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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18화)


파아아아아―.
“어어?”
놀라 고개를 드니, 벌써 진 노인의 모습을 한 자와 흰 사슴은 빛에 파묻혀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어어! 어떡하지? 어떡하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좌우를 둘러봤지만,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답답한 마음에 혹여 눈을 뜨고 있으면 현실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 눈이 부심에도 억지로 눈을 감지 않고 참으려 했지만, 그것도 한계에 부딪혀 결국 눈을 질끈 감고야 마니, 그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으. 결국 술은 그냥 날려 먹었구나!’
현실로 돌아온 진송하의 눈에 어른들이 있어서 그런지 어제와 다르게 허리를 꼿꼿이 펴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송방의 얼굴이 먼저 들어왔다. 그런데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습이 이상했다.
“왜 그래?”
고개를 우로 돌리니 묵유자와 진 노인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 역시 송방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진송하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가 싶어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 이내 그들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이 아닌 그보다 아래쪽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이는데, 이내 진송하의 표정도 그들과 다를 바 없게 변하고야 말았다.
그의 두 손이 꿈속에서 보았던 술잔을 꼬옥 잡고 있었던 것이다.
“히, 히익?”

진송하는 흥분해서 떠드는 송방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놀라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빛무리에 휩싸이더니 빛무리가 사라진 후, 두 손에 이 잔을 들고 있었다고?”
“응! 그렇다니까!”
“세, 세상에!”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어제도 지금처럼 온전히 현실로 돌아왔었지만 이번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꿈속에서 지니고 있던 술잔까지 들고 오게 된 것이다.
진송하는 이쯤 되자 이제는 더 이상 꿈이라 치부할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진송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애초에 이를 단순한 꿈 따위로 치부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응?”
갑자기 강렬한 시선을 느낀 진송하가 고개를 들어 그 시선을 보내고 있는 송방을 바라보았다.
송방이 한동안 술잔을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그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왠지 익숙한 느낌인데?’
마침내 송방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게 뭐냐? 술? 너, 너무 맛있어 보이는데 나 좀 주면 안 되냐?”
“뭐어?”
어른들이 앞에 있는 상황에서 열한 살 먹은 어린아이가 할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이제 보니 꿈속에서 내가 느꼈던 유혹을 똑같이 느끼는 건가?’
진송하는 혹시나 싶어 묵유자와 진 노인 쪽을 바라봤다.
“흐음.”
진 노인의 눈에도 순간 욕심이 어려 있었지만, 금세 사그라들었다. 연륜에 의해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반면 묵유자는 전혀 욕심 어린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술을 보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아마 정심한 내공을 바탕으로 억누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술이구나.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는 힘이 느껴진다. 설마 그것이 네가 꿈속에서 마시고 싶어 했다던 그 술인 게냐?”
묵유자의 질문에 진송하가 그렇다고 대답하려는데, 순간 갑자기 묵유자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였다.
“어, 어어?”
설마 가장 냉정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 같았던 묵유자가 진송하의 술을 빼앗으려는 것일까?
그 순간,

“아얏!”
송방의 비명이 진선각 내에 울려 퍼졌다.
묵유자의 손이 술잔을 빼앗으려 들던 송방의 손을 강하게 움켜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녀석! 냉정을 되찾거라!”
“으윽! 한 모금, 한 모금만 마실게요! 제발요, 사숙조님!”
애처로운 얼굴로 애원하는 송방의 모습에 묵유자는 말로는 송방의 마음을 다잡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어!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이리 오거라.”
강제로 송방의 손목을 잡은 채 진선각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묵유자였다.
덕분에 진선각 안에는 진송하와 진 노인 단둘만 남게 되었다.
그러자 진 노인이 궁금한 얼굴로 진송하에게 물었다.
“흐음. 묵유자의 말대로 그것이 설마 꿈속에서 네가 원했던 그 술인 게냐?”
“예에.”
진송하가 긍정하자 진 노인은 경탄 어린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 대단하구나! 설마 그곳에 있는 물건을 맘대로 가지고 나올 수도 있는 것이냐?”
“저도 어떻게 이걸 가지고 나오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물론 제가 할아버지께 드리고 싶어 하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꿈속에 있던 술을 현실로 들고 오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진 노인은 자신에게 줄 예정이었다는 말에 놀라 반문했다.
“뭐? 내게?”
“예.”
“하지만 네 이야기대로라면 그렇게나 마시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니냐? 뭐 술이라는 사실이 좀 걸리기는 한다만, 정말 진무대제께서 안배하신 일이라면 분명 네 몸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해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송방, 고 녀석이 돌아오기 전에 어여 마시거라.”
“할아버지…….”
송방뿐만이 아니었다. 진송하 자신도 그 술잔의 유혹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었다.
필시 진 노인도 그런 유혹을 받고 있을 터.
그런데도 진송하의 몸을 먼저 생각하며 마시라고 하니, 어찌 진송하의 목에 술이 넘어갈 수 있겠는가?
“아니에요, 할아버지. 몸에 좋은 약이니까 할아버지께서 드시면 허리도 낫고 몸도 이전보다 더 좋아지실 거예요. 그러니 할아버지께서 드세요.”
“아니다. 이 할아비 나이엔 몸에 좋은 걸 먹어 봤자 별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런 건 너처럼 한참 자랄 나이에 먹어야 좋은 게야. 그러니 어여 마시거라.”
“아니에요. 할아버지 드릴려고 일부러 가지고 나온 걸요. 그러니 할아버지가 드세요.”
“어허! 이 녀석아, 할아비 말 좀 듣거라!”
“할아버지야말로 제 말 좀 들으세요! 제가 할아버지 드릴려고 얼마나 애를 써서 들고 왔는데요!”
그 뒤로도 두 사람은 한참을 술잔을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양보하기를 반복했다.
송방을 진정시켜 먼저 숙소로 돌려보낸 묵유자는 진선각으로 들어서다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허허. 보기 좋구나. 솔직히 부러울 정도야.’
묵유자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절로 어렸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곧이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왠지 저 모습을 보니 현은이 생각난 탓이다.
‘이 매정한 녀석은 잘 지내나 모르겠구나. 그러고 보니 송하에게 그 녀석 소식을 묻는다는 걸 깜빡했어.’

“뭐? 네게도 아직 소식 한 번 전하지 않았다고?”
“예.”
생각난 김에 진송하에게 현은의 소식을 물었던 묵유자는, 진송하도 소식을 받은 적이 없다는 말에 진심으로 놀랐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몰라도 송하에게까지 소식을 보내지 않았다니?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야!’
아무리 무당파가 정도무림맹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하나 그래도 의사를 주고받을 통로는 존재하고 있었다.
맹에선 맹 내에 기거하는 무당파 인물 중 최고 배분인 묵초가, 무당 내에서는 바로 송방의 사부인 현중이 이를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은 녀석이 묵초 사형을 통해 소식을 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일이 아닌 한, 이 방법은 거의 사용하는 경우가 없었다. 더구나 현은이 소식을 전하려면 한 배분 높은 묵초에게 부탁해야 했으니, 아마 그런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묵유자는 생각했다.
‘분명 근처의 표국에 일을 맡겼겠지. 그럼 둘 중 하나다. 표국에서 이곳으로 소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일이 잘못되었거나, 소식이 무당에 도착은 했지만 누군가가 중간에서 가로챘거나!’
절대 현은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림맹에서 먼저 소식을 보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 장문인 자리를 놓고 갈등을 겪고 있는 묵유자로서는 후자에 무게를 실을 수밖에 없었다. 무당 내의 누군가가 소식을 가로챘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전자의 경우라면 한 번 정도는 몰라도 일 년 내내 소식이 전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은이 진송하에게 소식을 단 한 번만 보내고 말았을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현은과 송하 사이의 소식을 가로챈다는 말인가? 혹여 나를 자극하기 위해 나와 주고받는 소식을 가로채려는 마음에 착각하여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지자 묵유자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여겨졌다.
‘그렇다면 범인은 내가 장문인이 되는 걸 반대하는 세력이라는 것이군. 하지만 그것도 이상하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런 치졸한 방법까지 쓸까?’
어찌 되었든 묵유자는 결과적으로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굳이 안부를 묻는 소식을 가로막는 정도로 무슨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현은의 소식을 전하기로 한 남양표국의 국주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결코 그렇게 단순하게 여기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응?’
묵유자는 그제야 진 노인이 술잔을 든 채 아직까지도 마시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래서 안 드시냐고 물으려다가 곧 입을 다물었는데, 진 노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보니 지니고 있다가 송하에게 몰래 먹이려는 속셈이시구나.’
묵유자는 참으로 보기 좋은 조손지간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서로를 위하는 모습에 다시금 부러움이 일었다. 현은 이후로 제자를 받지 않던 그가 새로 송하 또래의 제자를 얻고 싶은 마음이 일 정도로 말이다.

* * *

다음날 아침.
술을 진송하에게 몰래 먹이려던 진 노인의 계획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물에 타 먹이면 모를 줄 알았는데, 술이 내뿜는 특유의 달콤한 향이 너무 강한 나머지 진송하가 단번에 눈치를 챈 것이다.
원래라면 어제와 같이 서로 양보하기를 반복하는 상황이 벌어질 판이었지만, 그때 진송하가 말했다.
“할아버지. 저는 오늘 다시 꿈속에서 구해 마시면 돼요. 그러니까 걱정 마시고 어서 드세요.”
미처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던 진 노인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결국 술을 탄 물은 진 노인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고야 말았다.
꿀꺽꿀꺽.
“커허! 그래, 내가 졌다. 이제 되었느냐?”
“으음. 잠시만요.”
진송하는 한 모금도 남기지 않았는지 바가지를 받아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만족스런 얼굴로 답했다.
“예!”
“허허.”
진 노인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기껍기도 했거니와, 다 먹었는지 확인하는 모양새가 너무 귀여웠던 탓이다.
‘그러고 보니 내 손자라 그런 게 아니라 참으로 잘생긴 얼굴이란 말이야. 만약 이대로 도사가 되지 않으면, 어디서 자기 못지않게 귀여운 색시를 데리고 와서 장가보내 달라 떼를 쓰겠지? 으흐흐. 거 생각만 해도 흐뭇하구나!’
아닌 말로 몸이 비대했던 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나이에 걸맞게 통통한 체형이 된 진송하의 진면목은 꽤 귀여운 편에 속했다.
“흐흐흐.”
“응?”
진송하는 갑자기 진 노인이 음흉한 웃음을 흘리자 왜 그런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에 진 노인의 웃음은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흐흐흐.”
“하, 할아버지?”
진송하는 왠지 모를 오한에 몸을 떨어야 했다.





七章. 과욕이 앞서, 실수를 저지르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허허. 인석아, 내 이미 오래전에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래도…….”
“오히려 이대로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가는 갑갑해서 없던 병도 생길 거 같구나.”
꿈에서 가져온 술은 정말 영약이라도 되는 양, 진 노인은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