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태극혜검 1권 (20화)


더벅더벅.
진 노인의 발걸음 소리가 아무도 없는 진선각 내부를 공허하게 울렸다.
오랜만에 진선각에 왔으니 이곳저곳 손볼 곳이 있을 거라 생각해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흠잡을 곳이 없을 만큼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었다. 진송하가 무공을 배우면서도 틈틈이 신경 써서 관리해 온 것이 틀림없었다.
“허허……. 나도 이제 늙었나?”
자신이 없어도 잘 굴러가는 진선각을 보자 진 노인은 새삼 세월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진 노인의 나이, 올해로 일흔 여덟. 늙은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죽을 날을 걱정해야 할 시기도 한참이 지난 나이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열정을 가지고 살아와서 지금까지 세월을 잊은 채 살아온 그였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잡일꾼에 불과함에도 무당파의 뭇 도사들이 인정해 주고, 존경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람이 거의 찾지 않는 진선각을 관리하면서도 한 번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던 그가 드디어 세월을 느낀 것이다.
“허허.”
진선각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이 이상하리만치 지쳐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진 노인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묵유자가 조용히 진선각 앞마당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지. 내 그 귀해 보이는 몽로주까지 마셨는데 괜찮지 않을 리 있겠느냐?”
“…….”
“왜 그리 죄스런 얼굴을 하고 있느냐? 그럴 필요 없다.”
“진 노인…….”
“……내가 왜 이름 없이 그저 진 노인이라 불리는 줄 아느냐?”
갑작스런 물음에 묵유자는 이유를 몰라 그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진 노인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게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거든. 부모님께서 아사(餓死)하시고 홀로 남은 나는 무당산을 오르며 그리 생각했다. 앞으로 내 이름을 버리겠다고. 이 지랄 같은 세상에 남아 있는 기존의 인연은 다 버려 버리고 무위(無爲)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겠다 다짐했었지. 당시 어린아이였던 나는 세상이 정말 싫어서 오로지 그 말 하나만을 지키고자 노력하며 살아왔었다.”
“…….”
묵유자는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알기로 진 노인은 정말로 어린 나이에 무당산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때부터 무위를 품었다고 한다. 도사이면서도 아직까지 무위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그였다.
결국 묵유자는 진 노인의 말을 들으며 부끄러운 마음이 절로 일어 숙연히 고개를 숙였다.
묵유자의 머리가 허리까지 숙여져 있다는 것도 모르는지 진 노인은 여전히 하늘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잠시 잊은 모양이다. 송하와 연을 맺으며 무위에 대해 잠시 잊고 있었어. 내 이제야 그걸 깨달았구나.”
묵유자의 고개는 너무도 깊이 숙여져 이제는 거의 땅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앞으로 누군가 나를 도사라고 부른다면 부끄러워 어찌할까? 진 노인 같은 분을 잡일꾼으로 부리면서 앞으로 어찌 도사라 하고 다닐 수 있겠는가? 묵유자야, 묵유자야. 부끄럽구나, 부끄러워!’
하지만 그런 묵유자의 행동에 진 노인은 오히려 인상을 찌뿌리며 물었다.
“……너 대체 뭘 하는 것이냐? 고개는 왜 땅바닥에 박고 있는 게야?”
“예, 예? 아! 죄, 죄송합니다!”
묻는다고 하여 어찌 창피하게 자신의 속을 말하겠는가? 묵유자로서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사과를 하고 난리야?”
“죄송합니다!”
“……허! 거 원래라면 현은이 없는 지금 내 너에게 송하를 가르쳐 달라 부탁하려 했거늘. 이리도 어설픈 네 녀석에게 우리 송하를 어찌 맡길꼬? 역시 송하는 내가 옆에서 보살펴야지, 네놈에게만 맡겼다가는 큰일을 내겠구나!”
“끄응…….”
“끄응은 무슨. 송하를 보러 온 것이지? 같이 가자구나. 너같이 어설픈 놈에게만 송하를 맡길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뒷마당으로 향하는 진 노인의 발걸음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힘이 넘쳤다.
그런 진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묵유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기운을 차리셔서 다행이구나. 아까는 어찌 그리 외로운 표정을 지으셨는지.’
사실 묵유자는 진송하에게 가려던 길에 진선각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혹시 몰라 바라본 것이고, 그때 진 노인의 모습이 너무도 외로워 보여 말을 건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거 참. 날 그리 못 미덥게 생각하시다니. 정말이지 송하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면 큰일 나겠구나.’
묵유자는 앞으로 열심히 진송하를 가르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니면 필시 진 노인에게 자신이 경을 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묵유자는 진 노인과 같이 의욕이 넘치는 얼굴로 뒷마당을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놀리기 시작했다.

* * *

퍽!
“아야야.”
혹시 몰라 흙벽을 향해 주먹을 힘껏 날린 진송하는 이내 손을 감싸 쥐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으으. 무슨 놈의 흙벽이 이렇게 단단한 거야?”
물론 흙벽이 단단한 것일 수도 있었지만, 진송하의 주먹이 송방의 말처럼 물 주먹이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하다못해 단단한 나뭇가지라도 있으면 긁어서라도 구멍을 뚫어 보겠지만 주위가 온통 흙벽에 휩싸여 있었다. 나뭇가지는커녕 그 흔한 돌멩이 하나도 볼 수 없었기에 진송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꼬르륵.
흙벽 사이를 헤매고 다닌 지 한참이 지나고 있었다. 배에서 밥을 달라고 성화인 것을 보니 벌써 저녁때가 다 된 것이 분명했다.
“설록, 이 자식아! 설마 날 굶어 죽이려고 하는 거냐아아아!”
나름 처절하게 외친 진송하의 절규는 흙벽에 반사되어 메아리치는 바람에 상황과 안 어울리게 꽤나 우스꽝스럽게 울려 퍼졌다.
“……아이고. 이제 나도 모르겠다. 그냥 죽여라, 죽여!”
진송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바닥에 철퍼덕 누워 버렸다.
“…….”
잠시간 침묵이 이어지고…….
“……어이! 나 포기했어! 포기했다니까? 그러니까 제발 좀 내보내 주라!”
왠지 포기하면 이전처럼 세상이 빙글빙글 돌면서 밖으로 쫓겨날 거라 생각했건만, 이상하게도 이번만큼은 소용이 없었다.
‘으으! 내가 나가기만 해 봐. 절대 이곳으로 오는 일은 없을 거다! 송방에게 평생 구박받는 한이 있어도 절대 안 올 거야!’
그런데 그때 진송하의 귀가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응? 이 소리는!”
메에에.
일어나 있을 때는 몰랐는데 머리가 바닥에 닿자 미약하게나마 설록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진송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짐작되는 방향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 이 녀석! 이제 보니 줄곧 날 부르고 있었구나? 맞아, 너무 멀리 있어서 내가 듣지 못한 것뿐이었어!”
이 조화를 부린 것이 설록이라는 생각은 이미 저만치 사라진 후였다.
진송하는 “설록아, 의심해서 미안해!”, “형아가 지금 간다!”라고 외치면서 재차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이, 이 못된 놈아!”
하지만 다시 한 시진 가까이 흐른 지금. 진송하는 또다시 설록을 향해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자신을 이런 상황에 처하게 만든 게 설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지금까지 쉬지도 않고 뛰었는데도 설록의 목소리가 가까워지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하얗기만 해서 재미없는 놈! 만날 울 것 같은 얼굴로 사람을 속이는 음흉한 놈! 겉만 하얗고 속은 시꺼먼 놈아아아아!”
……가면 갈수록 다양한 욕을 체득하는 진송하. 친손은 아니더라도 역시 진 노인의 손자다웠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잠시 걸음을 멈춘 진송하는 턱을 감싸 쥐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상하다…….”
아무리 칭찬을 해도, 아무리 욕을 해도 일정한 간격으로 똑같은 울음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녀석, 진짜 울고 있는 거 맞아?”
이쯤 되니 진짜로 울고 있는 게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동물이라지만 이렇게 울면 목이 쉬지 않을 리 없을 텐데,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정하게 울리니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의심을 풀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목소리를 쫓아 계속 발을 놀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진송하는 얼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제는 진짜 너무도 배가 고파 힘이 나지 않았던 탓이다. 단순히 굶기만 했다면 모르겠지만, 어린 몸으로 벌써 네 시진 이상 거의 쉬지 않고 발을 놀렸으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하아……. 내가 너무 쉽게 내쫓는다고 불만을 가지는 바람에 이러는 거냐? 그래도 너무하잖아! 밥 먹을 시간에는 내보내 주라고!”
지금까지는 평소 잠시 딴생각을 하거나, 조금이라도 기대에 못 미치는가 싶으면 쫓아내는 점이 불만이었는데, 이제는 너무 끈질기게 이곳 몽계에 묶어 두니 이것은 이것대로 불만이었다.
“아, 맞다!”
진송하는 갑자기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두 손을 맞부딪치며 밝게 외쳤다. 그리고는 재빨리 바닥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는 운기를 하기 시작했다. 태극심법을 운기하면 허기가 조금이나마 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기를 잠시.
곧 다시 눈을 뜬 진송하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몽계에서 운기하는 것은 처음이네? 아! 설마 여기서 운기하면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오오! 맞아, 분명 그럴 거야!”
아까보다 더욱 희망찬 마음으로 재차 운기를 시작하는 진송하였다.

* * *

진선각의 뒷마당.
“으으. 무서워. 정말 무서워! 송하야, 술은 필요 없으니까 빨리 좀 나와라. 제바아알!”
한참 전부터 흉신 악살과 같은 얼굴로 성을 내는 진 노인 때문에 송방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귀를 막은 채 벌벌 떨어야 했다.
주변이 어두워지고도 한참이 흐르고 있는 지금까지 진송하가 깨어날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진 노인의 노성은 송방의 마음속에서 사라질 줄 몰랐던 술에 대한 유혹을 단번에 날릴 정도로 강렬했다.
그래도 송방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묵유자는 진 노인의 고함을 코앞에서 듣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진 노인은 볼 수 없었지만, 지금 묵유자의 얼굴은 꽤나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까 앞마당에서 죄스러워하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얼굴이었다.
‘크으윽! 아니, 가르치기도 전에 이러면 나는 앞으로 어찌 살란 말인가? 송하야, 빨리 일어나거라! 이러다 작은 할아비, 큰 할아비의 등살에 못 이겨 등선도 못 하고 골로 가겠구나!’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송하와 다르게 두 사람은 진 노인에 대한 공포 때문에 허기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본인들은 그것을 전혀 다행이라고 생각지 않겠지만…….

* * *

운기에 들어간 진송하는 그제야 설록이 무엇 때문에 흙벽을 만들어 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이것이었구나!’
네 시진 가까이 흙벽 사이를 오가던 경로가 머릿속으로 외우고 있던 태극심법의 구결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그간 소청단에 의해 꿈쩍도 하지 않던 양기와 음기가 갑자기 몸속을 돌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엉크러진 혈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원래 길이란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다. 사람이 오고 가야 비로소 길이 되는 법. 기가 가는 곳이 곧 길이 되니 양기와 음기가 움직이는 데 전혀 막힘이 없었다.
기운들이 중간 중간 잘못된 길로 빠지려 할 때는 소청단이 바로잡아 주었다. 마치 태풍에도 꿈쩍 않는 나무의 단단한 뿌리와도 같은 역할.
묵유자가 예전에 진송하의 몸을 살펴볼 때 느꼈던 소청단의 숨겨진 묘용이었다. 지금까지 양기와 음기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던 소청단은 두 기운이 움직일 때도 여전히 중심에 서서 균형을 유지시켜 주고 있었던 것이다.
‘와아……. 정말 기분 좋다.’
막상 기운들이 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진송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몽계에서 몽 노인과 서로 마주 보고 팔을 돌릴 때도 이런 움직임을 보이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방의 움직임을 따르는 와중에 이루어진 결과로써 온전히 자신의 힘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