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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15화)
Chapter 5. 미궁 속을 헤매다Ⅰ(1)
여동생 은진이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외출을 하지 않으려는 등. 자폐증 비슷한 증상을 보였기 때문에 걱정이 된 나는 동생을 데리고 정신과 병원에 가 보기로 했다.
병원에 도착한 우리는 5분 정도 대기 후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강은진 고객님 들어오세요.”
동생과 함께 진찰실로 들어서자 생각보다 젊어 보이는 의사가 뿔테 안경을 끼고 앉아 있었다.
나이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
명찰을 확인하니 의사의 이름은 김광수였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사실은 동생이…….”
나는 능력자들 이야기는 빼고 동생이 유괴범에게 납치되었다는 이야기만 했다. 동생에게 몇 마디 질문을 건네어 보던 의사는 은진이가 아무 말이 없자 나에게 말했다.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입니다. 신경증적인 실어증 증상과 우울증 초기 증상도 조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자세한 건 좀 더 시간을 두고 검사를 받아 봐야 알겠지만 여유가 있으시면 입원 치료를 권장합니다.”
“알겠습니다.”
“상담 매니저가 입원 절차를 상세히 알려 드릴 겁니다.”
여동생의 입원을 바로 결정한 것은 혼자서 여동생을 돌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오늘 뇌종양 수술을 받으러 갈 예정이다.
수술 성공 확률은 40퍼센트. 살 수 있을까?
규칙에 따르면, 플레이어가 현실에서 죽으면 헤매는 자가 되어 이플렌시아에 갇히게 된다.
최악의 상황에도 희망은 있다.
설린 씨는 괜찮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설린 씨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설린 씨, 강민혁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민혁 씨.”
“몸은 좀 괜찮으세요?”
용건을 말하고 나니 의외로 할 말이 없다. 우리는 아직 편하게 전화 통화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닌가 보다.
“마침 할 말이 있는데……. 이플렌시아에서 만날까요? 민혁 씨.”
“오늘은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네. 그럼 내일 봐요.”
“그래요. 내일 봐요. 설린 씨.”
결국 오늘 수술 받는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통화를 끊었다.
수술 받고 난 후, 제일 먼저 설린 씨에게 연락해야지.
이번에는 나 대신 어머니의 병실을 지키고 있는 베스트 프렌드 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종현야, 나다.”
“어, 오늘 수술 받는다며?”
종현은 경상도 사나이답게 무뚝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만약 내가 깨어나지 못하면…….”
“재수 없는 말 하는 게 아니다.”
“염치없지만, 나 대신 어머니와 동생 좀 돌봐 줘라.”
“알겠다.”
대략 준비를 끝낸 나는 병원으로 향했다.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나를 더욱 긴장시킨다.
“휴우.”
긴 한숨을 내쉬며 긴장으로 굳어지는 몸을 풀었다.
수술대 위에 눕자 간호사가 머리를 깎았다.
사각. 사각.
칼날이 닿는 느낌이 괜스레 오싹하게 느껴졌다.
드릴 같은 걸로 두개골에 뚫고 날카로운 메스로 종양 부위를 도려내겠지.
아, 의학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어. 상상되잖아?
마스크를 한 의사가 부드러운 어조로 내게 말을 걸었다.
“긴장 좀 푸세요. 강민혁 씨.”
“하하……. 네.”
“십(10)부터 천천히 숫자를 거꾸로 세어 보세요.”
“십, 구, 팔…….”
“…….”
어? 벌써 수술이 끝난 건가?
눈을 떠 보니 나는 링거를 혈관에 꽂고 회복실에 누워 있었다. 근처에 서 있는 간호사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수술 끝난 건가요?”
“깨어나셨군요. 그대로 누워 계세요. 곧 담당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잠시 후, 담당 의사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강민혁 씨,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수술 결과는…….”
잠시 머뭇거리던 의사는 부드러운 어조로 내게 말했다.
“예상보다 종양의 크기가 너무 커졌고 여러 군데로 전의되었습니다. 도저히 수술을 전개할 상황이 아니라…….”
의사가 수술 도중 포기했다.
고작 일주일 만에 종양의 크기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커져 버렸다는 것이다.
“큭. 큭.”
“저……. 강민혁 씨? 괜찮으십니까?”
“크하하! 하하하하!”
내가 미친 듯이 웃어 대자 의사가 재빨리 내 곁에서 멀어지며 간호사에게 명령했다.
“정신 안정제(Phenergan)를 투여해.”
“알겠습니다.”
미친 듯이 날뛰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난 간호사가 주사약을 투여할 때까지 얌전히 있었다. 약 기운이 혈관을 통해 온몸으로 퍼지자 몽롱한 느낌과 함께 날카로워졌던 신경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수술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던 나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흥분이 가라앉아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직 희망은 있다.
666개의 라이프. 그것만 모으면.
그러나 잠시 안정되었던 내 마음에 불안이 다시금 밀려온다.
정말 666개의 라이프를 모을 수 있을까?
오히려 라이프를 모조리 빼앗기고 소멸당하는 건 아닐까?
마음이 약해진다.
절망의 끝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왜 하필 그녀일까?
“설린 씨, 접니다.”
“민혁 씨,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요?”
“주무시는데 제가 깨운 건 아닙니까?”
현재 시각은 오후 10시 26분.
“아뇨. 아직 안 잤어요.”
“괜찮으시다면 지금 이플렌시아에서 볼 수 있을까요?”
“지금이요?”
역시 안 되는 건가?
아깐 오늘은 안 된다고 했다가 늦은 시간에 다짜고짜 보자고 하다니,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그녀가 내 요청을 거절할 확률이 더 높았다.
그런데 뜻밖에 설린 씨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좀 있다 봬요. 민혁 씨. 만나서 할 이야기도 있고요.”
“그럼. 11시쯤에 진입하겠습니다.”
그녀와 잠시 통화 한 것뿐인데도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낀다.
절망적인 상황이기에 그녀에게 쉽게 빠져드는 걸까? 아니면 그녀가 너무 예쁜 걸까?
― 이플렌시아의 세계로 곧 진입합니다.
꿈이라기엔 너무 선명한 세계. 나는 다시 이플렌시아로 들어갔다.
“민혁 씨. 왔어요?”
거점에서 만난 그녀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밝은 그녀의 표정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다.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걸까?
“운이 좋게도 숨겨진 미궁의 지도를 얻었어요.”
“숨겨진 미궁이요?”
설린 씨는 미궁의 특성에 대해 설명해 줬다.
첫째, 미궁에서만 아티펙트(Artifact)라 부를 만한 고급 마법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 일반적인 사냥터에서 얻은 아이템은 그저 그런 수준의 것들뿐.
고작해야 쓸모없는 천 쪼가리나 몇 번 휘두르면 부서질 조잡한 몽둥이, 혹은 단검 정도.
그런데 미궁에는 특수한 능력이나 마법이 담겨진 물건이 존재한다.
둘째, 미궁에 들어서면 시간의 흐름이 또다시 느려진다.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접속 시간은 원래 8시간이지만, 미궁에 들어서면 시간의 흐름이 무려 삼백 배나 느려져 100일로 늘어난다.
그런데 이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출구를 찾지 못하고 갇히면 미궁 속을 헤매다 미쳐 버릴 수도 있다.
어쨌거나 설린 씨는 무척 기쁜 듯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뜻밖에도 평범한 오크를 잡아서 나온 구슬을 깨뜨려 봤을 뿐인데, 미궁 입구가 표시된 지도가 나왔어요.”
“그게 운이 좋은 편인가요?”
언뜻 감이 오질 않았다. 미궁 지도를 얻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럼요! 미궁의 지도를 얻은 건 이번이 처음인 걸요.”
유쾌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현실의 고민은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그녀에게 우울한 기분을 들키는 건 싫었다.
그래, 심각한 건 내게 어울리지 않아. 강민혁!
“자! 그럼 출발할 준비가 됐나요? 민혁 씨.”
딱히 준비랄 것도 없었지만 난 설린 씨의 기분에 맞춰 주기로 마음먹었다.
“네. 그럼 출발해 볼까요?”
미궁의 입구는 거점에서 상당히 먼 곳인 폴메이톤이란 이름의 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걸어가기엔 너무 먼 거리였으므로, 설린 씨의 거점에 설치된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텔레포트 마법진 비싸지 않나요?”
“파란 구슬 500개만 넣으면 마법진을 설치할 수 있는 아이템을 살 수 있어요.”
500개라……. 그거 구슬 하나 넣는데 2초 정도 걸린다고 치면, 구슬 투입하는 데만 16분은 걸리잖아? 게다가 그게 돈이 얼마야?
나는 구슬을 얻는 족족 금화로 바꾸지만 설린 씨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집이 부유한 편이라 그런 식으로 푼돈을 모을 필요가 없나 보다.
사실 현금으로 바꿀 생각만 하지 않으면 파란 구슬 500쯤 모으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모은 구슬을 대부분 거점을 꾸미는 데 써 버렸다.
“텔레포트 좌표는 지도에 적힌 걸로 할게요. 약간 어지러울 수도 있으니 놀라지 마세요.”
“네. 출발해요.”
파앗―
환한 빛과 함께 주위의 풍경이 지워진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듯 아찔한 느낌과 함께 하얀 빛이 망막을 가득 채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쿵!
뭔가 바닥에 닿는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눈앞에 하늘에 닿을 듯 치솟은 산이 보였다.
어디선가 이름 모를 산새 소리가 들리며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와 닿으며 정신을 일깨웠다.
“금방 도착했죠?”
“네. 그런데 어디로 가면 됩니까?”
“산 중턱 쪽으로 조금 더 가야 해요.”
등산을 해야 하는 줄 미리 알았으면 등산화라도 신고 왔을 텐데…….
설린 씨는 쿠션감이 좋은 운동화. 나는 밑창이 딱딱한 구두.
이런 걸로 따지면 쪼잔하게 보이겠지?
산을 타는 게 힘든지 설린 씨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편한 운동화를 신고 있다고 해도 설린 씨는 가냘픈 체형의 천상 여자. 평소에 운동을 즐기는 타입도 아닌 거 같았으니 당연한 결과랄까?
“헉. 헉.”
너무 힘들어 보여서 무심코 말했다.
“힘들면 제가 업어 드릴까요?”
잠깐! 업다니? 그녀를?
별생각 없이 뱉은 말에 나도 놀랐다. 부끄러움을 타는 듯 그녀의 얼굴이 단번에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괘…… 괜찮아요. 민혁 씨.”
이미 내친걸음이나 마찬가지라 난 좀 더 용기를 냈다.
“전 강화계 능력자라 힘이 남아돕니다. 걱정 말고 업히세요.”
“그럼, 무겁다고 욕하지 마세요.”
설린 씨는 전혀 무겁지 않았다.
사락.
흘러내린 그녀의 고운 머릿결이 코끝을 스치며 뭔지 모를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등에 와 닿는 부드러운 감촉과 체온 때문인지 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 다 왔아요.”
“네.”
설린 씨가 등에서 내릴 때 난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저기가 숨겨진 미궁의 입구예요.”
“저기 말입니까?”
당황한 내 입에서 군대 말투가 나왔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산 중턱에 위치한 호수.
“네. 호수 아래쪽에 입구가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설린 씨는 자연스럽게 겉옷을 벗었다. 안쪽에는 원피스 스타일의 예쁜 수영복이 있었다.
수영할 거라고 진작 말해 주지. 아님 내 것도 좀 사 오던가?
그녀는 그래도 약간의 양심은 있는지 수경은 2개 챙겨 왔다.
난 어쩔 수 없이 상의를 벗었다. 그나마 반바지를 입고 와 다행이었다.
그런데 난 맥주병이다.
“설린 씨. 저 수영 못하는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손을 잡아 줄게요.”
손을 잡아 준다는 말에 바로 신체 접촉이란 단어를 떠올린 건, 내가 여자에 대한 면역이 별로 없어서 그런 거지 결코 음흉한 성격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풍덩!
결국 난 설린 씨와 손을 잡고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수경을 착용한 탓인지 호수 밑바닥이 보인다. 호수의 물은 맑고 깨끗했다.
수영을 못하는 나는 그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딸려 갔다.
이거, 남자 체면이 말이 아니군.
호수 바닥으로 다가가니 푸른빛으로 빛나는 수박만 한 크기의 구슬이 보였다. 설린 씨는 구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화악―
눈부신 빛과 함께 눈앞에서 그녀가 사라졌다. 나도 황급히 구슬에 손을 댔다.
이동한 곳은 석실로 축조된 지하 미궁.
뒤를 돌아봤지만 미궁의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나가려면 출구를 찾으라. 이건가?
뚜벅. 뚜벅.
고작 입구에 진입했을 뿐인데 수십 개의 갈림길이 우리를 반긴다. 난 슬며시 걱정이 되어 말했다.
“이거 길을 잃으면 어쩌죠?”
그러자 설린 씨가 내게 지도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이 지도가 있으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어요.”
미궁의 지도 위에는 현재 위치가 화살표로 나타나 있었다.
화살표가 계속 변하며 우리의 위치를 알려 준다. 그리고 보스 몬스터의 방 뒤에 있는 미궁의 출구 위치도 표시되어 있었다.
다만 미궁 내부의 미로에 대해선 지도에 나와 있지 않았다. 묘한 부분에서는 친절하면서 결정적인 정보는 제공하지 않은 지도다.
난 설린 씨에게 제안했다.
“같은 곳을 빙빙 돌게 되면 손해니까. 미궁의 왼손 법칙을 이용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