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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17화)
“응. 하지만 정변이 일어난 상황에서 목숨을 잃지 않으신 것만 해도 어디니? 어쨌든 묵경 진인께선 북경을 떠나 무당으로 돌아오실 모양이야.”
“이거 사부님의 고충이 심하시겠네.”
“응. 분명 묵유자 어르신에게 내정된 장문인 자리가 불확실해지겠지.”
“야! 너 왜 우리 사부님은 묵유자 어르신이라고 부르면서 묵경 사백님만 진인이라고 부르냐?”
묵경 진인은 황실에서 황족을 가르치던 존재이니만큼 진인이라고 부르는 게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소남화는 이상한 부분에서 따지고 드는 현은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게 중요하니?”
“하긴 그렇지.”
“으이구!”
“맞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대로라면 사부님께서 궁지에 몰리실 거야! 그러니 이 하나뿐인 제자가 어찌 무림맹에만 처박혀 있을 수 있겠어? 빨리 가서 사부님을 도와 드려야겠다!”
소남화는 여전히 핵심을 벗어난 현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그렇게 송하란 아이가 보고 싶니?”
“어? 아, 아니야! 난 어디까지나 사부님이 걱정돼서…….”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마. 아까 맹의 분위기 못 봤어? 사실 무당이 이번 일로 손해 볼 게 뭐 있니? 중요한 건 무당이 황실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무림맹을 지탱하던 옥 광산의 관리권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점이라고. 만에 하나 황실이 관리권을 내놓으라고 하면 맹은 그대로 무너지는 거야.”
하지만 그녀의 설명에도 현은은 별달리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너 정말 많이 변했구나. 십 년 전만 같았어도, 마치 자기 일마냥 뛰어들었을 텐데.”
예전에는 오지랖 넓기로 유명한 현은이었기에, 소남화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현은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냐. 그 송하라는 아이에게 이렇게 유난을 떠는 거 보면 여전한 것 같기도 해. 이제 보니 넓게 퍼져 있던 주위가 그 아이 하나한테 몰린 모양이야. ……이거 왠지 질투 나네?’
어쨌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두 사람은 남양표국의 정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제야 현은은 무당산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마당에 굳이 남양표국을 들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쩝. 그냥 돌아갈까?”
소남화도 이미 현은이 이곳에 들린 이유가 진송하 때문이라는 걸 들었지만 이대로 돌아가자니 뭔가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이왕 온 거 남양부 내를 구경하다 돌아가자고 말하려 입을 열었다.
“저기…… 어?”
하지만 도중에 우연히도 표국의 대문을 보며 의문이 드는 바람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상하네. 표국의 대문이 닫혀 있다니.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표국이라면 기본적으로 의뢰를 받기 위해 언제나 대문이 활짝 열려 있어야 정상이었으니 당연한 의문이었다. 맹 내 정보 조직인 은영전의 전주다운 호기심이었다.
현은이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응? 웬 곡소리지? 누가 죽었나?”
현은의 말에 소남화도 이내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그녀도 표국 내에서 울려 퍼지는 곡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진짜네. 누가 죽은 거지?”
똑같은 의문을 가지게 된 두 사람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답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때 닫힌 문 앞에서 지키고 서 있던 무사 중 하나가 경계 어린 태도를 취하며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누구신지 물어봐도 되겠소?”
이에 소남화는 상대방의 물음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궁금함을 풀기 위해 앞으로 나서며 답했다.
“무림맹 은영전의 전주를 맡고 있는 소남화라고 해요. 표국의 대문도 닫혀 있고, 지금 안에서는 곡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누가 돌아가신 건가요?”
예상치 못한 그녀의 신분에 놀란 무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 이제 보니 소 전주셨군요.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무사가 워낙 경계 어린 태도를 취하길래 신분을 먼저 밝힌 것인데, 역시 예상대로 그의 경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분을 밝힌 만큼 소남화는 의젓한 태도로 예를 갖춰 답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좋지 못한 때에 찾아온 것 같아 제가 더 죄송하네요.”
“어휴,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맹이 남양에서 버티고 있기에 저희 같은 표국이 먹고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저희 표국에 일이 있어 오신 겁니까? 안 그래도 이번 일로 맹에 의뢰를 넣으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잘 되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안으로 뫼시겠습니다.”
이쯤 되자 이미 이곳에 온 목적을 잃고 단순히 호기심만 해결하려 했던 소남화와 현은은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무사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관부가 아닌 맹에 의뢰를 하려 했다는 말은 곧 무림과 얽힌 일이라는 말이었다. 물론 이는 곡소리의 원인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했다.
문지기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표국주가 기거하는 곳이라 짐작되는 건물의 대문을 사내 몇이 뜯어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일단 문짝을 떼어 그 위에 시체를 눕히는 행위를 소렴(小殮)이라 한다.
도사인 현은은 유교 사상에 입각한 이런 장례 의식에 관심이 없어 그런 모습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소남화는 달랐다.
‘이제 막 소렴 의식을 치르려는 걸 보니 시체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 아닌 이상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더구나 표국주의 거처로 보이는 곳의 문을 떼어 낸다는 건 표국주 자신이 아니면 그의 가족이 죽었다는 말이구나.’
더구나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무림인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자고로 시체는 죽은 직후에 그 증거가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는 법이지.’
소남화의 눈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현은의 앞에만 서면 자기답지 않아 고민이었는데, 흥미로운 사건을 접하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은영전주다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소남화의 예상대로 죽은 자는 남양표국주였다.
문짝을 떼어 낸 사내들을 따라간 두 사람은 표국주의 침실 안에서 시체를 볼 수 있었다.
‘검이군. 등 뒤에서 심장을 노리고 정확히 찔러 넣었어. 이 깔끔한 상처…… 결코 하수의 솜씨가 아니야.’
소남화는 누워 있는 시체의 앞모습만 보고도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대낮에 표국주의 거처까지 잠입해서 살인을 저지르다니……. 자신의 실력에 그만한 자신감이 있는 자라는 말. 아니지! 내부자의 소행일지도 모르겠구나. 확실해. 내부자의 소행이야.’
소남화는 정체가 드러나는 걸 꺼리는 전문 살수라면 대낮에 이런 일을 저지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직도 시체 옆에서 흐느끼고 있는 표국주의 처인 연 부인을 향해 물었다.
“표국 내에서 무공이 뛰어난 인물은 몇이나 되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흐느낌을 멈추고 불안한 얼굴로 묻는 연 부인의 모습에 혹여 자신의 말이 충격을 더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래도 범인을 잡는 게 우선이야.’
독하게 마음먹은 소남화가 입을 열려고 할 때, 갑자기 잠시 밖에 나갔던 현은이 침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내부인은 아니야.”
“뭐?”
현은은 그녀의 옆에 서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젠장!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 거 같다. 표사 중 하나가 담을 넘는 자를 목격했다고 하더군.”
“아! 그래?”
설마 이 정도로 깔끔한 솜씨를 지닌 범인이 다른 자에게 모습을 보였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소남화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문제는 그자가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거야.”
“가면?”
소남화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대낮에 범행을 저질렀으니 얼굴을 드러내길 원치 않는 거야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지?’
현은의 입에서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고, 이는 소남화의 안색 역시 그와 같이 굳어지게 만들었다.
“혈루백면구.”
“의협맹!”
혈루백면구(血淚白面具).
의협맹(義俠盟)의 인물들은 항상 눈 아래로 붉은 줄이 그어져 있는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이 가면을 일컬어 사람들은 혈루백면구라 불렀다.
“아아, 미치겠다. 이렇게 되면 무당산으로 돌아가기 힘들어지는데.”
애초에 묵유자에게 부여받은 임무가 바로 의협맹의 조사였으니, 의협맹과 얽혔다고 짐작되는 사건을 무시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 소남화의 얼굴에는 오히려 화색이 돌았다. 그와 함께할 시간이 늘어나게 되었으니 왜 아니겠는가?
* * *
“어어?”
진송하는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 맞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아차! 그러고 보니 현실이 아니라 꿈이긴 하구나.”
하지만 어쨌든 그가 놀란 것만은 분명했다.
이번에도 어제와 똑같은 상황이 연출된 덕분에 튕겨진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예상하고는 대뜸 몸을 날려 술잔을 받아 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진송하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술잔 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날아가는 와중에 바닥에 꽤 쏟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술잔에는 절반 정도의 술이 남아 있었다.
“이거 마셔도 되는 건가?”
몸을 날려 술잔을 받느라 엎드린 상태였기에 진송하는 술잔을 두 손으로 든 채 조심스레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진 노인의 모습을 한 존재와 흰 사슴을 번갈아 살펴보기 시작했다. 혹여 마시지 말라고 할까 봐 눈치를 보는 것이다.
다행히 둘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어제처럼 술잔이 떨어지자마자 현실로 돌아갔던 상황이 연출될 기미도 없었다.
‘이 상황은 지금까지 내가 잘했다고 술을 상으로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자그마치 나흘이었다.
나흘 전 우연히 들어온 꿈속에서 이 술을 발견한 후, 손에 넣고자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그래도 고생 끝에 결실을 맺었으니 진송하의 얼굴에 비로소 보람찬 미소가 걸릴 수 있었다.
술잔을 들어 얼굴 앞으로 가져가니 달콤한 향은 더욱 진해졌고, 술에서는 영롱하다 못해 광채가 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보통 술이 아니야! 이것도 설마 소청단이나 빙정 같은 영약이 아닐까?’
요 며칠간 송방에게 기연과 관련된 온갖 전설과 설화 들에 대해 들었던 그이기에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칠 수 있었다.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기 시작하는 진송하였다.
술의 유혹은 그의 입과 가까워질수록 더욱 강해져 갔다. 술에 얼마나 마음을 빼았겼는지 그의 눈은 욕망에 사로잡혀 번들거렸고, 침을 삼키는 것도 잊어서 입꼬리에서 침이 흘러내리고 있을 정도였다.
드디어 술잔이 입술에 닿았다.
이제 진송하는 거의 약에 취한 듯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술잔을 살짝 들어 올리기만 해도 얼마 남지 않은 술은 단숨에 진송하의 입안으로 들어갈 터였다.
“…….”
하지만 그 상태로 한동안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몽롱한 표정을 한 진송하의 시선은 술이 아니라 여전히 석탁 앞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존재에게 박혀 있었다.
“할아버지…….”
분명 겉모습이 같은 것뿐인데, 진송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진 노인을 떠올렸다.
진송하의 얼굴이 차츰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태생적으로 나약한 몸을 안고 태어난 진송하였다. 그런 그를 위해 현은과 함께 십 년간 늙은 몸을 이끌고 무당산 구석구석을 뒤지던 모습을 방 안에 누워 바라보기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그 은혜를 갚겠다 매일 맹세하고 또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눈앞의 술을 마시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잊고 있으니, 진송하는 도저히 술을 들이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 이건 할아버지한테 드리자. 몸에 좋은 것이 분명하니까 이걸 드시면 아픈 허리도 단숨에 나으실지도 몰라.”
진송하는 더 이상 술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과 색에 취하지 않았다.
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어느새 번들거리는 욕망은 사라지고, 티 없는 순수함만이 가득했다.
“앗!”
그런데 곧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진선각으로 가져가지?”
진송하는 이내 깊은 실망감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기껏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은 기회가 생겼다고 여겼건만 꿈속의 술을 무슨 수로 현실로 가져간다는 말인가?
그때 주위가 차츰 밝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