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ON 플레이어 1권(11화)
Chapter 4. 팬텀(Phantom)(1)


다음 날 오후.
어머니와 동생의 병간호를 하느라 바쁘게 보내던 나는 오후 늦게 창규와 통화하게 되었다.
“어때? 좀 팔리고 있냐?”
“홍보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형님! 그리고 홍보 차원에서 몇 개는 싸게 넘겨서…….”
그건 이미 각오하고 있던 부분이라서 난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제대로 팔아서 대금을 받으려면 얼마나 걸리겠냐?”
“수술비 때문에 그러십니까? 형님.”
“…….”
수술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난 마음이 무거워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물건만 잘 팔린다 싶으면 수술하시기 전에 일부를 선불로 드리겠습니다.”
“고맙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형님이 아프신데, 제가 당연히 치료비를 드려야 하는데, 저도 요즘 형편이 어려워서……. 죄송합니다. 형님!”
“죄송하긴. 쓸데없는 말 하지 마라. 나가 봐야 해서 이만 끊을게.”
“네.”
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가자 여동생 은진이가 TV를 보고 있었다. 웬일로 집에 붙어 있나 싶어서 난 친절히(?) 말을 걸었다.
“너 요즘 밤마다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냐? 여자애가 겁도 없이.”
“신경 꺼. 나 씻을 테니까. 훔쳐보면 죽어.”
아―휴! 저걸 그냥! 콩만 한 게 발랑 까져 가지고.
“TV는 끄고 가야지.”
“끄고 싶음 네가 꺼.”
“오빠한테 네가 뭐야? 오빠라고 불러.”
“흥! 오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성질 같으면 오늘 날 잡아서 저걸 교육시키고 싶지만 은진이가 이미 욕실에 들어간 뒤였다.
난 TV를 끄려고 리모컨을 찾다가 뉴스를 보고 흠칫 놀랐다.
“……CCTV를 확인한 결과 2인조 강도단은 금고 안에서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전문가의 분석 결과 이 영상이 위조된 흔적은 없다고 합니다.”
은행 강도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화면.
틀림없이 이건 플레이어들의 소행이다! 아마 텔레포트 능력 비슷한 거겠지.
“저런! 멍청한 녀석들!”
대놓고 저런 흔적을 남기면 어쩌자는 거지?
생각이 정말 없는 녀석들이다.
어쩌면 정부 비밀 기관이나 외국 CIA 같은 곳에서 조사 나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플레이어의 능력이 진짜라는 걸 알게 되면 납치해서 은밀히 연구하거나 산 채로 해부할지도 모른다.
정말 여러 곳에서 골치 아픈 일이 자꾸 일어난다.
딩동! 딩동!
그때 현관의 초인종이 울린다.
누가 왔나?
“누구십니까?”
“저예요. 세영이.”
한세영, 여동생의 친구들 중에 그나마 반듯한 아이다.
학교 성적도 있고 예의 바르고 붙임성도 있고……. 어휴. 우리 은진이가 세영이 절반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덜컥.
“문 열렸어.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은진이는 어디 있어요?”
“지금 샤워 중이야. 음료수라도 한 잔 줄까?”
“네.”
난 냉장고에서 주스를 찾아 세영이에게 주며 물었다.
“은진이 요즘 뭐 하고 다니는지 알아? 요즘 통 집에 붙어 있질 않아서.”
세영이는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그게, 은진이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괜찮아. 난 그 녀석 친오빠잖아.”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설득하자 세영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저도 자세한 건 잘 몰라요. 요즘 멋진 오빠랑 만나고 다닌다고 자랑하긴 하던데. 제가 보기엔 좀 불량스러워 보이고, 오토바이도 타고 다니고. 좀 걱정이 돼요.”
은진이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건 별로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 녀석은 중학교 때부터 남자 친구가 있었으니까.
나도 ‘미성년이니까 남자 친구는 절대 안 된다.’라고 말할 만큼 보수적인 건 아니었다. 또 간섭한다고 내 말을 순순히 들을 녀석도 아니었다. 오히려 간섭할수록 더 막 나가겠지.
불량스럽다고? 오토바이?
하지만 이번에는 신경이 좀 쓰인다.
“누군지는 몰라?”
“이름이 김태완이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XX 고교 2학년 짱이라고 하던데요. 그 이상은 저도 잘 몰라요.”
그때 욕실 문이 덜컥 열리며 은진이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세영아! 오빠한테 말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미안. 그래도 가족인데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세영이가 사과하자 은진이는 나를 향해 말했다.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혹시 잔소리할 생각이라면 관두는 게 좋을 거야. 어차피 안 들을 테니까.”
“옷이나 제대로 입어.”
쾅!
은진이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고 세영이 달래러 따라 들어갔다.
언제 한번 여동생과 진지하게 대화를 해 봐야겠다.
내가 뇌수술을 앞두고 있고 수술이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걸 알면 은진이도 조금은 진지해지겠지.
띠링!
그때 거실 바닥에 둔 은진이의 핸드폰에서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난 사생활 침해라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여동생은 평소에 핸드폰을 잠가 두지 않았기에 문자를 확인하는 건 가능했다.
[XX동에 있는 XX 백화점 앞에 9시까지 나와. 김태완.]
이 녀석이군!
재빨리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 녀석의 연락처를 적었다. 내친김에 주소록에서 남자 이름으로 된 번호는 모두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이러고 있으니 좀 변태 같긴 하지만, 이게 다 여동생을 생각하는 친오빠의 순수한 마음일 뿐이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신속하게 대처해야 하니까.
덜컥.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뭐라고 낄낄대며 나왔다. 은진이는 그새 기분이 풀린 모양이다.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현관으로 나섰다. 세영은 내게 인사했다.
“가 볼게요. 오빠.”
“그래,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은진은 내게 인사도 없이 휑하니 나갔다.
그럼, 나도 나가 볼까?
이플렌시아의 세계로 돌아가 천사 같은 그녀, 윤설린을 다시 만나야겠다.
쏴아아―
밖으로 나오자 엄청난 빗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웬 비야. 애들 비 맞고 다니는 거 아냐?
걱정이 된 나는 큰 우산을 하나 챙겨 들고 작은 우산은 가방에 넣었다. 약속 장소에 우연히 나타나서 큰 우산을 애들에게 건네주고 지하철로 들어갈 생각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애들이 비 맞을까 걱정되어 가는 거지 여동생을 꾀어낸 양아치의 면상(얼굴)을 확인하고 싶어서 가는 건 절대 아니다.
콰광!
천둥까지 내리친다. 난 더욱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보니 은진이와 세영이가 초라하게 건물 입구에 붙어 비를 피하고 있다.
이 녀석 아직 안 온 건가? 여자 친구를 기다리게 하다니 쓰레기 같은 녀석.
난 녀석들을 향해 걸어가 우연인 것처럼 목소리 톤을 높였다.
“어? 세영아, 거기서 뭐하냐?”
“민혁 오빠, 어디 가는 길이세요.”
“이 근처에서 친구랑 술 약속이 있어서.”
일부러 세영이와 대화하며 은진의 안색을 살피니 딱히 의심하는 것 같은 눈치는 아니다.
“비가 많이 오네? 우산은 세영이가 써.”
“네? 그럼 오빠는…….”
“어차피 약속 장소가 이 근처라서 괜찮아. 나중엔 친구 녀석 우산 같이 쓰던가 하면 되니까.”
적당히 둘러댄 나는 태연히 우산을 건넸다.
어떠냐? 이 오빠의 완벽한 연기력이? 완전히 남우주연상 감.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데 은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친구들 보기 전에 꺼져 줄래? X팔리니까.”
이걸 그냥! 확! 자꾸 까불면 머리 확 밀어 버리고 지하실에 감금하는 수가 있어! 행동 조심해. 그때 가서 눈물, 콧물 질질 짜며 빌지 말고…….
저벅. 저벅.
“은진아, 나 왔다.”
“태완 오빠, 왔어?”
갑자기 코맹맹이 소리로 변한 은진이.
목소리 하나 바꾼 것뿐인데 집에서 뒹굴던 때랑 완전 딴판이잖아? 어디서 교태야! 네 이년!
여동생의 환골탈태를 눈앞에서 목격한 나는 심각한 정신적 데미지를 입고 말았다.
“이 아저씨는 누구?”
태완이란 녀석이 날 삐딱한 눈으로 바라본다.
마빡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어딜 꼬나봐. 코피 질질 흘리면서 길바닥에 똥오줌 찍찍 싸게 해 줄까?
입과 귀에 피어싱. 어깨에 조잡한 타투(Tattoo). 입에 문 담배.
가지가지 마음에 하나도 안 든다.
은진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자 옆에 있던 세영이가 대신 말했다.
“은진이 친오빠야.”
까딱.
친오빠라는 말에 녀석은 마지못해 고개를 약간 숙였다.
저건 인사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니야.
허리를 90도로 꺾어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은진이 남자 친구? 만나서 반가…….”
“가자, 은진아.”
“응.”
녀석은 내 말을 잘라먹고 아이들과 함께 자리를 뜬다.
오냐. 날 제대로 열 받게 했어. 이렇게 된 이상……. 미행이다.
사실 저런 녀석을 만나는 여동생이 심히 걱정되었다. 녀석들이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면 신경 쓰여서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찌잉―
강화계 능력을 발휘하자 미행은 간단했다. 웬만큼 멀리 떨어져도 민감한 청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들을 따라가자. 잠시 후, 오토바이들이 모여 있는 광장이 나타났다.
오토바이들은 요란하게 개조되어 있었다.
바아아앙― 우우우웅―
싸구려 램프를 잔뜩 박거나 머플러 자체를 교체해 엔진 소리가 우렁찼다.
비가 잔뜩 오는 캄캄한 밤에 이걸 타고 달린다고? 다들 정신들이 나갔구먼.
“태완아, 여기야!”
“태완 형님, 오셨습니까?”
“오늘은 날 뒤에 태워 줘!”
김태완의 인기는 대단했다. 짱이라더니 진짜 이들의 리더쯤 되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응?
모범생인 줄 알았던 세영이가 눈앞에서 변신(?)하고 있었다.
두터운 뿔테 안경을 벗고 콘택트렌즈를 낀다.
포니테일 스타일로 잘끈 묶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가방에서 젤과 스프레이를 꺼내 재빨리 세팅했다.
겉옷을 벗자 안쪽에 입은 타이트한 블라우스와 스커트가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운동화 대신 구두를 신고 화장을 고쳤다.
역시 친구는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알고 보니 세영이 너도 은진이랑 같은 과였어?
그때 태완이 녀석이 아이들에게 뭔가 일장 연설을 했다.
뻔한 이야기를 뻔하게 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은 박수 치고 자지러지고 열광하는 등 난리도 아니다.
아주 교주 났네. 교주 났어.
연설이 끝나자 태완은 갑자기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갑자기 X폼 잡고 뭐 하는 거지?
휘이잉―
갑자기 녀석의 손바닥 위에서 바람이 휘몰아쳤다.
쩌적― 쩌적―
그 바람 안에 휩쓸린 빗방울들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까야악!”
“최고다!”
한두 번 본 광경이 아닌 듯 아이들은 태연하게 열광했다. 태완이 별안간 손바닥을 흔들자 얼어붙었던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쫘아아아악― 파앗―
물방울들은 정확하게 곳곳에 주차된 자동차들을 향해 날아갔다.
와장창― 파박―
앞 유리가 깨지고 범퍼가 움푹움푹 파인다.
결코 위력이 가볍지 않은데다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이 녀석 플레이어였나?
TV에 보도됐던 2인조 은행 강도가 머릿속을 스쳤다.
생각 없이 행동하는 플레이어들이 이렇게 많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