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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16화)


아침에 초가집에서 이야기를 나눈 셋은 진송하가 오늘도 진선각에서 꿈속으로 들어갈 예정이라는 말에 따라나선 것이다.
특히 진 노인은 허리가 아파 걷기도 힘든 와중에도 묵유자의 부축을 받으면서까지 따라나섰는데, 이는 이 일이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정을 모르는 송방은 묵유자 역시 진 노인과 비슷한 얼굴로 자신을 탐색하는 기색을 보이자, 진선각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억눌러야 했다.
‘으으! 대, 대체 무슨 일이야? 너 이 자식! 대체 뭔 말을 한 거냐?’
결국 가장 만만한 진송하를 돌아보며 눈빛으로 묻자, 진송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미안해. 어제 일을 이야기해 드렸더니 꿈속으로 들어가는 걸 직접 보고 싶다고 하셔서 말이야.”
둘만 있는 상황이었다면 꿀밤을 먹이며 그런 걸 왜 다른 사람한테 알린 것이냐고 호통을 쳤겠지만, 눈앞의 어른들 때문에 송방은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하, 하하, 하하하.”
“…….”
“…….”
그때까지도 묵유자와 진 노인이 침묵한 채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자 송방은 침이 마르는 것 같았다.
“아! 여, 여기 앉으세요!”
송방이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그렇게 말하며 재빨리 양손에 의자를 두 개 잡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두 어른은 의자에 앉으면서도 여전히 말없이 송방을 바라보기만 했다.
‘왜, 왜들 저러신데?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아…….’
생각해 보니 죄를 짓기는 지었다. 그도 내원의 사람으로서 진 노인이 진송하에게 쏟는 정을 모를 리 없었다.
더구나 어제 일로 묵유자 역시 진송하와 친밀한 관계라는 걸 눈치챈 상황.
그런 진송하를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괴롭혀 왔으니, 어찌 가슴 한구석이 찔리지 않겠는가? 결국 먼저 나서서 죄를 고백해야 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원은 다 잊고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이에요!”
묵유자를 의식한 송방의 애절한 말투였지만 묵유자가 아닌, 진 노인이 무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놈! 다시 한 번 더 우리 손자 녀석을 괴롭혔다간 내 네놈의 다리몽둥이를 모조리 분질러 버리고 말 게야!”
“예, 옙! 명심하겠습니다!”
‘무, 무서워! 사숙조님보다 더 무서워!’
평소 진 노인을 잡일꾼이라고 하찮게 여기고 있었던 송방은 코앞에서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지르는 진 노인이 내뿜는 위압감에 자신의 생각을 대폭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묵유자는 다른 이유로 송방을 살피고 있었다.
진선각까지 오면서 생각을 정리한 끝에 묵유자는 송방에게 솔직하게 사정을 설명하는 방법이 최선이라 결론을 내렸다.
자칫 송방의 입을 통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진송하가 송방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숨기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차라리 솔직히 말하여 주의를 주는 것이 그나마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리 된 것이니 절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묵유자는 상황의 심각성을 송방에게 각인시키는 동시에 민감한 부분은 감추고 싶었다. 그래서 나름 중요한 부분은 빼고, 문제되지 않을 부분은 크게 부풀려 설명을 마쳤고, 이에 송방이 굳은 얼굴로 답한 것이다.
사정을 들은 송방은 대답하면서도 속으로 무척 놀라야 했다.
‘세, 세상에! 그럼 송하가 어제 보여 준 게 태극의 무학이라는 거야? 이거 정말 걸렸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네!’
아직 어린 송방이었지만 무당에서 태극이라는 말이 금어에 해당했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사부인 현중에게 확실하게 언질을 받은 적이 있어 잘 알고 있었다.
“흐음.”
묵유자는 달라진 송방의 안색을 보며, 그가 확실히 알아들었다고 판단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는 진송하와 송방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진 노인과 나야 문제없지만, 이 어린 녀석 둘이 과연 비밀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진송하는 열두 살, 송방은 고작 열한 살에 불과했다.
분명 지금까지는 호기심과 장난 삼아 꿈과 관련된 일을 즐겼던 것이 분명할진대, 이를 언제까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때 진 노인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송하야.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한 번 보자구나.”
“아, 예!”
도덕경이 있는 진선각까지 온 것은 결국 이를 보기 위함이었으니, 묵유자도 결국 불안감을 한 켠에 미뤄 두고 흥미로운 얼굴로 진송하의 행동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내내 눈치를 보던 송방이 재빨리 도덕경이 든 목함을 가지고 와 진송하에게 건네주었고, 진송하는 바닥에 앉은 채 이를 받아들어 무릎 위에 놓고는 태극심법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오오!”
진 노인이 절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예의 목함 안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묵유자의 얼굴에도 감탄의 빛이 어렸다. 어릴 때부터 무당에서만 생활해 오던 진 노인과 다르게 강호를 주유하며 적지 않은 기사들을 겪어 온 묵유자였지만 지금의 일은 그에게도 충분히 놀라웠던 것이다.
그 와중에 진 노인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묵유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빛을 보면 다른 사람들도 납득을 하지 않겠느냐?”
“으음……. 확신할 수 없습니다. 역시나 속임수로 치부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묵유자도 빛을 보는 순간 이 광경을 보여 주면 믿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국 확실하지 않은 이상, 무리해서 모험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송하야. 그러니 네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태극의 무학을 완성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오오!”
그때 진 노인이 다시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느새 빛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던 것이다.

* * *

한편, 그간 방구석에 처박혀 질질 짜기만 하던 현은은 실로 오랜만에 방문을 열어젖히며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옆 방에서 현상이 튀어나와 급하게 현은을 뒤따르며 물었다.
“사형! 갑자기 어디 가는 거야?”
“……넌 대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냐?”
“……내 숙소가 사형 바로 옆이잖아.”
현상이 한심한 얼굴로 그리 말하자 현은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 그랬냐? 이거 참. 옆방에 네 녀석이 묵고 있는 것도 몰랐다니……. 확실히 너무 오랫동안 방 안에서만 지낸 모양이야. 반성해야겠어.”
분명 임무가 있어서 무림맹으로 왔건만, 일 년 가까이 방구석에 처박혀 지내다가 한다는 말이 겨우 반성해야겠다니……. 그 정도면 직무 유기로 벌을 받아도 이상치 않을 상황이라는 걸 현은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상은 그에 대해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대체 어디 가는 거냐니까?”
“아아, 남양표국.”
남양표국이라는 말에 현상의 미간에 다른 사람은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살짝 주름이 잡혔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오.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밖으로 나서기 불편하다면서,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직접 가려는 거야? 평소처럼 나한테 시켜.”
그 말에 걸음을 멈춘 현은이 사나운 얼굴로 현상을 돌아다보며 외쳤다.
“야 이 자식아! 일을 맡았으면 제대로 해야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으니 벌써 일 년인데, 아직도 소식이 없잖냐! 이쯤 되면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결국 일 년 만에 밖으로 나온 이유 역시 진송하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까 한 말과는 다르게 반성조차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현상은 현은의 고함에도 심드렁한 얼굴로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후벼 대며 말했다.
“귀청 떨어지겠네. 왜 나한테 그래? 내 잘못도 아니잖아.”
아닌 말로 현상의 잘못은 아니었다.
왠지 능글맞은 현상의 태도 때문에 재차 울컥하기는 했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기에 현은은 억지로 화를 가라앉혀야 했다.
“쳇! 누가 뭐랬냐? 그러니까 내가 직접 그 남양표국주란 자를 만나겠단 말이다. 정말로 송하가 아직도 화가 안 풀려서 답장을 안 보내는 거라 해도, 최소한 주변 사람을 통해 잘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해야겠어.”
“흐음. 알았어. 그럼 나도 같이 가지.”
“뭐? 넌 또 뭐하러?”
“사형. 남양표국이 어딘 줄이나 알아? 내가 안내해 줄게.”
하지만 현상은 자신의 말에 현은이 가소롭다는 얼굴로 피식 웃자,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아, 내가 미쳤지. 십 년 전까지 천하가 좁다고 사방팔방 뛰어다니던 낭만검 현은에게 길을 모른다는 소리를 하다니.”
“알면 됐어. 그럼 나 간다!”
그렇게 말하고는 점점 멀어지는 현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현상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차갑게 굳어 있었다.

맹을 나서려던 현은은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하단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있나? 붙잡는 사람이 없어서 편하긴 한데, 왜 이렇게 분위기가 뒤숭숭한 거야?”
예전의 현은이었다면 오히려 자기가 달려들어 주변인들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겠지만, 지금은 진송하에게 관심이 몰려 있었기에 솟아나는 의문을 억누르고는 맹을 나서기 위해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현상에 이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존재가 있었다.
“어머! 드디어 밖으로 나오는구나? 어디 가는 거야?”
은영전의 전주, 소남화였다. 그가 현은에게 다가오며 말을 건 것이다.
“쩝. 현상 녀석도 그렇고, 왜 이렇게 다들 내 발걸음에 관심이 많은 건지 모르겠네.”
“누, 누가 관심을 가진다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현상을 불러 세운 소남화는 당황한 얼굴로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사실 사람을 시켜 현은을 지켜보다가 그가 맹을 나서려 한다는 소식에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득달같이 달려나온 그녀였기에 현은의 말에 당황할 만도 했다.
현은은 자기도 방금 전 현상에게 소리쳤다는 사실을 잊고 얘가 왜 이러나 싶은 표정으로 말했다.
“야, 귀청 떨어지겠다.”
“응? 아, 미, 미안해. 그런데 정말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온 거야? 하필 조용할 땐 잠자코 있다가 꼭 바빠 죽을 것 같은 상황에 나와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냔 말야.”
“……내가 나오는데 왜 네가 곤란하냐?”
‘아악! 난 왜 얘 앞에서만 이러는지 몰라!’
현은의 앞에만 서면 실수를 남발하니, 소남화는 그렇게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재빨리 변명을 해야 했다.
“으, 은영전의 전주로서 요즘 일 때문에 무당의 반응을 세심히 살피는 중이었거든. 그래서 그런 거야!”
현은은 요즘 일이라는 게 현재 맹 내의 뒤숭숭한 분위기와 연관이 있음을 짐작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분위기가 왜 이래?”
“뭐? 너! 설마 아무 소식도 못 들은 거야?”
“무슨 소식?”
태연히 반문하는 현은의 표정을 보고 소남화는 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 현상이 아무 말도 안 한 거야?”
“야, 답답하다! 대체 무슨 일이냐니까?”
소남화는 그 말에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으응. 이야기가 좀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우리 은영전으로 가서 이야기하자.”
“뭐? 안 돼. 나 지금 볼일이 있어서 나가 봐야 한다고.”
소남화는 은영전으로 데려가 차라도 대접하며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한 말이었는데, 현은이 그리 답하자 섭섭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래도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같이 가자. 가면서 이야기해 줄게.”
“으음.”
현은은 소남화가 현상과는 다르게 확실한 이유가 있어 동행을 요구하니 거절치 못했다. 결국 그녀와 함께 무림맹을 나서 남양표국이 있는 남양부로 향해야 했다.

“뭐? 묵경 사백께서 황궁에서 쫓겨나?”
남양표국으로 가는 길에 소남화의 설명을 다 들은 현은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