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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6화)
Chapter 2. 게임의 규칙(3)
“갑자기 몬스터 앞에 떨어질 줄은 몰랐어요. 동료들과 같이 다닐 때는 몬스터들이 그렇게 센 줄 몰랐는데 위험했죠. 전 보조계 능력자라 전투에 특화되진 않았거든요.”
그녀에게 부여된 능력은 보조계로 악기를 연주하면 아군 전체의 공격력이 상승한다고 했다.
“이게 제 악기예요.”
그녀의 악기는 흙 피리의 일종인 오카리나. 오카리나에서 맑고 투명한 음색이 흘러나오자 가슴 속 깊은 곳이 시원해지며 힘이 불끈불끈 솟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에 대한 의심이 조금씩 옅어졌다.
무언가 숨기는 듯한 기색이 아닌데다 이야기도 앞뒤가 잘 맞아 꾸며 낸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빠의 능력은 강화계죠? 꽤 강력한 거 같던데…….”
“강화계가 뭔데?”
그녀의 설명을 간단히 요약하면, 플레이어에게 무작위로 주어지는 능력은 대충 다음과 같이 나뉜다고 했다.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강화계.
상처와 독을 치료하는 치료계.
일행의 능력을 상승시키는 보조계.
발화 능력 등 원소를 다루는 능력은 마법계.
무기나 물품에 능력을 부여하는 부여계.
초능력(ESP)과 같은 능력을 발휘하는 정신계.
적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저주계.
그리고 어느 한 종류로 나누기 애매한 기타 능력들.
간단한 설명을 마치고 나서 은지는 대형 전갈에서 나온 구슬을 집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오빠 때문에 살았으니까. 구슬은 종현 오빠가 가져요.”
“아냐. 네가 가져.”
서로 양보하는 훈훈한 모습. 이렇게 슬슬 서로 간의 애정이 싹트는 건가?
“아니에요. 오빠는 무기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구슬 모아서 자판기에서 뭐라도 좀 사요.”
“자판기?”
갑자기 자판기라니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 잘 모르시겠구나. 자판기라는 건…….”
이플렌시아의 세계 곳곳에 물품을 판매하는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자판기는 말 그대로 현실에 있는 자판기와 모양이 거의 비슷한데, 구슬을 넣으면 현실에서는 팔지 않은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가이드 포인터는 꼭 구입하세요.”
“가이드 포인터?”
“초보자에겐 특별히 붉은 구슬 하나에 판매하고 있어요. 원래 가격은 파랑색 구슬 3개나 하거든요.”
은지는 자신의 팔목에 찬 가이드 포인터를 보여 주었다. 생긴 건 꼭 시계와 흡사한데 이걸로 간단한 지도를 보거나 이플렌시아에서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플렌시아의 1회 진입 시간은 8시간이에요. 현실에선 2분의 시간이 흐르죠.”
“자판기는 어디 있지?”
시간을 확인할 수 없어 여러모로 갑갑했기에 난 가이드 포인터만은 꼭 구입하고 싶었다.
“대략 100미터 반경으로 하나씩은 설치되어 있으니까. 곧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자판기를 찾아 이동하며 도중에 나타난 대형 전갈을 사냥했다.
은지가 뒤쪽에서 오카리나를 불자 내 파괴력이 대략 1.5배 상승하는 것 같았다. 사냥은 더 쉬워져서 두 방에 죽이던 걸 한 방에 한 마리씩 보낼 수 있었다.
흐음 진짜 자판기 같이 생겼네?
마침내 찾아낸 자판기는 현실에서 흔히 보는 자판기를 좌우로 다섯 배 정도 늘린 듯한 크기였다. 유리에 상품 샘플이 진열되어 있는 것까지 똑같다.
일단 가이드 포인터를 구입하고 난 고민에 빠졌다.
구슬 하나하나가 돈이기에 아무것이나 충동구매할 수는 없었다.
진열된 상품으로는 초강력 발모제나 정력제 같은 시답지 않은 것과 각종 무기들을 포함해 눈이 돌아갈 정도로 어지럽게 종류가 많았다.
설명이 진짜라면 정력제 같은 건 현실에서 비싸게 팔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성분을 정확히 분석할 수 없는 한 특허를 내는 건 무리다.
그 외에도 신기한 물건이 많았지만 터무니없이 비싸거나 어떤 원리로 신비한 효능을 발휘하는지 설명하기 곤란한 것들이 많았다. 설명하지도 못하는 물건을 팔다가 나중에 정부 요원에게 잡혀가 고문당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내심 황금으로 바꿀 수 있는 구슬을 쓰는 게 망설여졌다.
지금 당장은 내 강화계 능력으로 사냥은 충분히 가능하니까 무기를 사는 것도 망설여졌다.
그러다가 난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이건 뭐야?”
“그건 아지트 생성 구슬이에요.”
아지트는 간단히 말해 동료들이 모일 수 있는 거점이다.
구슬을 통해 아지트(거점)를 생성하면 이플렌시아에 진입할 때 곧바로 거점으로 접속할 수 있다. 또한 동료들도 거점에 등록해 초대할 수 있다.
“동료들이라는 건 어떻게 인식시키는 거지?”
“가이드 포인터를 서로 접촉시키면 동료로 인식돼요.”
질문을 통해 그녀에게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그녀도 어떤 원리로 플레이어가 선별되며 우리가 왜 이곳에 진입하게 되었는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은지가 상큼하게 웃으며 내게 제안했다.
“오빠도 우리 일행에 들어올래요?”
그녀에 대해 거의 믿게 되긴 했지만, 아직 백 퍼센트 믿는 건 아니기에 난 제안을 거절했다.
“그건 네 일행과 일단 이야기를 해 본 뒤 결정할게.”
신중한 내 답변에 그녀는 애교 있게 웃으며 다시 권했다.
“그럼 아지트로 가서 한번 만나 볼래요? 30분쯤 후에 동료 한 명이 들어오기로 했거든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열차에서 멀어지는 게 좀 맘에 걸리네.”
현실로 돌아가려면 열차를 타야 한다.
그런데 은지의 말에 그런 내 확신이 흔들렸다.
“설마, 오빠는 열차를 다시 타야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접속 시간이 다 되면 어디에 있든 저절로 현실로 돌아가게 돼요.”
그러고 보니 애초에 왜 열차를 타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거지?
생각해 보니 낯선 세계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생긴, 그냥 근거 없는 확신이었다.
“그래. 일단 한번 만나 보지, 뭐.”
그곳을 떠나기 전 머릿속을 문득 스치는 생각에, 난 자판기 앞에 멈춰 물품들 목록을 가져온 노트에 메모했다.
나중에 무엇을 구입할지 찬찬히 궁리해 볼 생각이었다.
어? 이건 뭐지?
내가 관심을 느낀 물건의 이름은 스마트 드러그(Smart Drug).
복용하면 암기력과 이해력이 상승한다니 딱 수험생을 위한 맞춤 아이템이잖아?
지금 난 나쁜 소문이 돌아 과외 받는 학생이 대폭 줄어든 상태다.
그러나 학생에게 몰래 이걸 먹이면 성적을 대폭 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 과외를 받는 학생이 다시 대폭 늘어나지 않을까?
스마트 드러그의 가격은 고작 파랑색 구슬 하나.
가격이 이렇게 싼 것은 약효의 지속 시간이 6개월밖에 가지 않기 때문이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수능시험만 잘 치게 해 주면 나중에 돌머리가 되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니까.
그래! 결심했어.
난 큰맘 먹고 스마트 드러그를 10개 구입했다.
“이제 올 때가 된 것 같아요. 가요, 오빠!”
“어, 알았어!”
은지의 동료를 만나기 위해 그녀를 따라 그들의 아지트로 향했다. 물론 거점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몬스터들이 우리의 앞길을 착실히 가로막았다.
“앗! 또 대형 전갈이 나타났어요.”
“오빠한테 맡겨 둬!”
전갈과의 전투 패턴에 익숙해지며 난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전투할 수 있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빠른 속도로 구슬을 모을 수 있고, 결과적으로 금화도 많이 모을 수 있으니 점점 더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 이런 속도면 곧 동생 수술비 정도는 마련할 수 있겠어.
“저 앞에 보이는 건물이 저희 아지트예요. 오빠!”
“그래?”
그들의 아지트는 생각보다 현대적인 양식으로 축조된 2층 건물이었다.
그런데 잠시 건물에 시선을 빼앗겨 앞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어?”
갑작스레 모래 안쪽으로 몸이 빠져들어 갔다.
혹시 사막 유사 같은 건가?
사막에는 입자가 매우 가는 모래가 있어서 자칫하면 그 속에 끝없이 빨려 든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곧 이것이 유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밑에 텅 빈 공간.
그것은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얇은 판자를 얹은 뒤, 다시 모래로 판자를 덮은 간단한 함정이라는 걸 의미했다.
게다가 어깨까지 빠지고 나니 발바닥에 단단한 바닥이 닿는다.
이것이 유사라면 멈추지 않고 계속 빨려 들었을 것이다.
함정.
쉐에에엑―
함정이라는 걸 인식하는 순간 뒤에서 무언가 쏘아 낸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았으나 예상과는 달리 화살은 아니었다.
뭘 날린 거지?
파악―
궁금해하는 순간, 뭔가 날카로운 것이 내 가슴과 미간에 박혀 들었다.
끔찍한 고통이 파고든다.
“크아아악!”
“단번에 죽지 않네? 괴물 같은 놈!”
은지는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보이지 않는 뭔가를 날렸다.
쉐에에엑―
난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자세히 살폈다.
찌이잉―
능력을 최대한 끌어 올리자 세계가 더욱 느려졌다.
그와 함께 시력도 수십 배로 좋아졌다. 나는 30배는 강해진 시각으로 허공에 뜬 먼지 입자 하나까지 상세히 볼 수 있었다.
어? 뭔가?
공기 중의 먼지가 미세하게 날리며 아지랑이처럼 일렁인다. 아마 그녀의 숨겨진 능력인 듯.
공기를 압축해 탄환처럼 날리는 건가?
그녀의 능력에 대해 나름대로 추측하며 난 주먹에 강화계 힘을 모두 집중해 일렁이는 공기를 후려쳤다.
파아앙―
주먹이 좀 까지긴 했지만, 다행히 그것을 튕겨 낼 수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닥치고 그냥 죽어!”
쉐에에엑―
그녀는 다시 내게 바람의 탄환을 날렸다. 이번에는 숫자가 2개에서 4개로 늘었다.
파앙―
난 주먹을 빨리 휘둘러 먼저 2개를 튕겨 낸 후 나머지를 처치했다. 공격을 모조리 쳐 낼 줄은 몰랐는지 그녀는 발톱을 세운 암고양이처럼 표독스럽게 외쳤다.
“흥! 이번에도 어디 막아 보시지!”
쉐에에엑―
바람의 탄환은 총 일곱 개.
전력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으나 모두 튕겨 내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바람의 탄환이 전신에 구멍을 내며 파고들었다.
“크아아악!”
그녀는 비명을 지르는 나를 향해 인정사정없이 바람의 탄환을 쏘아 냈다.
어깨와 팔을 파고든 공격이 뼈를 부러뜨렸다. 그렇게 나를 무력화시킨 마녀는 내 머리와 심장을 향해 연이어 바람 탄환을 쏘았다.
퍼벅! 빠직―
얼굴뼈와 가슴뼈가 으깨진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탄환이 기어이 내 두뇌와 심장에 충격을 주었다.
“쿨럭!”
내장이 상했는지 입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져 나왔다. 강화계 능력으로 쏟아지는 공격을 버텨 내고는 있지만 얼마 못 갈 것 같다.
“크윽.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렇게 악독한 방법까지 써서 날 죽이려 드는 걸까?
이미 승패가 자기 쪽으로 기울었다고 생각해서 여유가 생겼는지, 그제야 그녀가 키득키득 웃으며 내 질문에 대답했다.
“별로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다만 네 목숨이 필요해서 빼앗는 것뿐이야.”
“쿨럭. 빼앗는다고? 그게 무슨?”
“그야 플레이어를 죽이면 라이프를 얻을 수 있으니까. 라이프 포인트가 있으면 죽어도 부활할 수 있거든. 그리고…….”
순간, 뭔가 황홀경에라도 빠진 듯 그녀의 동공이 확장되며 순식간에 탐욕스런 눈빛으로 가득 찼다.
혀가 뱀처럼 늘어나며 아랫입술을 할짝 핥았다.
“라이프 포인트를 모아야 해. 이제 370개만 더 모으면……. 아니! 널 죽이면 369개만 남았어!”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369개? 그게 무슨 소리야? 라이프 포인트를 모으면 어떻게 된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