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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14화)
Chapter 4. 팬텀(Phantom)(4)


쏴아아―
빗방울이 다소 가늘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나는 윤설린이 사는 아파트 단지 근처의 할인마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생각해 보니 현실에서 그녀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저벅. 저벅.
청바지에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가 다가왔다.
우산을 쓰고 있었기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잘빠진 몸매 라인이 머릿속에 선명히 새겨져 있기에 착각할 리는 없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아쉽게도 그녀는 하늘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니 분명 설린 씨가 맞았다.
“그런데 저분은 누구?”
“오창규라고 합니다. 형수님!”
“에? 그런 사이 아니에요. 우리…….”
설린 씨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래. 잘했어. 창규!
난 창규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데려왔다.
앞으로 하는 거 보고 그에 맞게 처리할 생각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미끼가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여기까지 데리고 나왔다.
“마트에 가서 물이나 좀 사 와!”
“옛! 형님!”
오줌을 찔끔 싼 이후로 창규가 더욱 빠릿빠릿해졌다. 난 창규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설린 씨에게 새로운 계획을 말해 줬다.
“민혁 씨, 친구분을 미끼로 쓰는 건 좀…….”
“친구가 아니라. 동생입니다. 그리고 그냥 양아치 비슷한 놈이니까. 막 써도 됩니다.”
내 제안은 설린 씨의 작전을 크게 변경하지 않는 수준에서 창규를 미끼로 투입하는 것이다. 굳이 녀석을 투입하는 건 작전 성공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음. 미끼가 있으면 좀 편하긴 하겠네요.”
다행히 설린 씨는 내 의견에 동의했다.
“우선, 창규 씨가 그에게 약간의 시비를 걸어 신경을 분산시키는 걸로 하죠. 이후로는 원래 계획대로…….”
“알겠습니다.”
약속 시간 10분 전.
우리는 약속 장소 근처에서 내렸다. 망원경을 가져온 설린 씨가 나에게 말했다.
“제가 먼저 그를 잠깐 살펴볼게요.”
“굳이 설린 씨가 먼저 볼 필요가 있습니까?”
“혹시 그가 다른 동료들과 왔는지 확인해 보려고요. 이상이 없으면 핸드폰 문자로 연락할게요.”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건데 설린 씨는 굳이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다. 게다가 망원경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이곳에는 주차된 차도 많고 맘만 먹으면 숨어 있을 공간도 많았기 때문이다.
참! 다소 어설픈 부분이 있더라도 믿고 따라주기로 했었지?
그녀와 이미 약속했기 때문에 불안감을 느껴도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초초하게 그녀의 문자를 기다렸다.
드르륵―
진동 모드로 해 둔 핸드폰이 짧게 울리자 재빨리 문자를 확인했다.
[이상 없음. 창규 씨를 먼저 보냈어요. 조심스럽게 근처로 오세요.]
약속 장소로 향하자 모자를 쓴 사내와 창규가 가벼운 말다툼을 벌이는 것이 보였다.
“야! 어딜 꼬나봐. 이 XX XXX할 새끼야!”
창규는 원래 깡패였으므로 시비를 거는 모습은 자연스러웠다. 팬텀의 시선이 창규에게 향하는 동안 비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낙뢰가 쳤다.
번쩍― 파지직―
번개를 맞은 팬텀은 낭패한 듯, 허물어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설린 씨 화이팅!
창규도 한 손 보태려는 듯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내의 얼굴에다 발길질을 했다.
퍽! 퍽!
낙뢰를 맞고 잠시 마비되었는지 사내는 창규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맞았다.
살가죽이 터지고 피가 흐른다.
“으아악!”
얻어맞은 사내는 가만히 있는데 창규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빗물로 질척해진 아스팔트 위를 뒹군다.
정신계 환영술을 창규에게 사용했군!
환영에 걸린 창규는 호흡이 곤란한 듯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번쩍― 콰쾅!
그때 낙뢰가 다시 한 번 사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크윽.”
번개를 다시 맞은 사내가 신음을 흘리자 바닥을 뒹굴던 창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환영술에서 풀려났군.
“허억! 이 X자식!”
창규는 사내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으나 다시 덤벼들지는 못했다.
윤설린이 세운 계획은 간단했다.
환영술은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설린 씨가 숨어서 낙뢰로 공격하면, 사내는 어쩔 수 없이 정신력을 끌어 올려 마법 공격에 저항할 것이다.
정신력도 일종의 에너지.
낙뢰를 견디느라 그의 정신력이 고갈되면 더 이상 환영술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때 내가 그를 공격해 쓰러뜨리는 간단한 전략이다.
하지만 이 작전의 가장 큰 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가 동료와 함께 나온다면 이 작전은 무용지물!
설린 씨는 그 부분은 자신이 책임지고 살피겠다고 장담을 했다.
뭘 믿고 큰소리친 건지 모르지만, 이 난리를 치는데도 그의 동료가 나타나지 않는다.
작전 성공!
드륵.
그때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지금이에요. 공격하세요!]
설린 씨의 문자를 받은 나는 강화계 능력을 끌어 올리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으으…….”
팬텀은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나를 쳐다보았다.
드드드…….
갑자기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지면이 흔들린다.
그 상태로도 아직 환영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거냐?
보도블록이 쩍 갈라지며 부서진 조각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슈아악―
부서진 조각들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이 정도 쯤이야!
난 팔을 교차하며 날아오는 조각들을 막아 냈다.
화르륵―
불꽃의 벽이 일어나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저건 당해 봐서 아는데 조금 뜨겁다. 그러나 난 주저 없이 불꽃의 벽을 향해 뛰어들었다.
우르릉― 콰광!
순간, 설린 씨가 불러낸 뇌전이 사내의 머리 위를 내리쳤다.
“으아악!”
사내의 비명 소리와 함께 눈앞의 불꽃이 신기루처럼 스륵 사라졌다.
이제 사내와의 거리는 고작 3미터.
넌 이제 끝이다!
“크아아아악!”
죽음의 위기를 느낀 사내가 갑자기 와락 비명을 내질렀다. 근처에 접근했던 나는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슈우웅―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자가용들이 갑자기 나를 향해 날아왔다. 숫자가 너무 많아 전부 피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퍼억!
“쿨럭!”
충격으로 내장이 상했는지 목구멍에서 핏물이 올라왔다.
쏴아아아―
빗물이 허공에서 하나로 뭉치며 나를 덮쳐 왔다. 젤리처럼 끈적끈적하게 뭉친 빗물이 얼굴에 들러붙어 숨통을 막았다.
파악!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 때리자 뭉쳐진 빗물이 흩어졌다.
“푸아!”
잠시 숨을 쉴 수 있었지만 더 거대한 크기로 뭉쳐진 덩어리가 나를 덮쳐 왔다.
으윽! 숨을 못 쉬겠어!
뭉쳐진 빗물이 엄청난 압력으로 나를 압박해 온다.
콧구멍으로 비집고 들어온 빗물이 내부에서 덩치를 부풀린다.
파악―
내부가 찢어지며 상처에서 피가 쏟아진다. 이대로 풍선처럼 빵 하고 터져 버릴 것 같다.
번쩍!
그때 설린 씨가 불러낸 뇌전이 사내의 정수리에 파악 꽂힌다.
파아아―!
뭉쳐진 빗물이 응집력을 잃고 힘없이 흩어진다.
의식을 완전히 잃은 듯 팬텀이 바닥에 등을 대고 털썩 쓰러졌다.
“으아아악!”
나는 비명처럼 기합을 내지르며 사내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퍼억! 우지직―
사내의 갈비뼈가 부러지며 멀리 나가떨어졌다.
비명 하나 없이 사내는 마치 골목에 몰래 버린 검정 비닐 봉투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죽은 건가?
드르륵―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진동한다.

― 상대 플레이어를 공동으로 살해하셨습니다.
― 플레이어 간의 능력 차가 극심하므로 특별히 3포인트의 라이프가 주어집니다.
― 상대 플레이어를 죽여 모든 속성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조금 늘었습니다.
― 상대의 능력을 흡수하는 데 실패합니다. 대신 특수 능력의 일부분이 순수한 에너지로 변환 되어 흡수됩니다.

현실에서 죽여도 포인트를 얻는 거였나?
이걸로 내가 가진 라이프는 4포인트. 목표 달성까지 662포인트 남았다.
휴우. 까마득하네.
“형수님! 정신 차리십시오!”
창규의 우렁찬 목소리가 귀청을 따갑게 울린다.
그런데 형수님이라면 설린? 설린 씨가 다쳤나?
달려가 보니 설린 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설린 씨! 정신 차려 봐요!”
“으음……. 민혁 씨.”
그녀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누가 봐도 한눈에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다.
“무리하게 능력을 끌어냈어요.”
알고 보니 그녀의 정신력은 내가 사내를 공격하기 전에 이미 바닥나 있었다.
내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설린 씨는 억지로 뇌전을 불러냈던 것. 무리한 정신력의 사용은 그녀의 생명력까지 갉아먹은 것처럼 보였다.
“설린 씨! 괜찮나요?”
“심장에 다소 무리가 왔어요. 안정을 좀 취해야겠어요.”
“당장 구급차를 부를게요. 설린 씨.”
뇌종양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나. 심장병으로 죽어 가고 있는 설린 씨.
난 그녀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구급차를 부를 정도는 아니에요. 그보다 여동생을 찾으세요. 그녀는 XX 빌딩 2023호 객실에 있어요.”
“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설린 씨.”
“으윽…….”
그녀가 다시 혼절했기 때문에 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의문은 일단 마음속에 접어 두고 난 급히 119에 전화했다.
“창규야, 병원까지 같이 가서 잘 보살펴 줘.”
“네! 맡겨 주십시오. 형님.”
창규에게 설린 씨를 부탁한 나는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그녀가 가르쳐 준 XX 빌딩으로 향했다. 설린 씨의 말대로 은진이는 2023호에 감금되어 있었다.
“은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