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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8화)
Chapter 3. 신들의 저주(2)


잠시 후, 허름한 주점에서 창규를 만날 수 있었다. 가벼운 농담과 인사를 서로 나눈 뒤 난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요즘 뭐 하고 지내냐?”
“중국을 오가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사업이라고 해도 합법적인 것은 아니겠지?
예전 같았으면 손 씻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녀석이 여전히 그 바닥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반가웠다.
“그래? 그럼 내가 사업 아이템 하나 줄까?”
“그게 뭡니까?”
“출처는 밝힐 수 있지만 효과가 확실한 약이 있어. 아! 물론 마약은 아냐.”
녀석에게 제안한 것은 국내법의 효력이 미치지 못하는 해외 서버를 통해 내가 제공하는 약을 팔라는 것이다. 창규는 항상 반듯한 이미지였던 내가 이런 제안을 하는 것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왜? 어렵냐?”
“물건만 확실하다면 판매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형님! 이건 자칫하면 쇠고랑 찰 수도 있습니다. 저야 뭐, 어차피 이 바닥에서 굴러먹던 놈이라 상관없지만 형님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돈이 필요해.”
녀석과 손을 잡으려면 어느 정도는 사실을 말할 필요가 있어서 이플렌시아의 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일을 사실대로 말했다.
“형님께서 뇌종양이라니…….”
“그런 이유로 네 도움이 필요해. 도와주겠어?”
도와 달라는 말에 녀석은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형님일인데 당연히 제가 도와야죠.”
와락―
나는 창규의 말이 고마워서 녀석을 덥석 안았다.
역시 이 녀석! 의리 하나는 알아줘야 한단 말이야.
“그런데 민혁 형님!”
“뭐?”
“수익은 몇 대 몇으로 하실 겁니까?”
“…….”
역시 세상은 썩었어!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고!

창규와 헤어진 나는 곧바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이플렌시아의 세계로 진입해 판매할 상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하지만 내게 남은 시간은 일주일. 망설일 시간이 없다.
음주 상태라는 것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일부러 석 잔만 마시고 말았으니 별다른 지장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난 머릿속을 문뜩 스치는 생각에 발걸음을 멈췄다.
설마, 플레이어들이 이플렌시아에 진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건가?
뇌종양이 생긴 건 플레이어 능력이 생긴 시점과 같다.
그럼 다른 플레이어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능력이 생긴 순간에도, 뇌종양과 비슷한 불치병이 그들에게 생겼을지도 모른다.
등골이 오싹한 기분과 함께 생각이 이어졌다.
플레이어 능력 때문에 시한부 인생이 되었다면 이플렌시아의 세계에 병을 치유할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신(God)의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적어도 내가 이플렌시아를 만든 신이고 이것이 신들의 유희라면, 나라면 아마 그런 식으로 만들었을 것 같다.
답이 없다면 플레이어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일 리 없고, 플레이어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게임 따윈 재미가 없을 테니까.
내가 신이라면 죽음의 공포로 플레이어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뒤, 다시 달콤한 희망으로 그들을 유혹할 것이다. 그렇게 가지고 놀다가 질리면, 어린아이가 손가락으로 개미를 쿡쿡 눌러 죽이듯 폐기 처분해 버리겠지.
이은지는 라이프 포인트를 모은다고 말했다.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게 사형선고에서 벗어날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희망.
신들의 유혹.
나는 죽고 싶지 않았기에 그 불확실한 희망에도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흥분하자 강화계 능력이 발동했고, 강화계 능력이 발현되자 오감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민감해진 청각에 주위의 소리가 확대되어 들려왔다.
그중에 가장 크게 느껴지는 소리는 나를 향해 다가오는 누군가의 발소리였다.
음? 다가온다고?
맞은편에서 오던 한 사내가 구두 발소리를 내며 내게 접근했다.
뚜벅. 뚜벅.
“불 좀 빌려 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약간 경계심이 일어 상대의 얼굴을 쳐다봤다.
모자를 쓰고 있는데다 공교롭게도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187의 장신인 내가 보기에도 키가 크고, 머리카락을 은발로 염색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옷차림은 고급스러웠으나 다소 구식이었으며 또 목소리로 판단하기에 40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였다.
그러나 특별히 이상해 보이는 건 없다.
요즘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 내가 너무 예민해졌나?
“네. 잠시만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라이터를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주점에 놓고 온 모양이다. 딱히 미안할 건 없지만 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연장자에겐 공손히.
“라이터가 없네요.”
“하하! 그런가?”
갑자기 왜 웃지? 게다가 반말?
약간 불쾌해지려는 순간 아저씨가 다시 말했다.
“그럼 제가 불을 피워야겠네요.”
불을 피우다니 라이터가 없는 거 아니었어? 지금 이 양반이 날 가지고 노나?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웃으며 손가락을 따악 하고 소리 나게 튕겼다.
화르륵―
순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축구공만 한 크기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무슨 TV 마술쇼라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뭐지? 이 아저씨, 플레이어인가?
당혹스런 의혹과 함께, 난 내게 적대적이었던 이은지를 떠올렸다. 머릿속에서 위험을 알리는 빨간 등에 번쩍하고 불이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럼, 실력 좀 볼까? 강민혁 씨.”
내 이름을 알고 있다!
깜짝 놀라는 순간, 그는 날 향해 불꽃을 쏘아 냈다.
위험!
너무 가까운 거리라 불꽃을 피하는 건 무리였다.
가슴에 부딪힌 불꽃이 상의를 태우며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피부가 타들어 가는 끔찍한 고통이 강화계 능력을 일깨웠다.
찌잉―
급히 불을 끄려고 나는 근처에 보이는 횟집 유리에 몸을 던졌다.
쩌억― 파아앙―
단번에 유리창이 산산조각으로 깨지며 수족관에 있던 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내 몸에 붙은 불꽃은 수족관의 물로 꺼지지 않았다.
마법으로 일으킨 불꽃이라서 그런가?
“크아아악!”
끔찍한 고통 때문에 절로 비명이 흘러나왔다. 생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으로 발버둥 치는 나를 사내가 오만한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이거 생각보다 싱겁군. 잔뜩 기대했는데…….”
화르륵―
사내가 일으킨 불꽃이 또다시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녀석의 불꽃을 걷어찼다.
파앙!
강화된 능력 때문인지 불꽃이 터지며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오! 파괴력은 확실히 놀라운데?”
나는 감탄하는 그를 향해 힘껏 주먹을 날렸다. 잠시 방심한 건지 사내는 내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빠악―
단번에 갈비뼈가 왕창 나가며 그의 입에서 울컥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허물어지듯 쓰러지는 사내의 턱을 인정사정없이 걷어찼다.
그러나 그 순간, 사내는 손끝으로 불꽃을 만들어 냈다.
화르륵―
불꽃의 공이 공격을 가로막았다.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푸른색에서 흰색으로.
순식간에 불꽃의 온도가 올라가더니 갑자기 폭발해 버렸다.
콰아앙!
폭발의 충격이 나를 덮쳤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강화계 능력이 충격으로부터 날 보호해 준 것 같았다.
다만, 잠시 멈칫한 사이 사내는 이미 뒤로 몸을 피해 간격을 벌렸다.
적어도 파괴력은 내가 우위.
비록 피부가 타들어 가고 있지만 나는 전의를 불태웠다. 그런데 사내가 갑자기 손을 휘저으며 갑자기 말했다.
“데이터는 이 정도로 충분한 거 같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 조만간 다시 보자고.”
스르륵―
말을 마친 사내의 몸이 신기루처럼 허공에 녹아들었다.
현실에서 마주친 강력한 플레이어.
그가 날 찾아온 건, 어디선가 나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어떻게 내가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안 거지?
소문이 퍼지면 난 여러 명의 추적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골치가 지끈 아파 왔다.
“현실에서까지 플레이어들에게 시달려야 하는 거야?! 너무하잖아. 정말! 난 환자라고.”
나는 하늘 높은 곳의 보이지 않는 존재를 향해 투덜거렸다.
그렇지만 나는 곧 흥분을 가라앉혔다.
머리를 굴려 봐야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허공에다 대고 불평을 해 봐야 지나가는 행인에게 정신병사 취급 받을 뿐이다.
한 마디로 뻘짓거리란 말이다.
지금은 생각보다는 행동을 해야 할 순간, 난 재빨리 지하철로 향했다.
덜컹. 덜컹.

― 이플렌시아의 세계로 곧 진입합니다.

이젠 안내 방송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내가 이플렌시아에 적응했다는 증거겠지.
오늘도 무사히!
이번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와 하얀 백사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수영복이라도 있으면 풍덩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다. 고운 모래로 가득한 하얀 백사장.
열차 밖으로 나가 보니 그곳은 휴양지로 쓰면 딱 좋을 것 같은 작은 섬이었다.
이거 꽤 위험하겠는데?
만약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 다른 플레이어가 진입한다면, 서로 마주치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난 큼직한 열차까지 타고 탁 트인 해안가에 요란하게 도착한 상황.
만약 섬 안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진입해 있다면 100퍼센트 확률로 내 위치가 노출되었다고 봐야 했다.
일단 달려야지. 뭐.
난 예상되는 습격을 피해 해안가를 벗어나 재빨리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이 그나마 다른 플레이어들의 추적에서 날 보호해 줄 것이다.
“까악. 까악.”
숲 속으로 들어가자 어디선가 기분 나쁜 까마귀 소리가 들린다. 하고 많은 새들 중에 하필이면 왜 까마귀일까?
푸드득―
날갯짓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사람만 한 크기의 까마귀들이 등 뒤에 포진해 있다.
으윽. 사이즈가 크니까 더 기분 나쁘잖아?
찌이잉―
난 머릿속에서 강화계 능력을 일깨우며 선공을 날렸다.
선빵필승!
느려진 시야로 어퍼컷에 맞은 까마귀 한 마리가 하늘 높이 치솟는 것이 보인다.
“까악. 까악.”
까마귀 떼가 한꺼번에 날아들었으나 내 시야엔 어차피 하품 날 정도로 느린 움직임. 몬스터 따위가 내 상대가 될 수는 없다.
어서 구슬이나 내놓고 꺼지라고.
피이잉―
그때 화살 하나가 내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화살을 맨손으로 낚아챈 나는 그것이 날아온 쪽을 겨냥해 던졌다.
슈아아앙― 파악!
“크악!”
숲 속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누군가 화살을 맞은 모양이다.
젠장! 플레이어에게 발각됐구나! 몇 명이나 되는 거지?
피이잉― 피이잉―
사방의 숲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숫자가 서른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플레이어가?!
화들짝 놀란 나는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화살을 피해 달리자 풀숲에서 갑자기 나뭇잎을 뚫고 투창이 날아왔다.
슈아아앙―
기습이라고는 해도 내 눈엔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기에 별 소용이 없다. 가볍게 투창을 비켜 내며 달려간 나는 그대로 풀숲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크억!”
발끝에 뼈가 박살나는 감각이 걸렸다. 난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앞을 향해 달렸다.
피이잉― 피이잉―
화살이 등 뒤로 쏘아져 오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려 섬뜩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날아오는 화살을 손날로 쳐냈다.
어라? 플레이어가 아니잖아?
사람들의 의상은 마치 하와이 원주민 같은 복장인데다 하나같이 피부색이 검었다.
“dfghfjhj! tuyjy!”
날 보며 뭐라고 외치는 말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다.
적어도 영어가 아닌 건 분명한 듯.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별로 겁낼 것도 없었다.
이 노무 새퀴들! 건방지게 날 공격하다니. 따끔하게 혼내 줘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