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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5화)
Chapter 2. 게임의 규칙(2)


그래도 예상했던 것보다는 희망적이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났고 조금이나마 깨어날 확률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수술을 세 차례나 더 해야 하고 성형수술도 따라 받아야 할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과외만으론 수입이 부족했다.
정말 불행은 잇달아 온다는 말이 맞는지.
동생의 사고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내게 과외를 맡겼던 한 부모에게서 항의 전화가 왔다.
“선생님, 우리 애 성적이 왜 이 모양이야? 제대로 가르친 거 맞아?”
“네? 그게 무슨…….”
“학원에서 쪽지 시험을 쳤는데 엉망진창이잖아.”
그건 댁의 아드님이 워낙 돌머리인데다가 수업에 집중을 전혀 하지 않아서 그런데요. 사모님.
아이의 성적이 전혀 오르지 않았다며 다짜고짜 화를 내더니, 학생의 부모는 결국 남은 일수만큼 과외비를 돌려 달라고 했다.
소문이 퍼졌는지 곧 다른 부모들도 전화를 해서 같은 요구를 했다.
과외비는 대부분 어머니 치료비로 써 버려 내겐 당장 돌려줄 돈도 없다. 가득이나 동생 수술비 견적도 엄청난 금액인데 정말 절망적이다.
도둑질이라도 할까? 아님 사채라도 써?
그때 내 머릿속에 문뜩 이플렌시아에서 얻은 금화가 떠올랐다.
이플렌시아! 그래. 그게 있었지.
누군가 내 생각을 안다면 어리석다고 비웃겠지만, 지금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눈부신 황금빛의 금화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무언가 원초적인 마력이 담겨 있었다.
탐욕! 소유에 대한 충동!
나는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욕망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왕 가기로 마음먹었으니 이번엔 나름 철저히 준비를 하기로 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식수, 물, 무기.
일단 나는 대형마트로 가서 식수와 간단히 먹을 음식을 샀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사고 싶긴 했지만 생각처럼 맘에 딱 드는 것이 없었다.
가장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식칼이나 망치, 혹은 단검 같은 것이지만 무기로 쓰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길이가 너무 짧아.
좀 더 길고 치명적인 것. 이를 테면 영화에서 보는 칼이나 진검을 구하고 싶었지만.
그런 걸 구입하려면 외국 사이트 같은 걸 통해 구입해야 하고, 배송 되는 데 며칠 걸릴 게 분명했다.
도검소지증을 발급 받는 것도 귀찮았다.
소지증이 있다고 해도 그런 걸 가지고 다니면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될 것이 분명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너무 주목 받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나에겐 며칠 더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당장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은 야구방망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나는 구입한 물건을 배낭에 챙겨 넣은 후 곧장 지하철로 향했다.
덜컹∼ 덜컹∼

― 이플렌시아의 세계로 곧 진입합니다.

“음. 이번엔 사막인가?”
하늘엔 뜨거운 햇빛이 작열하고, 사방엔 온통 붉은 모래로 가득했다. 문이 열리자 숨이 콱 막힐 듯 열기가 안으로 휘몰아친다.
이플렌시아에 온 것은 두 번째일 뿐인데도 익숙한 느낌이 든다.
이번에도 역시 시계와 핸드폰은 정지해 버렸다.
추측컨대 이플렌시아에서는 현실에서 가져온 전자기기를 쓸 수 없는 것 같다. 지난번에도 그랬으니까.
문명의 이기는 사용할 수 없다. 이거구만.
시간을 확인할 수 없으니 갑갑하다.
열차가 몇 시간이나 이곳에 정차할지 알 수 없으니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없다. 나는 아쉬운 대로 근처에서 사냥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사막에도 사냥할 만한 게 있을까?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플렌시아의 짐승을 사냥해 금화가 나오는 구슬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딱히 걱정할 것도 없이, 곧 지축이 흔들리며 사냥감이 모래 위로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드드― 드드드드―
“알아서 기어 오는구나. 저건 샌드웜?”
지렁이를 100배쯤 확대한 것 같은 이 몬스터는 예전에 자주 하던 온라인 게임에서 한 번쯤 구경한 것이다.
그 게임에서 샌드웜 공략법이 뭐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긴 몬스터 공략 같은 거 알고 있다고 해도, 어차피 온라인 게임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겠지.
끼이이이이―
쇠를 긁는 듯한 소리를 내며 울던 샌드웜은 입 부분을 활짝 열고 나를 덮쳐 왔다. 톱날같이 날카로운 이빨이 금방이라도 내 몸속을 파고들 것 같다.
찌잉―
위기감을 느끼자 머릿속이 울리며 저절로 능력이 발현됐다.
주위가 느려지며 샌드웜의 이빨에 맺힌 타액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저게 지금 군침을 흘리고 있는 건가?
나는 망설임 없이 녀석의 머리를 향해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다.
부우웅― 파앙!
가죽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머리 한쪽이 움푹 파였다.
쩍 벌어진 입에서 초록색 체액이 울컥 쏟아져 나온다. 왠지 맞아 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자리를 피하니, 체액에 닿은 모래들이 순식간에 치이익― 소리와 함께 녹아 버렸다.
역시 독이 있었군.
“더럽게 침 흘리지 말고. 죽어라!”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서. 힘껏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다.
부우우웅― 퍼억!
워낙 사기에 가까운 완력 때문에, 샌드웜은 방망이질 몇 번에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토옥―
죽으면서 뱉어 내는 구슬의 색은 지난번과 달리 파랑색이었다.
색상에 따라 뭔가 등급 차이가 있나?
끼이이이이―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주위에서 샌드웜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마 진동을 느끼고 날 감지한 모양이다.
“그래! 어서 와라!”
녀석들이 많이 몰려와야지 많은 구슬을 얻을 수 있다. 정확하진 않지만, 이 능력의 유지 시간은 대략 5분 정도?
시간 내에 주변의 몬스터를 청소할 필요가 있다. 소모된 능력이 재충전되는 것도 대략 5분 정도 걸리는 거 같다.
파아앙―
잠시 후, 난 샌드웜을 다 해치우고 구슬을 수거했다.
파랑색 구슬의 숫자는 모두 78개.
구슬을 모조리 깨어 보니 64개의 금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보라색 구슬에서 나온 금화보다 1.5배 정도 크기가 컸다.
오! 구슬 등급에 따라 금화의 크기가 커지는구나.
게다가 그중 몇 번은 뜻밖에도 고풍스런 디자인의 단검과 은수저가 나왔다.
이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보기엔 세공이 꽤 정교하고 고급스러워 보인다.
인터넷의 판매 사이트에 올리면, 중세 무기 수집가들에게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좀 더 멀리 가 볼까?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한 나는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곧장 나아갔다. 이번에는 샌드웜 대신 전갈을 크게 확대한 듯한 모습의 몬스터들이 보였다.
슈우욱―!
접근을 알아챈 대형 전갈이 꼬리에서 독침을 쏘아 냈다. 나는 마치 야구공을 맞추듯 방망이를 휘둘러 그것들을 쳐 냈다.
따앙―
야구방망이에 맞고 튕겨져 나간 독침은 대형 전갈에게 되돌아갔다. 독침은 단단한 껍질을 두부처럼 관통했다.
대형 전갈들은 자신의 독에 면역이 없었는지 몸을 한차례 뒤틀더니 죽어 나갔다.
하긴 독사도 자기 혀를 깨물면 죽는다고 했지?
덕분에 사냥이 더 쉬워졌다.
“끼아아악!”
거의 무아지경으로 구슬을 수확하고 있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여성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곳에 여자? 혹시 다른 플레이어인가?
왠지 수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모른 척하기엔 신경 쓰였다. 위험에 처한 여성을 무시하는 것도 나중에 맘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
결국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곧바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어깨에 상처를 입은 여자가 대형 전갈을 피해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나이는 열여덟 살 정도? 꽤 예쁘네?
한눈에 봐도 예쁜 얼굴. 헐겁고 흘러내리는 듯한 의상을 입었지만 늘씬한 몸매의 굴곡이 가려지지 않았다.
쉐에에엑―
그녀는 대형 전갈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연신 물러나며 아무렇게나 쏘는 것 같은데도 쏘는 족족 정확히 명중했다.
양궁이라도 배운 건가? 활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안타까운 건 대형 전갈의 껍질이 너무 단단해서 화살이 전갈의 몸통에 깊이 박혀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때문에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진 못하는 것 같다.
화살로 견제하고 있지만 너무 너무 위태로운 상황.
아무래도 도와줘야겠다. 일단 예쁘니까.
“물러나세요!”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면 놀랄 거 같아서 난 일부로 소리치며 달려가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다.
콰직―
대형 전갈의 단단한 껍질이 단번에 움푹 파이며 깨어진다. 여자는 무식한 파괴력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쁜 얼굴로 그런 표정을 지으니까. 꽤 귀여운걸?
“구해 줘서 고마워요. 오빠!”
외모만큼이나 예쁘고 귀여운 목소리다.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원래 예쁜 여자에게 면역이 없어서 그런지 단지 오빠라고 한 번 불러 줬을 뿐인데, 난 뼈가 흐물흐물 녹아 연체동물이 된 듯 흐뭇해졌다.
참! 그러고 보니 난 동정이었군.
대학교 1학년 때까지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틈만 나면 아르바이트하느라 연애를 못했다. 군 입대한 후에는 직업여성에게 내 첫 순결을 바치기 싫어서 버텼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집안 형편이 어렵고 갑작스런 사건이 많아서…….
그래. 젠장! 나 여자한테 말도 잘 못 거는 숙맥이다. 어쩔래?
“그런데 오빠도 플레이어예요?”
여자의 질문에 난 그제야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그래. 너도 플레이어?”
“네. 전 이번이 여섯 번째예요.”
“난 이번이 두 번째 진입이야. 그런데 상처는 괜찮아?”
그녀는 어깨와 등에 상처를 입어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상처가 깊지는 않은지 출혈은 별로 심하진 않았지만 예쁜 여자가 입은 부상이니 예의상 물어보았다.
“제 가방에 연고와 붕대가 있어요. 등에 손이 닿지 않아서……. 좀 도와주실 거죠? 오빠.”
“그래. 물론 도와줘야지.”
그녀는 서슴없이 걸치고 있던 셔츠를 벗어 버렸다.
군살이 없는 가녀린 어깨 라인. 저도 모르게 엉뚱한 곳에 시선이 가서 당황스러웠다.
요즘 애들은 참 대담하단 말이야.
난 재빨리 그녀의 가방으로 시선을 옮겨 붕대와 연고를 꺼냈다. 연고를 손가락에 짜서 상처에 슥 펴서 발랐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놀랍도록 부드럽다. 이 아이, 피부 정말 좋구나.
머리카락에서도 왠지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런데 나 왜 이렇게 변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너무 오래 굶은 건가?
되도록 잡생각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재빨리 상처에 붕대를 감았다.
“고마워요. 오빠.”
“아냐. 별것도 아닌데 뭐.”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그녀는 셔츠를 다시 입으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 아직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제 이름은 이은지예요. 나이는 열여덟이라 아직 고등학생이구요.”
“내 이름은…….”
무심코 대답하려다 난 흠칫했다.
그런데 이 여자를 믿어도 될까?
이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 무턱 대고 믿기엔 그녀의 등장도 너무 갑작스러웠다.
이곳엔 몬스터가 너무 많이 깔려 있다.
대형 전갈 한 마리도 해치우지 못해 쩔쩔매면서 이곳까진 어떻게 왔을까?
왜 부상은 딱 두 곳밖에 입지 않았으며, 상처가 심하지 않을 만큼 스치기만 했을까?
“……장종현.”
머릿속에 떠오르는 친구의 이름을 댔다.
예쁜 여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죄책감이 들고, 또 내 생각이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내 생각이 틀렸다면 나중에라도 사과하면 그뿐이니까.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종현 오빠. 저는…….”
은지는 날 만난 게 정말 반가웠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녀가 처음 이곳에 오게 된 것은 한 달 전, 백화점 엘리베이터를 통해 갑자기 이동했다고 한다. 다행히 그녀는 다른 플레이어들을 만나 친해졌고, 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은 동료들의 개인 사정 때문에 같은 시간에 진입할 수 없어서 혼자 진입했다가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