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태극혜검 1권 (21화)
결국 진송하는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기운들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그려 넣을 수 있었으니, 이제 다시는 잊지 않을 것이다. 내기를 힘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완전히 깨우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길이 막혀 있다고 새로 길을 내어서 가다니. 정상적인 방법이라 볼 수 없었다. 흙벽 사이를 오가며 깨우친 것은 하나의 이치에 불과할 뿐. 정확한 길은 아닐지도 몰랐다.
단순히 이치 하나를 깨우쳤다고 길을 하나 새로 내다니. 결국 심법을 하나 새로 만들어 냈다는 말과 다름없지 않은가?
진송하도 이내 그 점을 깨달았다.
‘……이대로,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건가?’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괜찮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진송하가 방금 불안을 느낀 시기에 맞춰 급격한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길을 모름에도 막힘없이 흐르던 기운들이 갑자기 한차례 떨리더니 방향을 못 잡고 이곳저곳으로 우왕좌왕 대기 시작했다.
‘어, 어어? 갑자기 이거 왜 이래?’
운기 중에 딴생각을 한 데다, 불안까지 느끼다니!
생각지도 못한 현상에 무림인이 지켜야 할 금기를 깨고 만 것이다.
급기야 제 갈 길을 가던 양기와 음기가 서로 부딪치는 현상까지 발생하고야 말았다.
콰앙!
“쿠, 쿨럭!”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현실이 아님에도 진송하의 코와 입에서 피가 한차례 흘러나왔다.
‘……으윽! 뭔가 나 큰일을 저지른 거 같아. 어떡하지?’
* * *
“응? 뭐라고?”
“예?”
갑자기 노성을 멈추고 내뱉은 진 노인의 물음에 묵유자가 고개를 들어 진 노인을 쳐다보며 반문했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뱉은 진 노인의 말에 입을 굳게 닫은 묵유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속으로 소리쳤다.
‘아니, 소리는 무슨 소리겠습니까? 자기 고함 소리에 자기가 놀란 모양이구만! ……응?’
묵유자는 그제야 진 노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뭔가 싶어 이내 진 노인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린 그는, 등을 돌리고 가부좌를 튼 채 운기 중인 진송하를 볼 수 있었다.
“으음?”
곧이어 묵유자는 진송하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먼저 달려간 것은 진 노인이었다.
“송하야! 무슨 일이냐? 허억! 피, 피? 묵유야, 얼른 오거라! 송하의 상태가 이상하다!”
진송하가 몽계에서뿐만 아니라 운기 중인 현실에서도 피를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피라는 말에 묵유자 역시 안색이 굳힌 채 재빨리 송하에게 달려갔다.
‘피라니? 중상을 입어 운기 중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단 한 가지 경우밖에 없을 텐데?’
송하의 앞에 선 묵유자는 진송하의 코와 피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확인하고는 신음을 발했다.
“아아. 이, 이럴 수가…… 설마!”
진 노인 역시 지금 진송하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무엇이 원인인지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입 밖에 내면 그 예상이 현실이 될 것만 같아 아닐 것이라는 기대를 강렬하게 품으며 묵유자에게 물었다.
“무엇이냐? 대체 무엇이 문제길래 이 녀석이 피를 토한 것이야?”
“……주, 주화……입마가 아닌가 싶습니다.”
“…….”
묵유자의 대답에 진 노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었던 자신의 예상이 맞아 들었기 때문이다.
진 노인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 녀석아! 무공을 배우는 것이 그리 좋다면서? 내 너를 믿고 피눈물을 흘리며 가르치는 것을 포기한 것이 바로 전인데,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냐!’
진송하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진 노인은 가슴이 너무도 아파 와 속으로 그리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뒤늦게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송방이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송방은 진송하가 흘리는 피를 겁먹은 기색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저어, 주화입마라니……. 송하는 괜찮은 건가요?”
“…….”
“…….”
주화입마가 무섭다는 말을 사부에게 들어 본 적이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알지 못하는 송방이었다.
하지만 진 노인과 묵유자가 무거운 얼굴을 한 채 대답이 없자 이내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야, 임마! 기연이잖아? 기연을 얻다가 잘못되는 경우가 어디 있냐? 술은 필요 없으니까 제발 무사히만 돌아와!’
“쿨럭!”
그때 또다시 진송하가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 모습에 묵유자는 잠시 고민하다 각오를 굳힌 얼굴로 진송하의 등 뒤에 가 앉았다. 자신의 내기로 진송하를 진정시킬 작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송하는 혈맥이 엉크러져 타인의 내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였다. 방법이 없어서 시도를 하려는 거였지만 잘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아니면 또 누가 송하를 구할 수 있을까? 반드시 해내야 한다!’
그런데 진송하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대려는 묵유자의 팔을 강하게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무슨 짓입니까?”
진 노인이었다.
“잠깐만 기다리거라!”
“놓아주십시오. 지금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저것 좀 보거라! 빛이!”
“예? ……헉!”
급박한 상황에 미처 눈치채고 있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예전에 몽로주를 가져왔던 때처럼 진송하의 몸에서 미약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진 노인이 그 빛을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저 도덕경이 도와주는 모양이다.”
실제로 빛이 점차 강해질수록, 진송하의 고통스런 표정이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다행입니다. 사실 제가 조치를 취한다 하여 제대로 될 거란 보장은 없었거든요.”
“……사실 내가 널 막은 데는 네놈이 못 미더운 것도 한몫했지.”
그 말에 묵유자가 진 노인을 째려보고 있는 와중에도 빛은 점점 강해져서 어느새 진송하의 몸을 완전히 가리게 되었다.
이제 위험이 사라졌다고 믿자 진 노인과 송방은 입을 쩍 벌린 채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지만, 묵유자는 이내 사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르짖었다.
“송방! 어서 덮을 것을 가져오너라!”
“예,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구경하다 갑자기 들린 호통에 송방이 묵유자를 바라보며 그리 묻자, 묵유자가 답답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재차 외쳤다.
“인석아! 이대로라면 내원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수도 있단 말이다! 어서!”
“어, 어어…….”
그럼에도 송방의 발걸음은 떨어질 줄 몰랐다. 대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무슨 수로 덮을 것을 찾아 빛무리에 휩싸인 송하를 가린단 말인가?
그때 진 노인이 간단하게 비법을 내놓았다.
“벗거라.”
“……예?”
벗으라니 무엇을 말인가?
더구나 진 노인의 얼굴은 분명 묵유자를 향해 있었다.
“일단 급한 대로 옷으로라도 가려야지!”
“오, 옷을 말입니까? 아니, 그건 좋은 생각입니다만 왜 하필 제가……?”
“이놈아! 그럼 저 조그마한 놈의 옷으로 얼마나 가려지겠느냐? 아니면, 이 나이에 내가 벗으리? 아, 어서!”
“크윽……. 그, 그런!”
덮을 것을 구해 오라고 한 것이 자신이었으니 빼도 박도 못 하는 상황에 빠진 묵유자였다.
그나마 묵유자는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두 사람 분의 도복으로 감싼 후에도 얼굴 쪽이 가려지지 않은 바람에 나이 어린 송방은 속옷까지 벗어야 했던 것이다.
‘얌마!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냐. 흑흑.’
그렇게 속옷을 벗으며 속으로 흐느끼던 송방은 하얀 속옷 한가운데가 누렇게 얼룩져 있는 것을 보고는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흐흐. 이 녀석 당해 봐라!’
진송하가 계속 위험에 빠진 채였다면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겠지만,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았을 때 별문제가 없을 것 같자 그의 행동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일부러 노란 얼룩이 있는 곳을 정확히 진송하의 코에 맞붙인 송방.
나름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랄 수 있는 진송하에게 소심하게나마 복수를 성공하자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이제는 두 어른 몰래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 * *
한편, 진송하는 이대로 정신을 잃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싸여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시큼한 냄새가 나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으윽! 이게 무슨 냄새야?’
영 찝찝한 기분에 얼굴을 찌뿌리던 진송하는 그때 갑자기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상한 건 그 느낌이 그리 낯설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내 진송하는 바로 이곳 몽계에서 몽 노인이 석탁에 앉아 있을 때, 자신의 머릿속으로 획취방기니 뭐니 하며 어려운 말을 했던 그때의 느낌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이건 몽 할아버지? 맞죠, 몽 할아버지죠? 하, 할아버지! 저 너무 아파요. 살려 주세요!’
― …….
진송하는 어떻게 된 조화인지는 몰라도 곁에서 몽 노인이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는 도움을 청했지만 그 어떤 답도 들을 수 없었다.
‘제가 너무 욕심을 부린 건가요? 그래서 벌을 주시는 건가요?’
진송하는 자신이 너무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진송하의 머릿속에 몽 노인 특유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무극(無極)은 완전하기에 불완전하다. 혼원(混元)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의 기운이자 세상의 기운이니, 음과 양이 섞여 있는 세상이야말로 불완전하기에 완전한 것이다.
이전처럼 해석하기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송방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리타분하기 그지없는 도가의 가르침’을 말하는 건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진송하는 고통받는 와중에도 어이가 없었다.
‘으윽! 이상한 말만 하지 말고 빨리 저 좀 구해 주세요!’
하지만 무심하게도 다시금 몽 노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 혼원인 세상 속의 기운을 받아들이니, 굳이 제몸에 맞출 필요가 없다. 양은 양으로, 음은 음으로. 그저 주는 대로 받아들여야 제대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공포를 이겨 내어 몸의 기운을 믿어라. 원하면 원하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
할 말을 다한 듯, 몽 노인의 음성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달랐다. 몽 노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눈치챈 것이다.
‘원래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기운……. 그것들을 내 몸에 받아들인 순간, 이미 그 기운은 내 것이라고?’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고 하나,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이다 보니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닌 말로 몽 노인이 말하는 바는 기존 무림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고 있었다. 자신의 무공에 맞추어 가다듬고 다스려 진기로 소화해 내어야 하는 것이 바로 심법의 기본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내공을 증진시켜 준다는 영약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일단 단전에 쌓은 진기와 그 속성이 워낙 다르다 보니 복용을 한다고 해도 제 몸 안 어딘가에 떠돌아다닐 뿐, 오랜 시간 동안 심법을 운용하여 진기로 변환시킨 다음에야 단전에 쌓아야 하는 것인데, 몽 노인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몽 할아버지. 전 할아버지를 믿어요.’
그 말은 믿지 못하겠지만, 그 말을 한 몽 노인은 믿었다. 그간 몽계를 오가며 깨우친 가르침과 경험이 몽 노인의 말을 믿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사실 현재로서는 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마음을 굳힌 진송하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는 평소대로 태극심법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쏴아아.
잠시 후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바람은 밖에서 부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진송하 주위에서 바람이 일더니 그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