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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16화)
Chapter 5. 미궁 속을 헤매다Ⅰ(2)


미궁의 왼손 법칙이란, 미궁에서 입구와 출구가 각각 하나씩 있다고 가정하면 왼손으로 벽을 짚고 걸어가면 언젠가는 출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법칙이다.
설린 씨도 일단 내 의견에 찬성했다.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까 조심하세요.”
“네.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가 볼까요?”
입구부터 갈림길은 총 16개.
어느 쪽으로 가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우리는 고민했다.
“고민하지 말고 사다리 타기로 정해요. 민혁 씨.”
그녀의 제안대로 우리는 사다리 타기를 했다.
갑작스럽게 게임이라니 다소 어이없긴 했지만, 고민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나름 재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8번 나왔네요.”
“그럼, 왼쪽에서 8번째 통로로 합시다.”
통로로 들어서자 곡괭이를 든 작고 못생긴 자들이 우리를 반긴다.
척 보기에도 작고 비쩍 마른 것이 별로 세 보이진 않았다. 온라인 게임에서 흔히 보던 코볼트(Cobalt)하고 생김새가 비슷했다.
그럼 활약해 볼까?
“코볼트 정도는 제가 해치울게요.”
내가 나서기도 전에 설린 씨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녀석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번쩍―!
푸른빛의 번개가 여러 가닥으로 나뉘어져 뻗어 나가며 코볼트 무리를 때렸다.
“케에엑!”
순식간에 코볼트 무리는 새까만 숯 덩어리가 되며 전멸했다.
지금까지는 일그러진 자나 강력한 플레이어인 팬텀과 싸워 왔기 때문에 그녀의 강함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설린 씨의 뇌전 능력은 확실히 강력했다.
특히 대량 살상에 특화된 능력이랄까?
“오! 대단하네요. 설린 씨.”
“코볼트 따위, 하급 몬스터인데요. 뭘.”
코볼트를 루저(패배자)로 전언한 설린 씨는 이후로도 망설임 없이 번개를 소환해 통로에 있는 코볼트 무리를 싹쓸이했다.
바닥에 떨어진 구슬은 챙겨서 절반씩 나눴다.
“또다시 갈림길이네요.”
“왼손 법칙을 쓰죠. 왼쪽 첫 번째 통로로 갑시다.”
통로를 지키고 있는 괴물의 모습은 좀 기괴했다.
공중에 떠 있는 둥근 몸체와 커다란 눈, 몸체에는 수많은 촉수들이 달려 있어 상당히 징그러운 모습의 몬스터였다.
“이런 비홀더(Beholder)네요.”
“비홀더요?”
이름만 듣고 얼른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했던 온라인 게임에는 비홀더란 몬스터는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홀더는 마법 저항력이 높아 번개 공격이 통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나서야지.
“이번엔 제가 해치우죠.”
안 그래도 주먹이 근질근질했던 나는 선뜻 앞으로 나섰다.
찌잉―
몸속에 강화계 능력이 가득 차며 의욕 충만!
“잠깐만요!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치면 몸이 마비돼요!”
“엇! 그런 건 미리 설명했어야죠!”
번쩍―
녀석과 눈동자를 마주하자 비홀더의 눈에서 광선이 쏟아져 나왔다.
순간, 온몸의 움직임이 멈춰 버렸다.
거미줄에 걸린 X파리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상황!
꿈틀. 꿈틀.
촉수들이 날 휘감으며 기분 나쁘게 꿈틀거렸다.
우웩. 냄새도 더럽군. 함부로 더듬지 마. 임마! 난 순결한 몸이야.
비홀더의 눈 아랫부분이 갑자기 갈라지며, 입을 쩍 벌리자 송곳처럼 날카로운 수십 개의 이빨이 드러났다.
“위험해요!”
위험한 상황인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만?
번쩍―
다급한 순간에 설린 씨가 뇌전을 불러내 비홀더를 공격했다. 번개를 맞은 비홀더는 화가 난 듯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눈을 돌렸어! 이 녀석 머리가 나쁘구나.
비홀더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저절로 마비가 풀렸다. 난 비홀더의 몸통을 축구공 차듯 힘껏 걷어찼다.
빠앙―
“케르륵.”
충격으로 비홀더의 몸통 3분의 1이 물 풍선 터지듯 터져 나갔다. 기분 나쁜 점액질이 내 몸을 뒤덮었으나 다행히 독은 없었다.
다행은 무슨! 날 더럽히다니 죽여 버리겠어!
타악―
왼발을 디딤 발로 힘껏 디디며 허리를 회전시킨다.
회전력이 고스란히 전해진 오른발로 걷어차자 남은 몸통 역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져 버렸다.
파아악―
해치웠다!
사방으로 튄 비홀더의 체액을 가까스로 피해 낸 설린 씨가 미안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한 마리라 다행이었어요. 제가 좀 설명이 부족했네요.”
“아니에요. 설린 씨.”
그 후로도 비홀더와의 사투는 계속되었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며 싸운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느라 신경이 분산되었기 때문일까?
나는 조심성 없이 발을 성큼 내딛다가 함정을 건드렸다.
덜컥!
“조심해요! 설린 씨.”
쉐에엑―
사방의 벽에서 화살 같은 것이 날아왔다.
찌잉―
강화계 능력을 끌어 올리자 날아오르는 물체가 느려지며 선명히 보였다.
일종의 표창 비슷한 날카로운 쇳덩어리였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칼날에 녹색 이물질이 묻어 있는 게 보였다.
독을 바른 건가?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기에 난 위험하지 않았다.
다만 설린 씨가 피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같이 바닥에 몸을 붙였다.
파박― 파박―
목표물을 잃은 표창은 주위에 있는 비홀더의 몸에 박혀 들었다.
“케르르르르.”
비홀더들은 독에 중독된 듯 한차례 몸을 파르르 떨더니 곧 바닥에 떨어지며 즉사해 버렸다.
지독한 독이네.
그런데 함정은 1단계 발동으로 끝나지 않았다.
덜컥!
갑자기 바닥 전체가 무너지는 바람에 발 디딜 곳이 없어진 우리는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엇?!”
“까아!”
첨벙!
다행히 떨어진 곳은 물로 채워져 있었다.
그냥 맨바닥이었다면 심각한 부상을 입었겠지? 하지만 난 맥주병이란 말이다!
어푸! 어푸!
당황한 상태로 난 물을 먹으며 허우적거렸다. 그런데 순간 오른쪽 구두에 바닥이 살짝 닿았다.
별로 깊지 않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물속에서 억지로 눈을 떴다.
방향을 확인한 나는 바닥을 발로 차며 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쿨럭. 쿨럭. 설린 씨! 설린 씨!”
물살에 휩쓸려 갔는지 혹은 다른 곳에 떨어진 건지 설린 씨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쉽게 포기하지 못한 난 목청껏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설린 씨! 설린 씨!”
출렁!
그때 물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거기 설린 씨인가요?”
촤아아악―
그러나 물속에서 갑자기 솟아 나온 것은 뭔가 거대한 것이었다.
주위가 온통 캄캄해서 보이지 않았지만 결코 설린 씨의 가냘픈 몸매가 아니었다.
찌이잉―
위기를 느낀 나는 본능적으로 강화계 능력을 끌어냈다.
시각이 수십 배 예민해지자 어렴풋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큼직한 물체가 보였다. 난 공격을 살짝 비켜 내는 동시에 허리를 틀어, 360도 회전 차기를 깔끔하게 날렸다.
파아앙!
“케에에에에―”
발차기를 맞은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저만치 날아가 물속에 풍덩 떨어졌다.
좁은 석실 안이라 그런지 굉장히 큰 소리가 났지만, 타격이 제대로 들어간 것 같지는 않았다.
가죽이 너무 질겨. 마치……. 그래, 악어가죽 같은 느낌이랄까?
촤아아악―
예상대로 충격을 별로 받지 않았는지 그것은 다시 물속에서 불쑥 솟아오르며 나를 덮쳐 왔다.
엄청난 도약력!
이번에는 괴물의 눈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괴물은 황급히 눈을 감았지만, 발차기의 충격이 안으로 파고들며 눈알이 터져 버렸다.
퍼억!
“케에에에에―”
눈알이 터진 괴물은 석실 바닥에 나가떨어진 채 몸부림을 쳤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정말 악어와 닮았다.
단지 TV에서 본 것보다 서너 배는 몸집이 컸고, 캥거루처럼 다리가 늘씬하게 긴 것이 도약력의 비밀 같았다.
꼬리에는 초식 공룡인 스테고사우루스처럼 뼈로 된 날카로운 가시가 4개 있었다.
쉬이이익―
그때 녀석이 갑자기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공격했다.
나름대로 허를 찌른 기습이겠지만, 나에겐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기에 소용없는 짓이었다.
나는 공격을 피하는 대신 녀석의 꼬리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케에에에에―”
악어 괴물은 나를 떨쳐 내기 위해 몸부림을 쳤으나 소용없는 일.
능력으로 강화된 팔뚝은 평소의 두 배로 부풀어 오르며 무지막지한 힘을 발휘했다.
“죽어라!”
난 꼬리를 잡은 채 녀석의 거대한 몸체를 석벽에 휘둘렀다.
파악!
석벽의 돌이 깨지며 파편이 튄다.
녀석의 몸체에 가해진 충격도 적지 않은지 괴물의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생선을 패대기치듯 계속해서 괴물의 물체를 휘둘렀다.
“케에에―”
악어 괴물의 비명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마침내 뚝 끊겼다.
떠구르르.
쩍 벌어진 녀석의 입에서 노란색 구슬이 흘러나왔다.
노란색 구슬은 처음 보는 건데 혹시 이 녀석, 비홀더보다 등급이 더 높은 건가?
파랑색 구슬 10개가 노란색 구슬 하나의 가치다.
촤아아악― 촤아아악―
그 순간, 물속에서 여러 마리의 악어 괴물이 물살을 가르며 나를 향해 접근해 왔다.
여러 마리는 버거운데?
가죽이 워낙 질겨서 공격할 수 있는 부분은 눈알뿐.
충분한 타격을 주려면 꽤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여러 마리가 합공해 오면 위험해진다.
튀자!
불리할 때는 튀는 거다.
강화계 능력을 두 다리에 집중하자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두 배로 커진다.
힘차게 땅을 박차자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나가며 주위의 풍경이 밀려나듯 멀어져 갔다.
“케에에에에―”
악어 괴물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쫓아왔다.
이 비겁한 자식들! 한 번에 한 놈씩 덤비란 말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일주일? 아니면 한 달?
미궁에 진입하는 순간, 가이드 포인터에 표시된 시간도 멈춰 버렸다.
끝없이 미궁의 통로를 헤매다가 지치면 가능한 안전한 곳에 웅크려 잠들기를 수차례. 몬스터들의 위협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시간의 흐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설린 씨는 무사할까? 아니면 벌써 미궁을 빠져나갔을까?
함정에 떨어지며 나는 설린 씨와 헤어지게 됐다.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녀에게는 미궁의 출구를 알려 주는 지도가 있다.
설린 씨의 뇌전 능력은 최상급. 비홀더와 같이 마법 저항력이 높은 몬스터와 맞닥뜨리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무사할 것 같았다.
“어디 한번 볼까?”
부스럭.
나는 기운을 내기 위해 일부러 쾌활하게 외치며 배낭을 열었다.
그동안 모은 아이템은 총 72개.
그중 마법이 부여된 것은 6개로, 대부분 여러 가지 속성 공격에 대한 저항력을 조금씩 높여 주는 것들이다. 웃기게도 힘 +3, 지능 + 4, 이런 식으로 표현된 물건들도 있었다.
이게 무슨 게임이냐? 힘 +3이면 도대체 어느 정도 강해진다는 거야? 애매한 표현이잖아?
그렇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액세서리를 착용하면 활력이 좀 샘솟는다거나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영 효과가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