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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10화)
Chapter 3. 신들의 저주(4)


내가 조금 늦었구나.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어!
어처구니없게도 순간 문뜩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녀가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무시무시한 괴물에 시선을 빼앗겨 자세히 보지 못했을 뿐.
절로 탄성이 나올 것 같은, 여신 같은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특히 푸른 호수를 닮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신비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도망쳐요!”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날 일깨웠다. 괴물은 무서운 속도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번쩍!
그녀가 불러낸 뇌전이 괴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괴물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추자 난 그녀를 품에 안고 전력을 다해 뛰었다.
“크―롸롸롸!”
강화계 능력을 사용하면 나는 100미터 3초에 달릴 수 있다.
육상동물 중에서 가장 빠르다는 치타와 맞먹는 수준이다. 그러나 괴물은 나보다 더 빠른지 점점 거리가 좁혀졌다.
번쩍!
한 번씩 그녀가 뇌전을 불러내 괴물의 움직임을 정지시키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미 따라잡혔을 것이다.
“허억. 허억.”
그녀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더 이상 뇌전을 불러내기 힘들어 보였다.
사실 그녀를 버리면 난 지금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감싸 안은 팔로 전해지는 그녀의 가냘픈 느낌이, 달콤한 숨결이 내 이성을 마비시켰다.
슈아아아앙―
별안간 갑자기 앞 쪽에서 투창이 날아왔다.
투창이 노린 건 우리가 아니었는지 위쪽을 스쳐 지나가 괴물의 몸통에 박혔다.
“yuiukuk! fhghgj!”
갑작스런 도움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이곳의 원주민.
그들의 힘은 미약했으나 곳곳에서 화살과 투창이 날아오자 괴물은 원주민들을 향해 주의를 돌렸다.
하긴 피부가 따끔따끔한 게 귀찮기는 하겠지?
“크―롸롸롸!”
“rfyhty!”
괴물이 팔과 꼬리를 휘두를 때마다 원주민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심지어 온몸에 고슴도치처럼 뻗어 난 뼈 때문에 가벼운 돌진만으로도 그들은 덧없이 죽어 나갔다.
너희들의 희생은 잊지 않겠어! 흑!
괴물이 원주민에게 시선을 뺐긴 사이, 나는 재빨리 그곳에서 멀어졌다.
다다다다다―
휴우. 이 정도면 따돌렸겠지?
안전하다 생각되는 곳에서 발을 멈춘 나는 그제야 그녀가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못했기에 뺨을 가볍게 때렸다.
짝! 짝!
그제야 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제 가……. 가방에서 포션을…….”
참! 내 정신 좀 봐! 포션이 있었지.
내 가방에도 만약을 위해 챙겨 둔 포션이 있었다.
자판기에서 구입한 것으로, 나에겐 재생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동안 쓸 기회는 별로 없었다.
황급히 포션을 꺼낸 나는 그녀의 상처에 포션을 붓고 나머지는 마시게 했다.
“좀 어때요?”
“조금……. 나아진 것 같네요.”
포션의 효과인지 상처에서 피가 멎고 그녀의 안색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러나 온라인 게임에서 본 것처럼 단번에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다.
이곳의 포션은 그냥 부상을 빨리 회복시켜 주는 정도로, 게임에 나오는 포션에 비하면 성능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포션이 효과가 있어서.”
“…….”
위기를 넘기고 나니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방금 전까지 껴안고 달리기는 했지만, 우린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너무 예뻤다.
그러니까 함부로 질문을 던지기 힘든 여신의 포스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나?
어색함의 침묵이 싫어서 난 용기를 내어 말했다.
“방금 그 괴물, 정체가 뭔지 아나요?”
“뭔지도 모르고 싸우신 건가요?”
그녀가 빙긋 웃는다. 그저 작은 웃음일 뿐이지만 분위기가 갑자기 환해진 것 같았다.
역시 미모는 여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혹시 헤매는 자(Ghost)에 대해서는 아세요?”
나는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현실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플레이어의 능력을 각성하는 사람을 헤매는 자라고 불러요. 그리고 라이프 포인트가 남은 플레이어가 죽었다가 이플렌시아에서 부활하게 되는 경우에도 헤매는 자가 되죠.”
플레이어도 헤매는 자가 될 수 있다는 부분이 신경 쓰였다.
그런데 헤매는 자가 뭐지?
정작 핵심적인 부분은 듣지 못했다는 생각에 난 다시 물었다.
“헤매는 자가 플레이어와 다른 게 정확히 뭡니까?”
“헤매는 자(Ghost)는 현실로 돌아가지 못해요.”
쿠웅!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장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이은지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라이프 포인트를 모아 돌아갈 거라고 했던가?
“헤매는 자가 라이프 포인트를 모으면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나요?”
“네. 정확히는 666개의 라이프를 모아 신들의 인정을 받으면 돼요. 그러면 현실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죠.”
666개의 라이프를 모으는 것. 게임으로 치면 클리어 조건인 셈이다.
“하지만 라이프를 모아야 하는 건 일반 플레이어도 마찬가지예요.”
“그건 왜 그렇죠?”
“666개의 라이프를 모아야 신들의 저주에서 풀려나 건강한 몸으로 되돌아갈 수 있거든요.”
뇌종양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것은 신들의 저주!
동시에 내게 확실한 희망이 생겼다. 666개의 라이프를 손에 넣는 건 물론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반드시 난 이 신들의 게임에서 이겨 살아남겠다!
“혹시 어떤 저주에 걸렸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전 뇌종양입니다.”
“전 심장이 약해졌어요. 몇 개월 전에 미국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다행히 예후가 좋았죠. 그런데 한 달 전에 검사해 보니 다시 심장판막이 나빠졌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신들의 저주로 걸린 질병은 수술로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로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건가요?”
“저도 다른 분들의 경우는 어떤지 모두 알지는 못해요. 다만 저의 경우는 수술로 시간을 벌 수는 있었죠.”
나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방금 신들을 언급하셨죠? 그들의 목적이 뭔지 혹시 알고 있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다만 이 모든 것은 이플렌시아를 함께 창조한 신들의 장난이라는 것밖에는……. 언젠가는 모든 것을 분명히 알게 될 날이 오겠죠.”
아쉽게도 그녀도 모든 걸 알지는 못했다.
어쨌거나 그녀가 나보다 많은 것을 아는 건 사실.
“계속 설명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농담조로 던진 말에, 별로 재미있지도 않은데도 그녀는 환하게 웃어 줬다.
“제가 어디까지 말했죠?”
“666개의 라이프를 모아야 된다는 것까지 말씀하셨어요.”
그녀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헤매는 자 중의 일부는 일그러진 자(Monster)가 돼요. 일그러진 자는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모두 잃고 괴물이 되죠. 경험했다시피 일그러진 자의 힘은 강력해요. 다행히 그들은 플레이어일 때 가졌던 특수 능력을 모두 상실하죠.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일그러진 자를 죽일 수 없겠죠.”
“헤매는 자는 전부 일그러진 자가 되는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
“헤매는 자가 일그러진 자가 되는 것은 정신력에 달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자살 직후에 능력을 각성한 플레이어는 순식간에 일그러진 자가 되죠. 방금 그 플레이어처럼 말이에요.”
“…….”
그 군인이 자살한 녀석이란 건 조금 의외였다.
하긴 좀 고문관 냄새를 풍기긴 했지.
그녀가 매우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헤매는 자의 정신이 파괴되면 5분 정도의 변태 과정을 거쳐 일그러진 자(Monster)가 돼요. 아까 당신과 싸우는 걸 발견했을 때는 아직 변태가 진행 중이라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국 변태를 끝마칠 때까지 죽이지 못했죠.”
확실히 아까운 일이다.
일그러진 자를 죽이면 라이프를 30포인트나 얻을 수 있었는데 좋은 기회를 날린 셈이군.
“그나마 이곳이 섬이라서 다행이에요. 다른 곳으로 가진 못할 테니까요. 이제 더 궁금한 거 없으세요?”
물어볼 것이 많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없다.
“글쎄…….”
그래도 질문을 받고 나니 뭐라도 물어봐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때 다행히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번뜩 스쳤다.
“참! 군인 녀석의 원래 능력은 뭐였죠?”
고문관 녀석은 총을 몇 번 쏘고 수류탄을 투척했을 뿐 별다른 능력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총과 수류탄을 토템(Totem)으로 해서 능력을 부여 받았어요.”
“토템은 또 뭐죠?”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플레이어의 능력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고 한다.
토템 없이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과 토템을 소유해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
군인 녀석의 토템은 총과 수류탄이라, 이플렌시아에서도 현실의 물건인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
“그런데 현실에서의 위력과 별 차이가 없던데요?”
“그건 군인 아저씨가 초보자라서 그래요. 능력은 사용할수록 강해지는데, 그에겐 훈련할 시간이 전혀 없었죠.”
“전 처음부터 강했는데요.”
말해 놓고 보니 뭔가 유치하게 자기 자랑을 한 거 같아 민망했다. 다행히 그녀는 내 말을 비웃지 않았다.
“그건 당신에게 주어진 능력이 처음부터 강한 것이었나 보죠.”
그녀와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중요한 룰을 하나 더 알아냈다.
플레이어가 죽을 때, 남아 있는 라이프가 있으면 이플렌시아에서 되살아난다.
이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 되돌아가지 못하고 이플렌시아에 무조건 갇히게 된다. 즉, 플레이어가 한 번이라도 죽으면 현실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유일한 방법은 666의 라이프를 얻어 자유를 얻는 것뿐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조금 듣다 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러다가 난 문득 서로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플레이어끼리 이름을 밝히는 건 위험하지. 하지만…….
이미 현실에서 불꽃을 사용하는 남자에게 들키기도 했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더 알린다고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날 죽일 생각이 있었다면 일그러진 자와 싸울 때 끼어들지 않았겠지. 그냥 내버려 두기만 해도 죽임을 당했을 테니까.
“참! 제 이름은 강민혁입니다.”
“좋은 이름이네요. 제 이름은 윤설린이에요.”
“설린 씨라, 참 예쁜 이름이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외모에 고운 목소리.
원래 나는 예쁜 여자 옆에만 서면 정신을 못 차리는 100퍼센트 순혈 동정남이다.
남자가 25세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데, 몇 년 안 남았네?
나는 잠깐 설린 씨가 내 여자 친구이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녀와 나는 너무 격이 안 맞다. 평범한 외모에 번듯한 직장도 없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어쨌거나 우리는 서로 소개를 나누게 되었다.
“저는 XX대 심리학과 2학년이에요. 장래 희망은 사실 프로파일러(범죄 심리 분석관)라 범죄심리학과 프로파일링 기법을 취미로 배우고 있어요.”
참 고상한 취미구나.
“저는 XX대 다니고요. 제대한 지 얼마 안 돼서…….”
잠시 후, 설린 씨는 조금 기운을 차렸는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좀 더 쉬시지 않고요?”
“이제 괜찮아졌어요.”
이제 쿨하게 각자 갈 길 가야겠지?
비록 오늘 처음 만난 것뿐이지만 헤어지는 게 굉장히 아쉽다. 그런데 그녀가 가방에서 뭔가 반짝이는 걸 꺼냈다.
“이거……. 받으세요.”
어? 이건 반지.
나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의 반지라는 이름의 마법 아이템이에요. 제 거점에 등록되어 있어서 이플렌시아에 진입할 때마다 곧바로 거점으로 올 수 있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쳐다봤다. 설린 씨의 약지에는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마치 커플 반지 같다고 생각하는 건 순전히 내 착각이겠지?
“그러니까 앞으로도 만날 수 있다는 거죠?”
“네.”
이런 걸 선뜻 내준다는 건 내게 조금이나마 호감이 있다는 뜻이겠지.
두근두근. 가슴이 뛴다.
설마, 나에게도 드디어 봄날이?
신들의 저주에서 풀려날 희망. 달콤한 연애에 대한 희망.
그렇게 오랜만에 희망을 가슴에 품고 난 현실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