얼굴이 오히려 하얗게 질렸다.
물리적 충격이라니.
지금까지 매일 송방에게 목검으로 맞았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저, 저어…….”
원래라면 걱정을 끼칠까 염려되어 어른들에게 말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까지 숨기기에는 과거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너무도 컸다.
결국 송방에게 지금까지 거의 매일 맞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만 진송하.
당연히 이에 진 노인은 당장 그 빌어먹을 놈들 데리고 오라고 성을 냈고, 진송하는 그런 진 노인을 막느라 애써야 했다.
반면 묵유자는 자신의 예상이 틀리자 속으로 당황스러워했다.
‘그래. 분명 어제 본 멍 자국은 상당히 심하게 맞은 것 같았다. 더구나 거의 매일 그런 일이 있었다니……. 그렇다면 내 예상보다도 음양의 균형이 단단하다는 말이 아닌가? 아무리 소청단이라고 해도 그 정도까지 효과를 발휘할 수는 없을 터. 그럼 역시 태극심법의 묘용인가?’
가뜩이나 무당 내의 일로 고민이 많은 묵유자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는 게 있어야 방법을 찾을 텐데, 태극심법으로 그 원인이 넘어가자 도대체 감이 잡히는 게 없었던 것이다.
성을 내던 진 노인도 묵유자가 생각에 빠진 것을 보자 불현듯 어제 진송하가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래! 혹여 그것이 상관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예? 무슨 말씀이신지?”
묵유자가 묻자 진 노인이 어제 진송하에게서 들은 꿈 이야기에 대해 알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