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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7화)
Chapter 2. 게임의 규칙(4)


그녀는 잔뜩 흥분한 듯 외쳤다.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어. 빠져나갈 수 있다고!”
그녀는 마치 자신이 이곳에 갇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제한 시간이 되면 자연히 현실로 되돌아가는 거 아닌가?
“빠져나가다니 무슨 뜻이야?”
기회!
나는 말을 거는 것과 동시에 품속에 숨겨 뒀던 단검을 꺼내 던졌다.
궁금증보다는 그녀를 해치우는 게 더 급했기 때문.
파악!
단검은 방심하고 있던 그녀의 미간에 정확히 박혀 들었다.
“이런, 바보 같은……. 다음엔 널 꼭…….”
그녀는 한마디 말만 남기고 자리에 힘없이 허물어졌다. 숨이 끊기자 그녀의 몸이 모래처럼 변해 한 줄기 바람과 함께 흩어져 버렸다.
샤라락―
“나도 방심했으니 너무 억울해할 것 없어.”
능력을 숨긴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나에겐 강화계 능력 말고도 괴물 같은 회복력이 있었다.
그녀에게 말을 시키며 부러진 뼈가 아물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품속에 숨긴 단검으로 난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 냈다.
살아남았다.
그때 가이드 포인터에서 기계음이 울렸다.
삐빅―

― 플레이어를 죽여 라이프 포인트를 얻어 냈습니다. 현재 플레이어가 보유한 라이프 포인트는 ‘1’입니다.
― 상대 플레이어를 죽여 모든 속성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조금 늘었습니다.
― 상대의 능력을 흡수하는 데 실패합니다. 대신 특수 능력의 일부분이 순수한 에너지로 변환 되어 흡수됩니다.

라이프 포인트를 얻었으나 전혀 기쁘지 않았다.
플레이어끼리 서로 죽이려 한다는 사실과 이플렌시아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사망한다는 끔찍한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곳에 오는 건,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데 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플레이어들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을 찾아오는 걸까?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돈 때문에 진입하는 걸까? 아님 비명을 지르면서도 공포영화를 보는 것처럼 짜릿한 스릴을 즐기러?
뭔가 플레이어들이 이곳에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더 있을 거 같았다.
게다가 이은지가 남긴 말도 뭔가 찜찜했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니? 그 말은 마치 자신이 이곳에 갇혀 있다는 말처럼 들리잖아?
내가 알기로는 이플렌시아에 진입한 플레이어는 제한 시간이 다 되면 자연히 현실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법칙에 숨겨진 예외 조항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년의 말을 좀 더 들어 보고 죽일 걸 그랬나?
그러나 그때 난 회심의 반격이 그녀에게 통할지 어떨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반격할 기회가 오자마자 공격해 버린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이런 생각에 골몰할 때가 아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해!”
그녀의 동료들이 곧 이곳에 올지도 모른다. 일단 그들은 내 적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편이 안전하다.
파악!
강화계 능력으로 모래벽을 조금씩 허물어뜨린 뒤 난 함정을 벗어났다. 물론 이은지의 활과 가방도 챙겨 가는 걸 잊지 않았다.
다시 지하철 열차로 돌아간 나는 몬스터 사냥을 자제하고 그곳에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다.
사냥이고 뭐고, 돌아다니다가 플레이어들에게 도로 사냥당할 수도 있어!
몇 시간 후.
나는 무사히 이플렌시아의 세계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덜컹∼ 덜컹∼
익숙한 지하철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휴우.”



Chapter 3. 신들의 저주(1)


현실 세계로 되돌아간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역시 금화를 현금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이런, 나란 놈은 뼛속까지 황금만능주의로 찌들었군. 찌들었어.
몇 군데 돌아다니다 보니 꽤 시간이 걸렸지만, 총 2천만 원 가까이 되는 현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지난번보다 사냥을 많이 한 탓도 있지만, 이은지의 가방에 구슬이 많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수확이 컸다.
활과 단검도 중세 무기 수집가들에게 각각 42만 원, 37만 원이라는 예상보다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었다. 세공이나 장식이 정교한데다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이라 마니아들의 소유 욕구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이걸로 당장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일단 동생인 형기의 수술비는 낼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당분간 이플렌시아에 가는 건 자제해야지. 아무렴.
몬스터 사냥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플레이어에게 공격 받았다.
문명화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나로서는 살해 위협을 받는다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이은지가 죽으면서 ‘다음엔 널 꼭…….’이라고 한 것이 맘에 걸렸다.
생략된 말은 아마 죽이겠다거나 찾아서 복수하겠다는 정도의 말이겠지?
그녀는 라이프 포인트를 여러 개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 이플렌시아의 어디선가 다시 부활했을 것이다.
그건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이 한동안 날 찾아다닐지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진입 위치가 무작위라는 걸 생각하면 그녀가 당장 날 찾을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것만 믿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곳을 빠져나가느니 했던 그녀의 말도 마음에 걸렸다.
이플렌시아에 갔다가 만약 갑자기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없게 된다면?
얼마 전에 암 수술을 받고 회복이 안 된 어머니와 병상에 누워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하는 동생은 누가 챙기랴? 설마 집 나간 아버지가? 아님 완전히 발랑 까진 철없는 막내가?
이플렌시아 진입을 늦춘 이유는 또 있었다.
돈을 벌 만한 아이템이 생겼으니까.
내가 믿고 있는 아이템은 스마트 드러그(Smart Drug).
일단 실험 삼아 과외 받는 학생에게 스마트 드러그를 먹여 보기로 했다.
“선생님,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래.”
난 학생이 자리를 비우는 짧은 틈을 타, 미리 가루로 만들어 둔 약을 음료수에 탔다.
이러고 있으니까 내가 마치 범죄자라도 된 기분. 설마 이거 부작용은 없겠지?
뒤늦게 불안해지기 시작했으나 이미 내친걸음이다.
드륵―
문이 열리며 학생이 들어오자 난 그에게 음료수 잔을 건네주며 태연히 말했다.
“음료수 한 잔 마시고 하자.”
“고맙습니다.”
고맙긴. 기꺼이 실험 대상이 되어 준 너에게 내가 고마운 거지.
마침 며칠 후.
녀석이 기말시험을 치게 되어서 실험 결과도 빨리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반에서 3등. 전교에서 27등.
원래 꼴지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던 녀석이었으니, 학생의 집에선 난리가 났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뭘 이런 걸 다…….”
덕분에 과외 선생 주제에 특별 보너스까지 받았다.
사모님들 사이에서 소문이 도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 나쁜 소문만 빨리 도는 것이 아니란 게 증명됐다.
한 달 만에 머리 텅텅 빈 문제아를 상위 1퍼센트 안에 드는 엘리트 학생으로 만들어 주니 아줌마들의 치맛바람이 무섭게 휘몰아쳤다.
핸드폰에 불이 날 정도로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난 것이다.
스마트 드러그가 10개밖에 없었기에 일단 10명만 선별해서 뽑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인원 제한이 사모님들의 과열 경쟁을 자극해, 과외비도 어마어마한 액수로 오르는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졌다.
믿기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거금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호사다마, 즉 좋은 일 뒤에는 좋지 않은 일이 마구 일어난다고 했던가?
불행의 그림자는 끈질기게 내 발목을 잡았다.
지독한 두통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받은 CT와 MRI 뇌검사.
결과를 들으러 종합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내게 다짜고짜 사형선고를 내렸다.
“뇌종양입니다.”
“뭐라고요?!”
“종양의 크기가 꽤 큽니다. 혹시 최근에 이유 없이 토하거나 갑자기 앞이 안 보이거나 안면 마비가 오거나 한 적은 없습니까?”
“…….”
의사는 내가 두통 외에 별다른 자각증상이 없는 걸 신기해했다.
“……살 수는 있는 겁니까?”
“수술 성공 여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수술하셔야 그나마 생존율을 높일 수 있습니다.”
“…….”
수술이 성공할 확률은 40퍼센트. 수술이 끝나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
시력을 상실하거나 전신 마비가 올 확률이 꽤 크다고 했다.
그렇다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한 달 안에 사망. 그것도 말이 한 달이지 당장 내일 쇼크가 와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제가 그렇게 상태가 안 좋은 건가요?”
“솔직히 말해 지금 환자분이 멀쩡히 걸어 다니는 것도 제 눈에는 신기합니다.”
“…….”
희망이 조금 보인다 싶더니 그건 신기루였다. 하늘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
그러나 난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무덤덤했다.
현실감 상실.
너무 엄청난 일을 당해 모든 것이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현실이 아닌 듯 붕붕 떠다니는 기분이다.
그런 기분으로 난 냉정히 상황을 분석했다.
일단 40퍼센트라고 해도 수술은 해야 한다. 가망성이 적다고 해도 생명을 간단히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확률이 낮은 만큼 수술이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 준비를 철저히 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수술 실패로 죽게 된다면 차라리 깔끔한 결과.
수술 부작용으로 식물인간 비슷한 상태가 된다면, 입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가족들의 손으로 산소호흡기를 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어느 정도의 자금을 확보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스마트 드러그(Smart Drug)만으로는 부족해.
단순히 스마트 드러그를 이용해 과외 학생의 수를 최대한 늘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플렌시아에서 사냥해 금화를 버는 것도 며칠 사이에 큰돈을 벌진 못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일주일.
일주일 후에 난 뇌수술을 받아야 한다. 수술을 뒤로 미룰 수는 없다. 종양이 더 커지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제거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이 노트에는 이플렌시아의 자판기에서 파는 다양한 아이템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돈이 될 만한 걸 찾아내야 한다.
단기간에 판매하기 힘든 물품은 빼고, 설명하기 힘든 물건은 빼 버리고, 구슬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물건을 빼고 나니 27개의 물품만 남았다.
그 27개 중에 쓸 만한 것은 3가지.
초강력 정력제인 스테미너 드러그(Stamina Drug).
젊음을 되찾아 주는 레스트레이션 드러그(Restoration Drug).
초강력 다이어트 드러그(Diet Drug).
물론 현실에도 비슷한 약은 있지만 이것들은 효과가 확실하고 부작용이 전혀 없는 물건들이다.
스테미너 드러그는 70대 노인에게 며칠 밤을 불태울 능력을 주고, 레스트레이션 드러그는 꼬부랑 할머니의 몸 상태를 20대 초반으로 되돌려 준다. 다이어트 드러그는 요요현상 없이, 여자 스모 선수를 가냘픈 들장미 소녀로 만들어 주는 마법과도 같은 약.
그 효능만 증명된다면 얼마든지 비싼 값에 팔아먹을 수 있으리라. 다만 문제는 약품의 출처를 밝힐 수 없고, 신약 등록을 하기엔 시간도 연구 비용도 없다는 점이다.
불법 유통. 답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쁜 짓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령도 모르는 일반인이 그걸 시도하다간 단번에 쇠고랑 차게 되겠지.
그때 마침 적당한 인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군대 후임 중에 오창규라는 애가 있었다.
알고 보니 조폭이었는데 의외로 성격도 좋고 선임자를 하늘처럼 떠받드는 녀석이었다. 3개월 차이밖에 안 되어서 보통 말년에는 친구처럼 지내기 마련인데 녀석은 항상 깍듯했다.
지금쯤 제대했을 것 같은데.
생각난 김에 곧장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누구요?”
핸드폰으로 녀석의 묵직한 중저음이 들리자 반가웠다.
“나다. 민혁.”
“헛! 강민혁 병장님!”
“제대했는데 병장은 무슨! 그보다 지금 바쁘냐?”
“아닙니다! 어디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