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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혜검 1권 (22화)
‘으음…….’
주변의 바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몸속의 기운들 역시 바람과 같이 막힘없이 몸 안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전과 같은 불안함은 없었다. 몽 노인의 가르침대로 공포를 잊고 지금 몸 안의 기운을 내 기운이라 생각하자, 정말로 기운들은 진송하가 원하는 대로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진송하의 얼굴에 어렸던 고통의 빛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대신 평안한 미소만이 감돌았다.
‘아아, 그랬구나. 원래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것이었어.’
진송하는 지금까지 양기와 음기가 진기로 소화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 바로 태극심법이 원래 그런 심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새 기운들이 중단전에 모여들었다. 모여 있음에도 이전처럼 충돌하지 않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중단전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것이, 마치 서로 사이좋게 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진송하는 온몸에서 고통과 피로가 싹 가시는 걸 느꼈다.
“후우.”
얼마 지나지 않았는 데도 진송하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
어느새 바람은 멈춰 있었다.
주위를 잠시 둘러본 진송하는 말없이 걸음을 놀리기 시작했다.
사방을 가로막은 흙벽 사이로 이동하는 발걸음은 마치 몸 안을 돌고 있는 기운들처럼 막힘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죽었다 살아난 데다 기연을 얻었음이 분명한데, 진송하의 얼굴이 그의 발걸음 못지않게 무거워 보였던 것이다.
저벅저벅.
진송하는 얼마 걷지 않아 흙벽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모두 머릿속에 흙벽의 경로가 태극심법의 구결과 긴밀히 연결되어 들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가까운 언덕 꼭대기에 설록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쿠쿠쿠쿠궁.
순진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설록의 앞에 서자 흙벽이 제자리를 찾아 땅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전까지 있었던 일이 꿈이었다는 듯 주위는 순식간에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지금 진송하의 주위에서 요동치는 기운은 지금의 일이 꿈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었다.
“…….”
진송하는 잠시 말없이 설록을 직시했다.
정확히는 설록이 아니라 설록 안에 내재된 좀 더 근원적인 무엇인가를 바라봤다.
이전이면 보이지 않았지만 방금 전의 일을 통해 몽계 내에 감춰진 무언가를 조금이나마 느끼고 볼 수 있었다.
마침내 진송하의 입이 열렸다.
“이제 알았어. 설록, 너는…… 검이지?”
검(劍).
검은 자신을 쥔 자에게 타인의 생사를 주관할 힘을 주는 가공할 물건이다.
그런데 검에는 눈이 없다. 검은 다루어야 하는 것이지 기대는 것이 아니다. 검에 기대는 순간 사람은 두 눈을 잃은 장님이 되는 것이다.
…….
언제나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던 설록이 이번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여전히 커다란 눈망울로 진송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진송하는 이미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록의 몸 안 깊은 곳에 감추어진 낡은 철검 한 자루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지금의 설록과 같이 순백의 빛깔을 지녔을 테지만, 이제는 낡아 누렇게 색이 바랜 검집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도 같았지만, 아직까지는 정확히 보이지 않았기에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진송하는 검에서 눈을 뗐다. 왠지 지금은 알아서는 안 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실상 지금 이렇게 눈에 보여서도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그렇구나. 방금 내가 얻은 힘은 지금 얻어서는 안 될 힘이었어. 아무래도 내가 너무 떼를 쓰는 바람에 일을 그르친 모양이구나. 미안해.”
설록은 검이었다. 그런 설록에게 기대는 순간, 진송하는 옳지 않은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설록이 나쁜 것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착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설록의 순진한 눈망울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달라면 준다.
그것을 쥔 자에게 득이 되는지, 실이 되는지를 따질 만한 이성이 존재치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마치 생물처럼 의사를 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설록이 평범한 검이 아니란 뜻이리라.
그래도 역시 검은 검.
진송하가 떼를 쓰니, 설록은 준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진송하가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설록의 잘못이 아닌, 명백한 진송하의 잘못이었다.
“후우…….”
그런데 이 와중에 어이없게도 얻은 것도 있었다.
진송하는 두 손을 가슴 어림까지 들어 올려 바라보았다. 두 주먹을 꽈악 쥐자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강맹한 힘이 느껴졌다.
‘이제 송방에게 물 주먹이라는 말은 안 들어도 되겠네.’
진송하는 이번 일을 통해 그간 자신의 몸을 짓누르던 험악한 기운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묵유자를 통해 들은 문제를 비로소 말끔히 해결한 것이다.
하지만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이 순리라면, 이번에 진송하가 얻은 힘은 설록에게 부탁하여 역리로 얻은 힘이었다.
무림에서는 이런 식으로 얻은 힘을 속성으로 얻은 힘이라 하여 마공(魔功)으로 취급한다. 그만큼 문제점이 많은 힘이란 말이었다.
더구나 진송하는 지금 단지 힘이 있을 뿐, 그것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방법은 몰랐다.
검을 쥔 손이 있다고 검을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룰 줄 모르는 힘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지금 진송하의 몸속의 기운은 그런 힘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예전처럼 비대하고 허약한 몸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진송하는 그렇기에 기뻐할 만도 할 터인데,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도덕경을 통해, 태극심법을 통해 무공을 익히는 길을 걷는 와중에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송방의 재촉 때문이었든, 자신의 성급함이나 무지함 때문이었든 그것은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있던 길을 걷지 않고, 그저 되는대로 뚫은 길이다 보니 진송하는 자신의 몸임에도 몸 안을 돌고 있는 이 기운들을 쓸 방법을 몰랐다.
이전처럼 세월아 네월아 팔을 돌려 무언가를 깨달은 후에야 얻었어야 할 힘을 다루는 방법도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손에 쥐게 되었으니 진송하의 마음이 무거울 만도 했다.
메에에.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던 진송하는 설록의 울음에 고개를 들었다.
“아!”
어느새 설록의 몸 안에 있던 검이 보이지 않았다. 몽 노인의 도움을 통해 얻은 인위적인 깨달음의 효과가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
진송하의 눈에 진한 아쉬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하늘을 나는 능력을 손에 넣었는데 제대로 날아 보지도 못하고 능력을 잃은 것만 같았다.
메에에.
“그래, 설록아. 잠시 길을 잃긴 했지만, 우리 다시 한 번 시작해 보자.”
아직은 이번의 실수가 얼마나 큰 손해를 가져오게 될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막연히 이번에 얻게 된 힘만큼의 손해는 감수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재빨리 쫓아내었다.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 실수를 통해 깨달은 것이다. 불안한 마음은 길을 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석아!”
“송하야!”
“야, 임마!”
걱정 반, 기쁨 반으로 물든 얼굴들이 보였다.
현실로 돌아와 눈을 뜨자마자 세 사람 모두 동시에 자신을 부르며 다가오는 모습에, 진송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풋!”
“허엇? 사, 사숙조님, 저 녀석 아무래도 충격으로 인해 실성이라도 한 모양입니다. 갑자기 실실 쪼개는 것 좀 보세요!”
“……정말이냐, 송하야?”
송방의 말에 묵유자까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묻자 결국 진송하는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푸하하하하!”
“허허, 허허허허.”
이내 진 노인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가장 빨리 진송하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눈치챈 것이다.
“허허허.”
“헤헤헤헤.”
다른 둘도 그제야 그것을 알았는지 웃음을 터트렸고, 이후 한참 동안 뒷마당에선 웃음소리가 그칠 줄 모르고 울려 퍼졌다.
묵유자와 송방은 모르고 있었다.
진송하와 진 노인이 웃는 이유가 자신들이 아직도 벌거벗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 * *
다음날 아침.
일찍 묵유자와 송방이 백운촌의 진 노인과 진송하의 집으로 찾아왔다. 어제 진송하가 워낙 늦은 밤에 깨어나 아무것도 묻지 않고 헤어졌기에,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묵유자는 진 노인의 성화로 묻지 못했지만 진송하의 몸에서 강대한 기운을 느꼈었다. 그래서 오늘은 두 사람이 지내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네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구나.”
“그게…….”
이어지는 진송하의 설명을 다 들은 묵유자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의문스런 얼굴로 재차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영약의 기운을 진기로 소화시키지 않고, 그냥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예.”
아무리 진송하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하지만, 묵유자는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그의 발언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말도 안 된다. 그 어떤 기운도 결국 심법을 통해 진기로 소화를 시킨 후에야, 단전에서 그 힘을 꺼내어 사용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몽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속의 기운은 혼원이니 그것을 굳이 제몸에 맞출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요. 양은 양으로, 음은 음으로. 그저 주는 대로 받아들여야 오히려 제대로 쓸 수 있다고요.”
그때 진송하의 말을 옆에서 듣고만 있던 진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결국 인간도 혼원인 세상 속의 일부이니, 무리랄 것도 없구나.”
진 노인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기에 편견 없이 진송하의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묵유자는 아니었다.
“말도 안 됩니다. 만에 하나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단전에 저장시키지 않으면 한 번 쓰고 난 후 다시는 채울 수 없을 텐데, 그런 기운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심법을 통해 공력을 키운다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여 진기로 소화한 후, 단전을 꽉꽉 채움으로써 그 그릇을 키운다는 의미가 아닌가?
하지만 진송하는 그게 아니라는 듯 자신의 양 젖꼭지 사이 한가운데 위치한 단중혈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기운들은 단전에 없어요. 으음, 여기쯤?”
“허억!”
묵유자는 천진난만한 얼굴을 한 진송하가 가리키는 곳이 어딘지를 깨닫고는 경악했다.
“주, 중단전? 중단전에 기운을 저장시켰다는 말이냐?”
그 말에 진 노인과 마찬가지로 지금껏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송방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중단전이라니, 송하야! 이번에는 진짜 기연이다! 중단전을 쓰는 무공이라면, 깨달음의 무학이라고 해서 엄청나게 수준 높은 거라고!”
“진짜? 헤에, 이곳이 바로 중단전이었구나.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당연하지! 뭐, 사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들었어. 너, 패도팔가의 으뜸인 패왕헌원가 알지?”
패도팔가(覇道八家).
기존의 오대세가(五大世家)에 패왕헌원가(覇王軒轅家), 남창양가(南昌楊家), 양주이가(揚州李家)가 더해져 만들어진 연합 세력으로, 당금 그 힘은 무림맹과 마교에 버금간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니, 처음 듣는데?”
하지만 무당산을 벗어난 적 없이 잡일꾼으로 살아온 진송하가 그런 것을 알 리 없었다.
무지한 진송하가 답답한지 송방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으이구! 물어본 내가 바보다. 아무튼 강호에서 대단히 유명한 가문이라는 것만 알아 둬. 그 헌원가의 무공이 바로 중단전의 무학이라고 하더라고.”
“헤에, 그렇구나. 그럼 또 다른 곳도 있어?”
“당연하지. 또 다른 곳으로는…….”
그렇게 두 아이가 중단전의 무학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묵유자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