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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19화)
하지만 진송하는 혹여 무리를 해서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열흘이 지난 오늘까지 진 노인이 절대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 왔는데,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오늘 진선각으로 향하는 진송하를 따라나선 것이다.
“뭐하느냐? 어서 가자구나.”
진 노인이 허리를 다치기 이전보다 오히려 활기찬 모습으로 앞서 걸었다.
진송하는 그제야 안심하고 진 노인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흐음. 방구석의 텁텁한 공기만 맡다가 무당산의 맑은 공기를 마시니 이제 좀 살 것 같구나.”
“방 공기가 그렇게 나쁜가요? 제가 오늘 깨끗이 청소해 놓을게요.”
“으응? 아니다, 아니야. 그냥 밖으로 나온 것이 오랜만이다 보니 괜히 해 본 소리란다.”
진 노인은 그렇게 말을 했지만 진송하는 오늘 꼭 꼼꼼히 방 안을 청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벅저벅.
내원으로 통하는 길을 걸으며 진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송하야.”
“예, 할아버지.”
“무공을 배우는 게 그리 좋으냐?”
진 노인이 진송하를 따라 진선각으로 향하는 이유가 바로 이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답은 알고 있었다. 진송하가 무공을 익히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같이 살고 있는 진 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으음…….”
진송하라고하여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곧바로 답을 하지 못하는 건, 뻔한 질문을 하는 진 노인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해서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역시 내가 무공을 배우는 걸 좋아하지 않으시는 건가?’
다른 질문이었다면 곧바로 아니라고 대답하고, 이후로 진 노인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무공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지난 세월 몸이 아파 고생을 하면서도 꾹 참을 수 있었던 건, 진 노인과 현은의 헌신적인 사랑과 노력을 효도로 갚아야겠다는 다짐 때문이기도 했지만, 역시 무공을 익혀 또래의 도사들과 어울려 지내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하는 진송하의 속내를 읽었음인가? 진 노인은 잠시 걸음을 멈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고심하는 게 역력한 진송하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송하야. 그저 솔직히 말해 주면 된다. 나는 네 속마음을 듣고 싶구나.”
진 노인의 진지한 분위기에 진송하는 결국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전 무공을 배우는 게 좋아요. 무공을 익히면서 송방과 친해졌고, 앞으로 더욱 많은 친구들을 사귈 기회가 생길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꿈속에서 무공을 익힐수록 몸이 튼튼해지는 게 좋아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그래, 그렇구나.”
진 노인의 머릿속에 진송하가 밖에서 또래 아이들과 한창 뛰어놀 시기에 방 안에서 갇혀 병마와 싸우던 시절이 떠올랐다.
천년삼왕과 소청단이 만들어 낸 조화로 인해 드디어 밖에 나설 수 있었는데, 그 대신 비대해진 몸 탓에 아이들과 어울리기는커녕 괴롭힘을 당하던 시절도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난 지금 방 안에 있는 것이 답답하여 네가 걱정하는 것도 무시하고 이리 밖으로 나왔지. 그것도 고작 석 달 정도를 못 참고 이러는데, 넌 십 년 가까이 그리 지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 노인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나는 참으로 못난 놈이구나. 할아비가 될 자격도 없는 놈이야. 내 일을 물려주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이 어린것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는 생각조차 못 했어.’
원래 진송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꺼낸 질문이었건만, 결국 진 노인의 마음이 돌아서고야 말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조부모라 해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 그리 생각한다면 되었다. 난 그저 네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야. 무공을 익히는 것이 그리 좋다면 내 말리지 않으마.”
어느덧 진선각 앞에 도착한 진 노인은 진송하와 일별하고는 진선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랜만에 들렸으니 이곳저곳 둘러봐야겠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진송하는 진 노인의 뒷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여 괜스레 죄스런 마음이 일었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그래도 전 역시 무공을 익히는 게 좋아요. 대신 할아버지께 걱정 끼쳐 드릴 일은 만들지 않을게요.’
그렇게 속으로 다짐한 진송하는 진선각의 옆을 돌아 뒷마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끔이지만 진선각에는 다른 사람들이 들르니, 아무도 오지 않는 뒷마당에서 수련을 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묵유자의 말 때문에 열흘 전부터 진선각이 아닌 뒷마당에서 수련을 해 왔던 터였다.
뒷마당 구석에서는 송방이 목함을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얼른 와!”
“응!”
밝게 대답한 진송하는 송방을 향해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 * *
“타앗!”
뻗어 오는 송방의 주먹에서 살기가 느껴지는 건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아직도 술의 유혹에 사로잡힌 후유증 탓인지 술을 마시지 못한 아쉬움과 짜증, 아직도 술을 구해 오지 못하는 진송하에 대한 원망이 주먹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전의 진송하였다면 반격은커녕 피할 엄두도 못 냈을 터.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능숙하게 주먹을 쳐 내고 오히려 동시에 반대 손으로 반격을 가했다.
“이야압!”
통.
‘통?’
자신의 가슴에 닿은 주먹을 내려다보던 송방이 고개를 절레절래 흔들면서 말했다.
“무, 물 주먹이냐? 하! 거 정말 효과 만점이네. 맞으니까 머리에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공격하고 싶은 의욕이 깡그리 사라질 정도다.”
송방은 정말로 의욕을 잃었는지 자세를 풀며 바닥에 거칠게 주저앉았다.
진송하는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네. 꿈속에서는 분명 꽤 힘이 느껴졌는데.’
자신이 느끼기에도 힘이 제대로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믿고 싶지 않은 마음에 송방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 주먹이 그렇게 약해?”
“사숙조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내공이 눈곱만큼도 없는 모양이지. 넌 대체 무슨 심법을 익혔길래 그 모양이냐? 피멍이 들어도 금세 사라지는 효용이 있으면서도 정작 싸울 땐 전혀 쓸모없는 심법이라니.”
그 말에 진송하는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풀이 죽은 모습으로 송방의 옆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나도 몰라. 예전에 도사들이 등선하기 위해 익힌 심법이었대.”
“드응서언? 이야아, 등선하기 전에 칼 맞아 죽으면 대체 무슨 소용이라고 그런 심법을 만들었다냐?”
“내 말이.”
“에휴. 어쨌든 네 말대로 대련해 줬으니까 빨랑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서 술 좀 구해 와 봐. 근데 너 정말 약해도 너무 약하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술이 내 손에 있어도 너한테 다시 돌려줄 것 같아.”
거기까지 말한 송방은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무, 물론 농담인 거 알지? 농담이야, 농담이라고! 농담이니까 거기서 니가 마시지 말고 꼭 들고 와야 해! 알았냐?”
“에휴.”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렇게 신신당부하는 송방의 모습에 진송하는 한숨을 내쉬며 도덕경을 무릎 위에 놓고 태극심법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송방은 술을 빨리 가져오기를 바랐지만 그것이 생각과 달리 쉽지 않았다. 이전과 같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집중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송하는 자신이 그때 진 노인이 말한 삼매의 경지에 빠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다시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눈을 뜬 진송하는 눈앞에서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거리는 흰 사슴을 바라보며 물었다.
“설록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벌써 보름 가까이 꿈속을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진송하는 흰 사슴에게 설록(雪鹿)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사슴도 꽤 마음에 드는 눈치여서 내친김에 꿈속의 세계를 몽계(夢界), 진 노인의 모습을 한 존재를 몽(夢) 노인, 술을 몽로주(夢老酒)라 이름 붙였다.
사실상 설록을 빼고는 그저 몽(夢) 자만 같다 붙인 것뿐이지만, 설록 외에는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고 떼쓸 만한 인물이 없으니 대충 지은 것이다.
어쨌든 진송하의 질문에 설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울었다.
메에에.
“……평소에는 지 생각 다 표현하면서 이럴 때만 순진하게 울지 말라고!”
메에에.
“……오냐. 귀찮으니까 잡생각 말고 따라오기나 하라고? 으휴. 알았어, 알았다구!”
앞서 가는 설록을 뒤따르며 진송하는 요즘 들어 한숨만 늘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또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어? 뭐, 뭐지?”
한참 설록의 뒤를 쫓던 진송하는 잠시 딴생각에 빠져 하늘을 바라보다 다시 정면을 바라본 순간, 너무도 당황하여 걸음을 멈춰야 했다.
“서, 설록아! 어디 있니?”
갑자기 시야에서 설록이 사라진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진송하가 당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혹시나 언덕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는 건가 싶어 언덕 위로 올라가 봤지만 역시나 설록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얘가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거지?”
사방을 둘러보는 진송하의 얼굴에 초조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분명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봐서는 빨리 찾지 못하면 또 몽계에서 쫓겨날 텐데.”
언제나 정체된 상태로 시간을 끌면 그래 왔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없이 사라진 설록을 이 드넓은 초원에서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쿠쿠쿠쿠쿠쿠.
“으악! 또 뭐, 뭐야?”
진송하가 놀라 소리쳤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갑자기 땅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진송하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엎드렸는데, 그 바람에 위아래로 진동하는 땅과 정면으로 박치기를 해야 했다.
“아이고…….”
또다시 땅과 입을 맞추기는 싫었기에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치 때를 맞춘 듯 흔들리던 땅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응? 대, 대체 뭐지? ……맙소사!”
고개를 숙였다 든 시간은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사이 주변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기괴하게 바뀌어 있었다.
“세상에! 대체 이게 뭐야?”
사방을 폭 일 장, 높이 삼 장에 이르는 거대한 흙벽들이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일어난 변화에 진송하는 일어설 생각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엎드린 채 입을 쩍 벌려야 했다.
진송하의 머릿속에 불현듯 아까 설록과 나눈 대화가 스치고 지나갔다.
“설록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메에에.
“……설마 설록아. 이걸 도움이라고 준 것은 아니겠지? 그렇지?”
보이지도 않는 설록이 대답을 해 줄 리 만무했지만, 진송하는 그때 물어본 결과가 눈앞의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에휴. 이거 왠지 오늘은 현실로 빨리 돌아가기 힘들 거 같네.”
크지 않은 목소리가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흙벽에 부딪쳐 길게 메아리쳐 울렸다.
* * *
오랜만에 들린 진선각의 내부를 둘러보던 진 노인은 티끌 만큼의 먼지도 없는 깨끗한 모습에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걸 느꼈다.
“허허. 그래도 송하가 무공에만 빠져 진선각의 일을 소홀히하지는 않았구나.”
아무리 송하에게 무공을 열심히 익히라 응원해 주었다지만, 마음 한 켠에서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지금이야 혈육 간보다 더욱 깊은 정이 생겨 무엇이 어찌 되든 송하가 행복하면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지만, 처음 송하를 거둘 때만 해도 그를 키워 자신의 뒤를 잇게 하겠다는 욕망이 더욱 컸으니 말이다.
“무공이라……. 결국 현은, 고놈의 뜻대로 되는 건가?”
현은이 무림맹으로 떠날 때만 해도 이제 송하는 완전히 자신의 손에서 커 가겠다 싶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송하 본인이 그리 무공을 배우고 싶어 할 줄은 몰랐다.
‘등선암에서 발견된 도덕경에 태극심법까지……. 진무대제께서 정말로 송하에게 무언가를 남기려고 하시는 건지도 모르겠구나.’
운명(運命).
진 노인은 하찮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느낀 것이다. 그것도 신이 내린 천운(天運)이다. 지금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