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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15화)


묵유자는 송방이나 진 노인보다도 더 심하게 반응했다. 당장 그 자리에 일어나며 소리를 지른 것이다.
“세,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어이가 없구나! 그럼 그저께 운기에서 깨어나지 않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단 말인가?’
사실 너무 믿기 힘든 말이라 혹시 진 노인이 자신을 놀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진 노인이 말한 내용 중 심상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송방도 조금이나마 떠올린 것을 그가 놓칠리 없었다.
“송하야, 팔을 돌렸다 했지? 어디 한 번 나한테 그걸 보여 주겠느냐?”
“예? 예에.”
그때 진 노인이 끼어들었다.
“글쎄, 네가 무슨 기대를 하는지는 알겠다만, 어제 내가 보니 전혀 다르더구나.”
“그렇……습니까?”
진 노인의 말에 묵유자는 단숨에 풀이 죽었다.
‘하긴 무려 팔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무당에서만 보낸 진 노인께서 직접 보고도 못 알아보셨을 리는 없을 터.’
지금까지 전혀 감도 잡을 수 없던 사실들이 그 하나만으로 긴밀히 연결되는 것을 느꼈기에 묵유자는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진송하의 입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저, 저어…… 이제는 달라요.”
무거운 분위기 때문인지 그 말소리가 매우 작았지만 침묵에 휩싸인 좁은 방 안에서 진 노인과 묵유자가 그 말을 못 들을 리 없었다.
“송하야, 그게 무슨 말이냐?”
“그, 그게…….”
묵유자가 묻자 진송하는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한동안 고민했지만 딱히 말로 풀어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보세요. 어제랑은 달라요. 송방도 다르다고 했는 걸요.”
휭. 휭.
진 노인과 묵유자는 막연히 무언가 있다고 느낀 진송하와 송방과는 달랐다.
묵유자가 부르짖었다.
“이, 이것은!”
진 노인이 감개무량한 얼굴로 말했다.
“아아! 우주 만물을 관장하시는 원시천존께서 혼원(混元)의 세상에 무극(無極)을 내리시나, 음양미분(陰陽未分)의 체(體)인 무극으로는 진멸지경(盡滅之境)에 이른 인세를 구원할 길이 없었노라. 이에 진무대제를 보내 무극을 음과 양으로 나누라 명하니,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태극(太極), 태극이라!”
두 사람의 기묘한 반응에 진송하는 죽어라 팔을 멈추기 위해 애썼다. 어제와 같이 마음대로 제어가 안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제 한 번 경험이 있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 팔로 억지로 잡아 멈추어 내린 진송하는 의문스런 얼굴로 진 노인에게 물었다.
“그게 뭐예요, 할아버지?”
“송하야! 네가 진정…… 진정 무당의 복덩이로구나!”
그렇게 말하는 진 노인의 눈에선 어느새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송하는 진 노인이 그렇게 감격하며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어제 한 당부를 어기고 꿈속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어제 송방과 만나 다시 꿈속에 들어갔다고?”
“예. 죄송해요, 할아버지.”
“허허. 아니다. 그 결과가 이리 좋게 나왔는데 죄송해할 것 전혀 없다.”
그런데 눈물을 닦아 낸 뒤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 진 노인과는 다르게 묵유자의 얼굴은 점점 굳어만 갔다.
뒤늦게 이를 눈치챈 진 노인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뭐냐? 어찌 그리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어?”
“아무래도 이 사실은 당분간 비밀에 붙여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당장 장문인한테 말씀드리러 가도 모자랄 판에 비밀에 붙여?”
진송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 무공에 대해 마뜩잖은 시각을 지녔던 진 노인은 장하다고 좋아하는데, 묵유자의 표정은 굳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묵유자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진 노인, 잊으셨습니까? 십여 년 전 그 도덕경이 발견될 당시의 상황을요. 다른 사람들은 그 경전이 아직도 누군가가 장난을 친 것이라 여기고 있을 겁니다. 그때 말해 봤자 오히려 화를 부추기거나 실망감을 더할 것 같아 장문인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때의 상황을 떠올린 진 노인은 묵유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 분명 그랬지. 그런데 그게 무슨 큰일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때의 사정을 솔직히 말하면 장문인께서도 이해를 하실 텐데?”
“네. 물론 이해를 해 주실 거라고 저도 믿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일뿐입니다. 잊으셨습니까? 제가 송하에게 태극심법을 가르쳤다는 것을요.”
그제야 진 노인도 묵유자의 얼굴이 좋지 않은 이유를 짐작했다.
“으음. 그러고 보니 공교롭구나. 이번에 일어난 일의 배경이 된 것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에 부친 것들밖에 없어.”
“예. 바로 그것입니다. 더구나 모두 제 손에서 그리된 것이라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그제야 진 노인은 더더욱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네가 장문인이 되는 것에 반대하는 아이들이 이번 일을 쉬이 넘기지 않을 게다, 이 말이냐?”
무당이라는 중원 최고 문파의 장문인 자리를 탐내는 자가 없을 리 없었다.
더구나 묵유자는 대제자도 아니었고, 유극 진인이 그를 제자로 거둔 시기가 늦어서, 배분에 비해 다른 묵 자 항렬의 도사보다 어린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묵유자가 장문인 자리에 내정된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 많았다.
더구나 진 노인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예. 사실 평소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특히 요즘 들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게냐?”
“곧 사형께서 오실 것 같습니다.”
“뭐? 묵경 그놈이?”
묵경자(默境子).
유극 진인의 첫째 제자이자, 묵유자의 사형인 그는 지금까지 황실에서 황족들을 상대로 장생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무당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말이었다.
진 노인은 삼십여 년 전, 제 한 몸 바쳐 무림을 구하겠다며 무당을 뛰어나간 묵경자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음인가? 얼굴은커녕 묵경자가 당시 어떤 마음으로 떠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진 노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까지 황실로 간 무당의 제자가 무당산으로 돌아온 적이 없지 않느냐?”
“얼마 전, 오이라트에게 납치되었다 돌아온 전 황제 주기진이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덕분에 현 황제인 주기옥이 폐위되고, 주기진이 복위하였다고 합니다. 사형께서는 끝까지 중립을 지키신 끝에 목숨은 지킬 수 있으셨지만, 그래도 주기옥이 황제였을 때 그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결국 자금성 밖으로 내쳐졌다고 합니다. 아직은 북경에 머물고 계시다지만, 언제까지 그곳에 있을 수는 없으실 테니 아마 곧 무당으로 돌아오시겠지요.”
현재 나라 전체가 이 사건으로 인해 들끓고 있었다.
이는 무림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특히 정도무림맹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간 황궁과 긴밀히 연을 맺고 있던 무당파 덕분에 독산 옥 광산을 독점적으로 관리하여 금전적으로 커다란 이익을 거두어 왔다. 그런데 무당과 황궁의 가교 역할을 하던 묵경자가 자금성에서 쫓겨났으니, 곧 옥 광산의 관리권을 황궁에 돌려주어야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맹 전체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당에서만 지내던 진 노인에게 황실에 변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리 크게 느껴질 만한 소식은 아니었다. 그저 이로 인해 무당이 피해를 입을 거란 사실을 짐작하여 안색을 굳힐 뿐이었다.
하지만 묵유자는 입장이 달랐다.
그간 유극 진인의 뒤를 이어 묵유자가 장문인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건 거의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분위기였는데, 묵경자가 돌아온다면 앞으로 차기 장문인 선정 문제는 혼돈에 빠질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묵유자가 말을 이었다.
“일이 너무 공교롭게 되었습니다. 평소라면 모르겠으나 이 소식을 듣고는 그간 별 뜻을 표하지 않았던 묵 자 항렬의 다른 사형들도 제가 사부님의 뒤를 잇는데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아마 사형께서 돌아오셔서 장문인 자리가 불확실해지면,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심산이겠지요. 이런 와중에 이번 일이 알려지면 어떻게든 저한테 불리하도록 이끌어 갈 것이 분명합니다.”
“으음. 하지만 결과적으로 송하가 태극을 찾아내지 않았느냐.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게 다 용서될 수 있지 않을까? 내 생각에는 오히려 너한테 득이 될 것 같다만?”
물론 그것을 묵유자라고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고개는 가로저어졌다.
“왜 그러느냐?”
“태극을 완전히 찾아낸 것이라면 아마 송하에게 상을 내릴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장문인 자리를 승계하는 문제도 별 탈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전혀 소용이 없을 겁니다.”
“아니, 대체 왜?”
이번엔 진 노인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묵유자가 답답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저 정도는 사실 태극을 포기하기 이전의 도사들도 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지금 송하가 하는 걸 장문인께 보여 드려 봤자 오히려 암묵적으로 함구하기로 한 태극을 왜 이제 와서 끄집어낸 것이냐며 노발대발하실 게 뻔하단 말입니다. 사실 이 정도 수준이면 꿈 이야기조차 믿지 않으실 겁니다. 아마 제가 몰래 가르쳐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시겠지요. 혹여 예전에 도덕경에 장난을 쳤다고 믿고 계신 사부님은 그것까지 제가 꾸민 것이라고 하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으음. 그것도 그렇구나…….”
그제야 진 노인도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중요한 건 현재 진송하의 실력이었던 것이다. 워낙 오랜만에 본 것이라 놀라긴 했으나 사실 이 정도는 꿈속에서 수련받지 않고 묵유자같이 뛰어난 스승 밑에서 배우기만 해도 금세 깨우칠 수준밖에 되질 않았다. 무당에서 태극이 사라진 것은 이 정도도 못 했기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묵유자의 말은 결국 꿈속의 이야기를 믿게 하기 위해서는 이 이상을 해내어야 하고, 그때까지는 비밀에 붙여야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것이란 말이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이 일은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됩니다. 사실 이후로 송하의 진전이 어느 정도가 될지도 확실치 않지 않습니까? 더욱이 송하의 몸 상태는…….”
묵유자가 그렇게 말을 하며 안쓰런 얼굴로 진송하를 바라보자 진 노인은 이내 진송하가 내공을 쌓을 수 없는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그것도 그렇구나. 더구나 사람들이 믿어 준다고 해도 문제일 게다. 그들이 이 사실을 알면 송하에게만 온전히 맡겨 둘 리도 없겠지. 아마 책을 빼앗아 재능 있는 아이들에게 태극심법과 더불어 가르칠 것이 뻔할 게다.”
잡일꾼이라는 신분이야 처음 현은이 제자로 삼겠다고 공공연히 말을 하며 거둔 것이다 보니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내공을 쌓을 수 없는 몸이란 사실이 치명적이었다.
‘더구나 다른 것도 아닌 무당의 뿌리나 마찬가지인 태극과 관련된 일이다. 아무리 사부님이라 하셔도 송하의 사정을 봐주긴 힘드시겠지.’
묵유자는 굳은 얼굴로 진송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송하야. 너도 쭉 듣고 있었으니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겠지? 그러니 앞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예.”
진송하는 무거운 얼굴로 대답하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 상황이 심각하게 변한 거지? 그냥 계속 송방과 함께 놀고, 무공을 익혔으면 좋겠는데.’
지난 며칠간은 기이한 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풀기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송방과의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왠지 지금부터는 그것이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진송하를 불안케 만들었다.



六章. 꿈속에서 술을 얻다


“야, 임마! 왜 이렇게 늦어? 너 기다리…… 엥? 아, 안녕하세요?”
“어험!”
진송하가 진선각으로 들어오자 송방은 늦게 왔다며 구박을 하려다, 곧바로 진 노인이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뒤따라 들어오자 당황하며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진 노인은 그저 헛기침을 내뱉은 후 못마땅한 얼굴로 송방을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뭐, 뭔 짓이래?’
하지만 그런 의문도 진 노인을 부축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뒤늦게 알아차리고 나서는 쏙 들어가 버렸다.
송방은 생각을 멈추고 반사적으로 자리에 벌떡 일어나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며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사숙조님!”
“흐음…….”
진 노인을 부축하고 있는 이는 묵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